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을 극복한 강직한 삶 오리 이원익 선생을 만나는 충현박물관
국난을 극복한 강직한 삶 오리 이원익 선생을 만나는 충현박물관
조선 선조와 광해군 때의 이야기를 다룬 사극 <징비록>과 <화정>이 최근 방영되고 있다.
<징비록>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이야기를, 화정은 광해군 시대 정명공주의 삶을 그린다.
비록 주연은 아니지만 두 드라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있다.
오리 이원익 선생이다. 그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등 격동의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를 위해 묵묵히 헌신한 명재상이자 이 시대의 귀감이 되는 청백리였다.
오리 이원익 선생의 삶과 유물을 만나볼 수 있는 광명 충현박물관을 찾아가 본다.
영의정만 다섯 차례 오른 명재상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봉우리라 불리는 구름산.
광명시 구름산 서쪽 자락에는 조선시대 명재상이자 청백리로 이름을 드높인 오리 이원익 선생의 흔적이 담긴 충현박물관이 있다.
먼저, 오리 이원익 선생의 삶을 들여다보자.
선생은 조선 명종 때 태어나 선조, 광해군, 인조 대에 이르기까지 60여 년에 걸쳐 공직에 몸담았다.
권력과 부에 집착하지 않고 원칙과 소신으로 국난을 헤쳐나간 명재상이자 청백리, 그리고 백성을 사랑했던 정치가였다.
선조부터 인조 대까지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이라는 두 차례 국난을 겪었고, 당쟁으로 말미암아 조정 대신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분란의 시대였다.
이원익 선생은 이 혼란의 시대를 거치며 다섯 차례나 최고 중앙관직인 영의정에 올랐다.
선생의 애민사상은 그를 기리기 위해 살아생전에 생사당을 세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 그는 안주목사로 부임했다. 평양과 안주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서 평안도라 불린 만큼 안주는 변방이지만 무척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백성을 위해 양곡을 요청해 풍작을 이루었고, 양잠도 장려하는 등 백성들을 보살폈다.
백성들이 그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생사당을 세운 것도 이때 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의주까지 피난시킬 수 있었던 것도 안주목사 때 선정을 베풀어 민심을 얻은 결과였다.
인조 때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당시에도 임금을 모시고 충남 공주와 강화도로 각각 호종했다.
당시 그의 나이 78세, 81세에 이르는 노구의 몸이었다.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하다 홍천으로 유배되기도 했고, 인조 즉위 후 광해군을 죽이려 하자 몸소 막았으며, 서애 류성룡이 충무공 이순신을 비판할 때 끝까지 믿음을 보낸 것도 그였다.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개의치 않고 소신을 펼친 일화는 그가 얼마나 강직한 성품을 지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공직에만 60여 년간 몸담았고,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거치며 망가질 대로 망가진 조선을 위해 헌신했지만, 아쉽게도 가정에는 소홀했던 듯하다.
부인 영일 정씨가 1603년에 세상을 떠나자 부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도망시(悼亡詩)>에 미안한 마음이 애절하게 배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