열두 굽이 깨워 달리는 보은 말티재
열두 굽이 깨워 달리는 보은 말티재
그땐 미처 몰랐던 수학여행지의 진면목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어디든 내달리고 싶은 봄이다. 봄이 마음을, 길이 바퀴를 움직인다.
당진영덕고속도로 속리산 IC에서 국도25호선을 타고 장재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열두 굽이 말티재가 나온다.
이름부터 지붕이나 산의 꼭대기를 의미하는 마루의 준말인 ‘말’과 고개를 뜻하는 ‘재’를 합쳤다.
속도를 즐기는 운전자도 말티재에서는 절로 브레이크를 밟게 된다.
그래서인지 창문을 내리고 계절을 만끽하는 드라이브 여행에 제격이다.
길이 험해 버스 시동이 꺼지던 일은 추억이다.
도로가 지금 모습으로 정비된 후 승용차부터 픽업트럭, 버스, 자전거까지 바퀴가 있다면 누구에게나 열린 드라이브 코스다.
나무가 새잎을 틔운 봄엔 굽잇길이 더욱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장재저수지에서 해발 430m 정상까지 약 1.5km 거리로,
속리산말티재자연휴양림 표지판 옆에 세운 세조의 조형물이 말티재의 시작을 알린다.
지금은 황매화 1만 8000주가 이제나저제나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 중이다.
노란 매화 향에 취해 굽이마다 설치된 반사경을 놓치지 말자. 핸들을 좌우로 돌릴 때, 반대편 차량을 확인하며 안전 운행할 것.
돌고 도는 굽잇길에 역사가 켜켜이 쌓였다.
말티재는 장안면 장재리와 속리산면 갈목리를 연결하던 고개인데,
인근 터널이 뚫리기까지 속리산과 법주사로 향하려면 이 길에 발자국을 남겨야 했다.
신라가 삼년산성을 쌓을 때부터 주요 교통로로 이 길을 사용했다고 전하고,
고려 태조 왕건이 속리산에 행차할 때 임금이 다니는 길을 닦기 위해
3~4리에 걸쳐 얇은 돌을 깔았다는 내용이 조선 관찬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다.
태조 이성계는 왕이 되기 전, 법주사 말사인 상환암에서 백일기도를 올리려고 험준한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특히 말티재는 조선 7대 임금 세조와 인연이 깊다.
세조는 한양에서 청주를 거쳐 속리산으로 향할 때 말티재를 넘었다.
수양대군 시절부터 스승이던 신미대사를 만나러 온 길이었다. 세조가 고개에 이르러 연에서 내려 말로 갈아탔다고 전해지는데,
가마가 오르지 못할 정도로 가팔랐기 때문이다. 왕도 힘겹게 오른 말티재에 자동차 길이 개설된 건 1924년.
도로 폭을 확장해 지금 모습의 원형을 갖춘 것이 1960년대니, 그 옛날 걸어서 고개를 넘던 사람들에게는 내뱉은 숨만큼 각자 사연이 있었겠다.
스릴이 넘치는 S자 코스를 완주하면 백두대간속리산관문이 맞이한다. 관문은 3층 터널로 조성했는데,
아치형 생태 통로를 만들고 양쪽에 자비성과 보은성 현판을 걸었다.
1층은 차량 통행 터널이고, 2층에는 생태 문화 교육장과 상설 전시관, 꼬부랑길카페를 마련했으며, 3층은 야생동물이 오가는 생태 숲으로 복원했다.
말티재전망대는 2층 꼬부랑길카페를 지나 전시관을 통과하면 나온다.
초록 나뭇잎 모양 나선형 전망대가 눈에 띈다. 전망대 운영 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 동시 수용 인원 70명이다.
높이 20m 전망대에 오르면 열두 굽이 말티재가 한눈에 잡힌다. 툭 튀어나온 전망대 끝을 향해 조심스레 발을 내디딘다.
나무 덱이 바람에 흔들려 아찔한데, 고갯마루에 이르러 굽어보는 장쾌한 전망이 긴장하고 올라온 고갯길 드라이브와 맞바꿀 선물이다.
말티재 드라이브 여행은 정해진 코스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