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근대건축기행 백제 역사에 가려진 근대 문화
공주 근대건축기행 백제 역사에 가려진 근대 문화
자연 치유의 도시 제천 관광두레 마을로 떠나는 체험여행
사람의 선입견은 참으로 무섭다. 한 가지 일이나 사물에 고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면 다른 방면으로는 잘 생각하지 않으니 말이다.
공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백제의 수도로 잘 알려진 탓에 무령왕릉, 공산성 등 백제 유적만 떠올릴 뿐 다른 시대의 유적은 생각하지 않는다.
공주에는 삼국시대 이전의 선사문화 유적에서 고려, 조선에 이어 근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별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들 유적에 관심을 주지 않으니, 어쩌면 백제 역사의 피해자들이 아닐까.
공주 근대건축기행의 출발점은 선화당이다.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우측으로 국궁장이 보이고, 그 맞은편에 선화당이 있다.
선화(宣化)는 ‘왕의 덕을 드러내어 널리 펼치고 백성을 교화한다’는 뜻이다. 너른 잔디밭이 인상적인 선화당은 충청도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곳이다.
오늘날로 치면 대전광역시와 충청도를 아우르는 도청인 셈이다.
조선시대 충청감영은 영호남과 어깨를 견주는 호서 지역의 지방 거점이었다.
창건 당시에는 정면 9칸, 측면 5칸이었는데 현재는 정면 8칸, 측면 4칸으로 규모가 축소되었다.
1937년 옛 국립공주박물관의 진열관으로 사용되다가 1992년 박물관이 이전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정면으로 보이는 2층 누각은 선화당의 정문인 포정사다.
아래층은 큰 문을 달아 출입구로 사용하고, 위층은 누각으로 사용했다.
일제강점기까지 공주사대부고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누각에 오르면 소나무 정원과 선화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선화당과 포정사 사이에 길게 늘어선 건물은 동헌이다.
관찰사가 행정 업무를 보고 재판을 하던 장소이다. 멋을 내지 않은 단아함이 양옆 소나무 정원과 어우러져 멋스럽다.
두 번째 코스인 옛 공주읍사무소는 붉은 벽돌이 인상적이다.
성냥갑처럼 네모반듯해서 한눈에 보기에도 근대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이 건물은 공주가 지방 행정의 중심에서 교육도시로 전환되는 과정에 행정을 담당했던 곳이다. 공주의 가장 큰 변화를 보여주는 공간인 셈이다.
1920년 충남금융조합 연합회 회관으로 건립된 이래 1930~1985년까지 공주읍사무소, 공주가 시로 승격되면서 시청사로 사용되었다.
현재 내부 공사 중이라 주변이 어수선한 게 흠이나 정면에 보이는 4개의 원형 기둥과 좌우로 원형창을 대칭으로 배열한 것이 인상적이다.
파리의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아치형 입구는 전형적인 고전주의 건축 기법이라고 한다.
건물 뒤편으로 시민의 쉼터가 조성되어 공사가 마무리되면 훌륭한 역사 교육장이 될 것 같다.
옛 공주읍사무소에서 뒤편 봉황동으로 10분 남짓 걸으면 고딕 양식의 공주제일교회를 만날 수 있다.
현대식 건물 사이에 끼어 있어 그리 오래돼 보이지 않지만 1930년에 붉은 벽돌로 지은 남부 지방 최초의 감리교회다.
6·25전쟁 때 많이 파손됐는데 벽, 굴뚝 등 그대로 보존할 수 있는 것을 남기고 보수해서 구석구석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다.
건물 벽면에 개축 연도가 표시되어 있다. 첨탑 아래 ‘예배당’이라 조각된 글씨가 낯설면서도 정감이 간다.
공주제일교회 내부는 박물관으로 꾸며놓았다. 1층은 ‘나눔의 순례길’로 공주제일교회 신도들의 사진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2층 ‘복음의 역사길’은 교회 설립 후 민족과 사회에 대한 공헌과 업적을 되돌아볼 수 있는 사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발길을 국고개 제일 높은 곳으로 돌리면 고딕식 종탑을 갖춘 중동성당이 나온다. 공주에 천주교를 전파한 이는 1898년 프랑스 선교사 진 베드로 신부다.
성당 건물은 1921년 주임으로 부임한 최종철 마르코 신부가 서울의 약현성당을 모델로 직접 설계해서 1936년에 완공했다.
성당과 사제관, 수녀원 등을 갖추고 이듬해 5월 12일 축성식을 가졌으나 현재는 본당과 사제관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