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결정이 말라붙은 고흥 오마도 간척지
눈물의 결정이 말라붙은 고흥 오마도 간척지
부여 백제문화단지 1400년 전 백제의 숨결이 깨어나다
행락이 아닌 ‘여행’이라면, 길 위에서 더러 뜨거운 상처 같은 이야기들과 만나게 된다.
이긴 자들보다 진 자들이, 성공한 자들보다 실패한 이들이, 가진 자들보다 못 가진 자들이 살아낸 삶은 언제나 더 뜨겁다.
입신양명이나 부귀영화야 당대의 성취쯤으로 끝나지만, 못 다 꾼 꿈이나 가슴 치는 억울함은 오래 남아 긴 시간을 건너간다.
그렇게 건너온 이야기를 여름의 절정을 넘어서 찾아간 고흥 땅에서 만났다.
너른 논이 까마득한 소실점까지 이어지는 해창만 간척지.
논과 논 사이에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는 물길이 하늘을 담아낸다.
소외된 이들의 눈물과 가난한 이들의 희망이 소금 결정처럼 남아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전남 고흥의 오마도 간척지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눈물겨운 가난에 뿌리를 대고 있는 땅.
그곳에 갈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도, 노을이 물드는 모습을 바라보다 자주 울컥하게 되는 것도 모두 간척지를 이룬 것들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서울 여의도 크기의 세 배쯤 되는 고흥 오마도 간척지는 한센인들이 1962년부터 3년 동안
소록도 북쪽 풍양 반도에서 도양읍 봉암 반도까지 2㎞가 넘는 바다를 메워 만들어낸 땅이다.
간척을 위해 한센병 음성환자 2000명이 2개의 작업대로 나누어 교대로 한 달씩 일했다.
당시 소록도의 한센병 음성환자는 3300명.이 중 작업이 가능한 인원이 2000명 정도였으니 일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다 나섰던 셈이었다.
이들에게 지급된 장비는 삽과 손수레뿐.
대나무와 소나무로 만든 사다리를 수심 8m가 넘는 바다에 박아놓으면
이튿날 펄 속으로 다 잠겨버렸고, 인근의 산에서 캐낸 흙과 바위를 리어카로 실어 바다에 부으면 밀물의 바다가 이내 흙을 육지 쪽으로 밀어붙였다.
사다리를 다시 짜서 바다에 넣고 밀려 나간 흙을 다시 바다에 쏟아붓기를 끝없이 반복했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막은 제방이 거센 조류에 허망하게 터져버린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노동. 부상자는 속출했고 더러는 목숨을 잃기도 했다.
한센인들은 왜 이런 고된 노동을 마다하지 않았을까. 그들이 원했던 것은 ‘정착’이었다.
완치돼 전염성이 없다는 판정을 받은 음성 환자들은 귀향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부푼 꿈을 안고 고향으로 향했던 이들은 십중팔구 다 병원으로 돌아왔다. 고향의 가족마저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돌아온 한센인에게 병원장은 ‘바다 간척사업에 나서면 새로운 정착촌을 만들어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소록도를 떠나 육지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한센병 환자들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반세기가 넘도록 치유되지 않을 상처의 시작이 이랬다.
물막이 공정이 80~90%가 끝났을 무렵, 정부는 돌연 한센병 환자들을 모두 내쫓았다.
총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이 ‘한센병 환자와는 함께 살 수 없다’고 반대하던 간척지 주변 주민들의 민원에 굴복했던 것이었다.
스스로의 손으로 땅을 만들어 살고자 했던 한센인들의 꿈은 이렇듯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소외된 병자를 국가가 주도하는 건설사업에 동원했던 것이나 약속을 저버리고 파렴치하게 마지막 꿈마저 빼앗았던 건 무자비한 폭력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폭력에 유린당한 이들은 이 땅에서 가장 낮고 불쌍한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