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에서 즐기는 지질 여행 청송국가지질공원

청송에서 즐기는 지질 여행 청송국가지질공원

청송에서 즐기는 지질 여행 청송국가지질공원

공주 근대건축기행 백제 역사에 가려진 근대 문화

최근 지오투어리즘(Geo-tourism)이 새로운 관광 패턴으로 자리 잡고 있다.

지오투어리즘은 천연의 지질 자원을 관광 상품으로 활용하여 관광객을 유치하는 ‘지질 관광’을 일컫는 말이다.

청송은 지난 4월 제주도와 울릉도·독도, 부산광역시, 그리고 철원군·화천군·양구군·인제군·고성군 등 5개 군을 포함하는 강원평화지역과 함께 국가지질공원으로 등재되었다.

청송의 주왕산을 비롯해 5개 읍·면에 산재해 있는 지질 명소를 찾아가본다.

신성계곡에서 만나는 공룡 발자국과 방호정 퇴적층

청송의 지질 명소는 청송읍, 부동면, 진보면, 안덕면, 부남면 등 5개 읍·면에 산재해 있다.

주왕산지구 13곳과 신성지구 4곳을 포함해 총 17개의 지질 명소를 보유하고 있다.

그 가운데 신성지구는 청송자연휴양림 내 퇴적층을 포함해 방호정 퇴적층, 신성공룡발자국, 백석탄 등 4곳이다.

4곳의 지질 명소 가운데 방호정 퇴적층과 신성공룡발자국, 백석탄은 안동 길안면으로 흐르는 길안천인 신성계곡 일대에서 차례로 만난다.

신성지구에서 첫 번째로 만나는 지질 명소는 방호정을 떠받치고 있는 듬직한 기암절벽이다.

방호정은 조선 광해군 때 선비인 조준도가 어머니를 생각하며 지은 정자다.

방호정 아래의 기암절벽은 일명 방호정 퇴적층이다.

방호정 퇴적층이 생성된 것은 1억 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랜 세월 동안 화성암, 퇴적암, 변성암 등이 풍화와 침식작용으로 잘게 부서지고,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의 흐름에 의해 이동하게 된다.

물의 흐름이 느려지는 곳에서 쌓이게 되고, 이때 쌓인 퇴적층이 굳어지면 퇴적암이 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지구 판의 이동이나 조산운동에 의해 지각이 움직이면서 형태가 변하게 되는데, 방호정 퇴적층은 지층이 융기되면서 옆으로 기울어졌다.

또한 지층의 가장 윗부분은 침식작용으로 평탄하게 다져졌다.

그리고 그 위에 방호정이 지어진 것이다.

방호정 입구에서 바라다보면 지층이 대각선으로 쌓인 것처럼 보이는데,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작용한 결과다.

방호정에서 건너편 산을 바라보면 울창한 숲 사이로 삿갓 모양을 한 암반이 보인다.

지난 2003년 태풍 매미가 지나면서 산사면의 토사가 무너져 내렸는데 이곳에서 용각류, 수각류, 조각류 등 400여 개의 공룡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용각류는 흔히 알고 있는 브라키오사우루스 같은 몸집이 크고 목이 긴 초식공룡이고,

수각류는 티라노사우루스처럼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진 육식공룡,

조각류는 이구아노돈 같은 쥐라기, 백악기를 주름잡던 공룡이다.

400여 개의 발자국은 걸어간 듯한 일정 간격으로 같은 방향으로 나 있다.

공룡이 지나갔던 흔적, 과연 공룡들은 무엇을 위해 이곳을 지나갔을까?

공주 근대건축기행 백제 역사에 가려진 근대 문화

공주 근대건축기행 백제 역사에 가려진 근대 문화

공주 근대건축기행 백제 역사에 가려진 근대 문화

서해의 품에서 캐낸 보물 보령 오천항 키조개

공주 근대건축기행의 출발점은 선화당이다.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우측으로 국궁장이 보이고, 그 맞은편에 선화당이 있다.

선화(宣化)는 ‘왕의 덕을 드러내어 널리 펼치고 백성을 교화한다’는 뜻이다.

너른 잔디밭이 인상적인 선화당은 충청도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곳이다.

오늘날로 치면 대전광역시와 충청도를 아우르는 도청인 셈이다.

조선시대 충청감영은 영호남과 어깨를 견주는 호서 지역의 지방 거점이었다.

창건 당시에는 정면 9칸, 측면 5칸이었는데 현재는 정면 8칸, 측면 4칸으로 규모가 축소되었다.

1937년 옛 국립공주박물관의 진열관으로 사용되다가 1992년 박물관이 이전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정면으로 보이는 2층 누각은 선화당의 정문인 포정사다.

아래층은 큰 문을 달아 출입구로 사용하고, 위층은 누각으로 사용했다.

일제강점기까지 공주사대부고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누각에 오르면 소나무 정원과 선화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선화당과 포정사 사이에 길게 늘어선 건물은 동헌이다. 관찰사가 행정 업무를 보고 재판을 하던 장소이다.

멋을 내지 않은 단아함이 양옆 소나무 정원과 어우러져 멋스럽다.

두 번째 코스인 옛 공주읍사무소는 붉은 벽돌이 인상적이다.

성냥갑처럼 네모반듯해서 한눈에 보기에도 근대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이 건물은 공주가 지방 행정의 중심에서 교육도시로 전환되는 과정에 행정을 담당했던 곳이다. 공주의 가장 큰 변화를 보여주는 공간인 셈이다.

1920년 충남금융조합 연합회 회관으로 건립된 이래 1930~1985년까지 공주읍사무소, 공주가 시로 승격되면서 시청사로 사용되었다.

현재 내부 공사 중이라 주변이 어수선한 게 흠이나 정면에 보이는 4개의 원형 기둥과 좌우로 원형창을 대칭으로 배열한 것이 인상적이다.

파리의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아치형 입구는 전형적인 고전주의 건축 기법이라고 한다.

건물 뒤편으로 시민의 쉼터가 조성되어 공사가 마무리되면 훌륭한 역사 교육장이 될 것 같다.

옛 공주읍사무소에서 뒤편 봉황동으로 10분 남짓 걸으면 고딕 양식의 공주제일교회를 만날 수 있다.

현대식 건물 사이에 끼어 있어 그리 오래돼 보이지 않지만 1930년에 붉은 벽돌로 지은 남부 지방 최초의 감리교회다.

6·25전쟁 때 많이 파손됐는데 벽, 굴뚝 등 그대로 보존할 수 있는 것을 남기고 보수해서 구석구석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다. 건물 벽면에 개축 연도가 표시되어 있다.

첨탑 아래 ‘예배당’이라 조각된 글씨가 낯설면서도 정감이 간다.

공주제일교회 내부는 박물관으로 꾸며놓았다. 1층은 ‘나눔의 순례길’로 공주제일교회 신도들의 사진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2층 ‘복음의 역사길’은 교회 설립 후 민족과 사회에 대한 공헌과 업적을 되돌아볼 수 있는 사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서해의 품에서 캐낸 보물 보령 오천항 키조개

서해의 품에서 캐낸 보물 보령 오천항 키조개

서해의 품에서 캐낸 보물 보령 오천항 키조개

광주 양림동 펭귄마을 뒤뚱뒤뚱 과거 속으로

보령 북부권의 모든 길은 오천과 통한다는 말이 있다.

백제시대에 오천항이 보령의 주요 항구와 군항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후 오천항은 작은 어촌 항구로 위세가 꺾였지만, 근래 들어 키조개로 인해 다시 옛 영광을 찾아가는 중이다.

키조개 전국 생산량의 60% 정도를 오천항이 차지하니 전국 각지의 미식가들이 포구로 모여든다.

진달래 피는 4월부터가 키조개 제철이다.

‘오천’의 한자어는 ‘자라 오(鰲)’, ‘내 천(川)’을 쓴다.

오천을 비롯한 천수만 일대의 지형이 마치 자라와도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다 양면에 있는 산이 방파제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아무리 심한 폭풍우에도 피해가 없고, 수심이 깊어 간만의 차로 인한 선박의 통행이 전혀 불편하지 않은 천혜의 항구다.

항이라고 하지만 규모는 작다. 여행객을 위한 변변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지도 않다.

바닷가를 따라 식당이 있고, 식당에서 마음에 드는 해산물을 구입할 수 있는 정도다.

그럼에도 봄철을 맞아 오천항을 찾는 이유는 국내 최대의 키조개 산지이기 때문이다.

키조개는 수심 20~50m의 깊은 모래흙에 수직으로 박혀 있다.

낚시로 잡는 것도 아니고, 그물로 걷어 올리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사람이 직접 바닷속에 들어가 하나하나 건져 올린다. 키조개를 캐는 일은 머구리의 몫이다.

이름도 생소한 머구리는 잠수부의 속칭이다. 바닷물에 들어가 고기를 잡거나 해산물을 채취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머구리는 물때에 맞춰 바다로 나가 작업을 한다.

짧게는 3시간, 길게는 6시간 이상 바닷속을 헤매며 키조개를 잡는다.

작업이 가능한 날은 보름 정도. 사리 때는 물살이 거세서 작업을 못하고 조금 때만 작업한다.

오천항 머구리들은 키조개를 찾아 수심 40m 이상 들어가는 일이 다반사다.

힘들고 위험한 일이지만 키조개가 삶을 지탱해주는 돈줄이니 어쩔 수 없다.

장비라야 물안경과 갈퀴가 전부다. 잠수복을 입는다고는 하지만 장비가 너무나 단출하다.

여기에 공기 호스가 연결된 호흡기가 전부다. 심해 잠수부들이 사용하는 튼튼한 헬멧 같은 것은 키조개 채취에 방해가 돼서 없는 게 낫다고 한다.

머구리가 바닷속으로 뛰어들면 잔잔한 수면 위로 공기방울이 하나둘 올라온다.

넓은 바다에서 머구리의 흔적은 이게 전부다.

배에 남은 선원들이 해줄 수 있는 건 그의 신호를 기다렸다가 어망을 내려주고, 공기 호스를 통해 공기가 잘 주입되고 있는지 혹 호스가 꼬이지는 않았는지 살피는 게 전부다.

작업이 끝날 때까지 머구리는 2시간이든 3시간이든, 춥고 어두운 바닷속을 홀로 걸으며 고군분투해야 한다.

사실 머구리에게 작업시간이란 딱히 정해진 게 아니다.

정해진 물량을 채우면 작업이 끝난다. 만일 작업장을 잘못 찾아 들어가면 허탕만 치고 종일 고생해야 한다.

광주 양림동 펭귄마을 뒤뚱뒤뚱 과거 속으로

광주 양림동 펭귄마을 뒤뚱뒤뚱 과거 속으로

광주 양림동 펭귄마을 뒤뚱뒤뚱 과거 속으로

명동성당에서 중앙우체국까지 구석구석 명동 산책

전남 광주 양림동은 과거로 떠나는 타임머신 여행지다.

광주 근현대사 여행지로 인기가 높은 이곳엔 옛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또 다른 시간 여행지가 있다.

이름도 재밌는 펭귄마을. 비록 펭귄은 살지 않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잡다한 볼거리들이 가득하다.

시간 여행 속 색다른 여행지로 떠오르는 곳이다.

양림 커뮤니티센터 옆 골목길은 1970~1980년대의 시간으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다.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울 만큼 작고 좁다.

골목길 입구, 가스통을 재활용해 만든 펭귄을 발견한 순간부터 펭귄마을표 웃음 넘치는 추억 여행이 시작된다.

펭귄마을로 한 걸음 떼자마자 나타난 낡고 허름한 담벼락 풍경이 시간을 십여 년 전으로 점프시켜 놓는다.

오래되어 거무죽죽 얼룩이 진 콘크리트 담장엔 검정색 스프레이를 뿌려 적은 옛 시절 이삿짐센터 광고와 마을 지도, 색색의 분필로 적은 온갖 낙서들이 가득하다.

몇 발자국 더 떼어놓고 나면 아예 멈춰 서서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부엌에나 있어야 할 양은냄비며 프라이팬, 소쿠리들이 일광욕이라도 즐기듯 담벼락에 딱 달라붙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재미난 담벼락 전시를 지나면 본격적인 마을 탐방이 시작된다.

작은 꽃들과 나무들을 가꿔놓은 아담한 마을 정원은 이곳 주민들의 휴식처인 동시에 여행자들에게는 멋진 포토존이 되어준다.

물론 평범한 정원이 아니다. 나무 열매 대신 기타와 미러볼이 걸려 있고 꽃밭 사이엔 곡식을 켜던 키가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

이쯤 되면 마을 이름이 왜 ‘펭귄마을’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펭귄마을은 독거노인을 비롯해 주민 연령층이 높은 이 마을의 특징을 담고 있다.

나이 든 어르신들의 걷는 모습이 뒤뚱거리는 펭귄을 닮아 별칭처럼 부르던 것이 아예 마을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적막한 마을 분위기를 좀 더 즐겁고 활력 있게 만들어보려는 애정 어린 별칭인 셈이다.

별칭과 더불어 펭귄마을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꾸며지기 시작한 건 약 5년 전부터.

이 마을의 촌장을 자처하는 김동균 씨가 동네 빈집에 쓰레기처럼 쌓여 있던 오래된 물건과 온갖 잡동사니들을 가지고 취미 삼아 이곳저곳 꾸미고 장식하던 것에서 시작됐다.

그 사이 주민들이 자신이 갖고 있던 옛 물건들을 내놓고 합심해 마을을 가꾸면서 이곳 쓰레기들은 추억의 시간 여행을 위한 훌륭한 원동력이 되었다. 모두 실생활에서 쓰이던 것이라 그런지 왠지 더 정감이 간다.

아마도 이것이 펭귄마을만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평범하기 그지없던 마을이 ‘발상의 전환’으로 인해 요즘 핫플레이스로 손꼽히는 타임머신 여행지로 재탄생된 것이다.

명동성당에서 중앙우체국까지 구석구석 명동 산책

명동성당에서 중앙우체국까지 구석구석 명동 산책

명동성당에서 중앙우체국까지 구석구석 명동 산책

옛것과 현재가 조화로운 광주 여행자의 방

1898년 문을 연 명동성당은 100여 년의 세월 동안 한국 천주교의 상징이자 ‘민주화의 성지’였다.

시국미사가 열리고 공권력에 쫓기는 민주인사들이 최후로 몸을 기대는 장소였다.

명동성당 입구에는 어디에도 호소할 곳 없는 가난하고 억울한 이웃들의 농성 천막이 줄지어 있었다.

‘명동성당을 보존하고 신자와 시민들을 위한 열린 공간을 조성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명동성당 종합계획 공사는 명동성당 들머리의 모습을 사뭇 바꿔놓았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성당 입구 지하에 들어선 ‘1898 명동성당’이다.

성당이 처음 세워진 해를 기념하는 이름을 가진 이 지하공간은 갤러리와 커피숍, 꽃가게와 근대 유물전시실 등이 입주했다.

1898이라는 숫자를 형상화한 간판이 달린 조그만 입구를 지나면 초기 기독교의 카타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지하공간이 나온다.

다양한 상업시설이 들어선 것도 카타콤과는 다른 점이다.

200대 규모의 지하주차장을 만들어 성당을 찾는 차량들 때문에 발생되는 사고나 성당 균열 등의 문제도 말끔히 해결했단다.

거대한 지하공간 위 소박한 진입로는 명동성당 건축 당시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했다고 한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자그마한 녹지가 있는데, 구석구석 벤치를 놓아 누구나 쉬어갈 수 있게 했다.

입구 오른쪽에는 붉은 벽돌 건물 둘이 보인다. 각종 공연과 혼인미사 등이 열리는 파밀리아 채플과 연회장인 프란치스코 홀이다.

파밀리아 채플 1층에는 유럽의 노천 카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비스트로 74’가 손님들을 맞고 있다.

명동성당에서 명동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명동예술극장이 나온다.

명동예술극장이 문을 연 것은 최근이지만, 이곳에 처음 극장이 들어선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이었다.

‘명치좌’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고 주로 일본 영화를 상영했는데, 해방 이후 ‘국제극장’으로 간판을 바꿨다가,

서울시가 인수하면서 ‘시공간’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연극 공연장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후 명동국립극장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면서 대한민국 연극 공연의 중심으로 ‘명동시대’를 이끌었다.

1973년 충무로에 국립극장이 들어서면서 명동국립극장은 국립극장 예술분관이 되었지만, 얼마 안 가 금융회사에 인수되었다.

그러다 문화관광부가 건물을 매입하면서 지난 2009년 연극 전문 공연장인 명동예술극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명동예술극장에서 다시 명동로를 따라 내려가다 작은 골목길에 들어서면 중국대사관과 화교학교인 한성소학교를 중심으로 작은 차이나타운이 펼쳐진다.

흔히 ‘중국대사관 거리’라 불리는 이곳에는 오래된 중국 음식점과 약재상들, 한성화교협회와 삼민주의대동맹 한국지구 등이 자리잡고 있다.

한때는 한국 내 화교들의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중국 관광객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듯, 환전상과 한류 관련 상품 판매점도 눈에 띈다.

청기와를 얹은 거대한 붉은 문이 인상적인 중국대사관 앞은 중국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지나고 있었다.

중국대사관 거리는 서울중앙우체국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의 근대 우편제도는 1884년 문을 연 우정총국이 출발점이었다.

우정총국 개국식에서 벌어진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우정총국은 폐쇄되었으나, 1905년 명동에 경성우편국이 들어서면서 우편제도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옛것과 현재가 조화로운 광주 여행자의 방

옛것과 현재가 조화로운 광주 여행자의 방

옛것과 현재가 조화로운 광주 여행자의 방

예술 마을로 변신한 대한민국 첫 조선소

고풍스러운 정취와 현대적 감각을 아우르는 광주에서

여행자 못지않은 추억이 될 숙소를 소개한다.

마음 맞는 이를 만나 여행 친구로 만들고 싶다면, 아이엠게스트하우스

낯선 곳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 소통하고 친밀한 관계를 쌓는 경험은 여행의 또 다른 묘미다.

처음 본 사람을 여행 친구로 만드는 즐거움을 얻고 싶다면 가성비까지 뛰어난 게스트하우스만 한 곳이 있을까.

‘아이엠게스트하우스’는 광주역에서 도보로 10분밖에 걸리지 않고, 내일로 티켓을 소지하면 숙박료 할인을 받아 내일러에겐 성지와 같다.

처음부터 게스트하우스를 염두에 두고 건물을 지었기에 공간 활용이 최적화됐다는 것도 강점이다.

손님을 가장 먼저 맞는 1층은 소통을 위한 공간이다.

면적이 넓고 테이블을 여럿 비치해 대화를 나누거나 책장에 꽂힌 보드게임을 즐기기 좋다.

자리가 부족해도 걱정할 필요 없다. 나선형 계단 아랫부분에 둘러앉을 수 있는 양탄자를 깔았고, 2층엔 1층보다 널찍한 거실이 있으니까.

놀 공간은 훌륭하지만 막상 분위기가 서먹하면 허사일 터.

유쾌한 성격에 남다른 붙임성을 자랑하는 손일한 대표가 흥겨운 파티 분위기를 북돋우니 이 또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곳을 놀기 좋은 곳으로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많으면 50명을 수용하는 일곱 개 객실은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청결하고, 게스트하우스로는 드물게 개인 사물함을 구비해 편리함에 안전까지 신경 썼다.

오랫동안 여행한 이에겐 희소식이 될 드럼세탁기 다섯 대와 머리를 말리거나 화장을 하는 파우더 룸 등 편의 시설도 눈에 띈다.

비즈니스를 위해 광주를 찾은 사람이 방문하는 장소는 상무지구일 가능성이 높다.

광주에서 가장 번화한 데다 시청, 교육지원청, 세무서, 환경공단 등 관공서가 밀집했고 김대중컨벤션센터도 가깝기 때문이다.

상무지구 중심에 위치한 ‘호텔 더 메이’는 업무차 광주에 머무는 사람에게 합리적인 선택이 될 비즈니스호텔이다.

넉넉하게 잡아도 걸어서 5분이면 시청에 도착하는 것은 물론 어지간한 관공서는 택시를 이용할 경우 기본요금만 지불하면 된다.

일반적인 여행과는 다른 비즈니스 여행만의 특성에 맞춰 실내를 구성한 점도 돋보인다.

로비는 화려한 치장을 배제하고 있어야 할 것만 갖추었지만 부티크 스타일의 개성이 잘 묻어나며,

한편엔 책이 빼곡하게 꽂힌 서가가 멋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업무차 묵는 손님은 혼자인 경우가 많아 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7층엔 어느 때건 무료로 이용 가능한 비즈니스 센터가 있다. 컴퓨터, 프린터, 팩스, 프레젠테이션용 스크린, 회의 테이블,

간단한 사무용품을 비치해 잡다한 물품을 가져오지 않아도 문제없이 업무를 처리하도록 돕는다.

35개 객실 대다수가 작은 규모의 비즈니스 더블 룸이고 숙박비가 동급 호텔보다 저렴하다는 것도 장점이다.

딜럭스 더블 룸에선 안마 의자가 출장의 피로를 말끔하게 씻어 준다.

100년 전엔 아무도 몰랐겠다. 이 한옥이 누구라도 반갑게 맞아들여 휴식을 선사하는 공간이 될 거라는 사실을.

예술 마을로 변신한 대한민국 첫 조선소

예술 마을로 변신한 대한민국 첫 조선소

예술 마을로 변신한 대한민국 첫 조선소

메마른 감성을 촉촉하게 적셔줄 광주 예술 여행

조선소의 망치 소리로 요란하던 마을이 근사한 예술마을로 재탄생했다.

지금도 커다란 배를 만드는 용접 소리가 귀를 어지럽히고 거대한 프로펠러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기름 냄새, 쇠 냄새, 바다 냄새가 뒤섞인 깡깡이 예술마을 골목에는 삶의 흔적이 녹은 예술작품과 다양한 체험이 기다린다.

부산 영도구 대평동 옛 도선장 주변 동네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조선소가 들어선 곳으로, 지금도 조선 업체 12개가 운영 중이다.

‘깡깡이’라는 마을 이름은 아주머니들이 배의 녹슨 표면을 벗겨내는 망치질 소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2000년 이후 쇠락하던 마을은 2015년 문화예술형 도시재생 프로젝트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예인선을 개조해 꾸민 선박 체험관, 옛 영도 도선의 이야기를 들으며ᅠ남항 일대를ᅠ둘러볼 수 있는 ‘깡깡이 유람선’, 방문객들이 시계,

장식품 등을 조립해 볼 수 있는 ‘깡깡이 마을 공작소’ 등 즐길 거리가 풍부하다.

골목 곳곳에 자리한 조각품과 벽에 그려진 벽화도 볼거리다.

신기한 선박체험관 : 예술가들이 참여해 예인선을 선박 체험 공간으로 꾸몄다.

파도의 힘을 이용한 휘파람 소리 체험 기계, 엔진으로 다양한 빛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기관실 등이 있다.

깡깡이 마을 박물관 : 대평동 수리조선업에 얽힌 이야기를 마을의 유물과 영상, 예술작품 등을 통해 들려준다.

어린이 : 깡깡이 예술마을 메이커스 프로그램. 비즈공예. 드로잉엽서. 키트 조립

메이커스 프로그램 : 비즈공예. 드로잉엽서. 키트 조립. 주말 11:00~17:00. 체험비 별도

깡깡이 예술마을 통합투어 : 매주 토, 일요일 1일 3회 운영.

10인 이상 20인 이하 선착순 출발. 13세 이하 보호자 동반 필수. 만 6세 미만 유람선 탑승 불가. 1시간 10분 소요.

깡깡이 예술마을은 산업현장 가운데 있다.

작업중인 수리조선소도 많으니 안전을 위해 함부로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평일에는 대중교통이 편하며, 사진촬영도 허가된 곳에서만 하자.

조선소의 망치 소리로 요란하던 마을이 근사한 예술마을로 재탄생했다.

지금도 커다란 배를 만드는 용접 소리가 귀를 어지럽히고 거대한 프로펠러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기름 냄새, 쇠 냄새, 바다 냄새가 뒤섞인 깡깡이 예술마을 골목에는 삶의 흔적이 녹은 예술작품과 다양한 체험이 기다린다.

조선소 마을 곳곳에 숨은 예술품을 만나는 재미

부산 영도구 대평동 옛 도선장 주변 동네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조선소가 들어선 곳으로, 지금도 조선 업체 12개가 운영 중이다.

‘깡깡이’라는 마을 이름은 아주머니들이 배의 녹슨 표면을 벗겨내는 망치질 소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2000년 이후 쇠락하던 마을은 2015년 문화예술형 도시재생 프로젝트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예인선을 개조해 꾸민 선박 체험관, 옛 영도 도선의 이야기를 들으며ᅠ남항 일대를ᅠ둘러볼 수 있는 ‘깡깡이 유람선’,

방문객들이 시계, 장식품 등을 조립해 볼 수 있는 ‘깡깡이 마을 공작소’ 등 즐길 거리가 풍부하다. 골목 곳곳에 자리한 조각품과 벽에 그려진 벽화도 볼거리다.

메마른 감성을 촉촉하게 적셔줄 광주 예술 여행

메마른 감성을 촉촉하게 적셔줄 광주 예술 여행

메마른 감성을 촉촉하게 적셔줄 광주 예술 여행

고개와 능선 따라 펼쳐지는 하얀 군무 무등산 억새

광주가 예로부터 ‘예술을 즐기는 사람이 많고, 예술가를 많이 배출한 곳’이라는 뜻으로 ‘예향’이라 불렸다는 사실, 알고 있는가?

무등산의 청정 자연을 품은 의재미술관, 분위기 있는 골목을 따라 이색 카페가 가득한 동리단길,

세상의 모든 힙한 전시로 여행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까지,

예술 애호가라면 광주를 방문할 이유가 넘쳐난다. 예향 광주에서 메말랐던 감수성을 한껏 적셔 보자.

의재미술관은 차로 편하게 갈 수 있는 도심 속 흔한 미술관이 아니다. 무등산 자락 숲속에 꼭꼭 숨어 있어,

등산로 입구에서 약 20분을 걸어야 닿을 수 있다. 다행히 우람한 나무와 시원한 계곡이 반기는 아름다운 숲길이라 걸음이 가볍다.

도시 소음 대신 맑은 바람과 물소리가 가득해, 일상의 무게를 내려놓을 때쯤 의재미술관이 눈앞에 나타난다.

미술관에 들어서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유리창이 무등산 계곡 풍경과 햇살을 그대로 들여온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소박하고 간결한 디자인의 이 건물은 2001년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았으며,

인천국제공항을 제치고 당당히 대상을 차지했다. 무등산의 자연을 미술관 안으로 끌어들여 의재 선생의 작품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설계된 점이 돋보이는데, 이는 미술관을 위한 건축설계가 따로 없던 당시에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의재미술관은 의재 허백련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됐다.

의재 선생은 1922년 열린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에서 최고상을 타면서 화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세속적인 성공보다는 자신의 예술세계를 위해 전국 유람을 떠난다. 그런 뒤 무등산에 들어와 정착했다.

춘설헌에서 그림을 그리며 예술 발전과 후학 양성에 힘을 쏟은 것은 물론 가난한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농업학교를 세웠다.

화가이자 다인, 교육자 그리고 사회운동가로 다재다능한 삶을 살았다.

전시실로 걸음을 옮기면 그의 작품과 유품 그리고 삶의 스토리가 온전히 다가온다.

하얀 벽면에 작품들이 여유롭게 배치되어, 그만큼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된다.

“삶과 예술은 경쟁하지 않는다”라는 그의 명언 앞에 걸음이 절로 멈춘다.

홍익인간을 쓴 서예 작품에서는 따뜻하면서도 힘 있는 필체가 느껴지고, 남도의 농촌 풍경을 담은 작품은 보기만 해도 풍요롭다.

활짝 웃음을 터트리는 선생의 대형 사진을 지나면 병풍과 산수화가 전시된 3전시실이 나온다.

그의 손때 묻은 붓과 다구들을 감상하며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모란육폭병풍이 기다린다.

모란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의 한 부분을 여섯 폭 병풍에 그린 그의 대표작이다. 의재 선생이 생전에 집안에서 사용하던 애장품이다.

남종화의 대가였던 그는 산수화를 즐겨 그렸다. 그가 말하길, 산수화는 우주를 담는 일이라 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자연을 배경으로 사람들의 삶이 어우러지며, 그의 인생과 철학이 깊이 녹아 있다.

지하에서는 의재 선생의 손자인 직헌 허달재 화백의 작품도 볼 수 있다.

관람을 마치고 춘설차를 즐겨보자. 통창 앞에 무등산 자연과 마주 앉아서 마시는 춘설차는 더없이 향기롭다.

차 세트 입장료를 내면 단돈 5,000원에 관람과 함께 춘설차, 춘설빵을 즐길 수 있다.

의재 선생이 이름 붙인 춘설차는 그윽한 맛과 향이 일품이다. 춘설차 가루를 넣어 만든 춘설빵도 은은한 차향을 머금었다.

고개와 능선 따라 펼쳐지는 하얀 군무 무등산 억새

고개와 능선 따라 펼쳐지는 하얀 군무 무등산 억새

고개와 능선 따라 펼쳐지는 하얀 군무 무등산 억새

부산의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곳 산복도로

무등산은 빛고을 광주를 품은 ‘어머니의 산’이다.

가을이면 어머니 가슴처럼 따사로운 능선에 억새가 핀다.

무등(無等)에는 ‘비할 데 없이 높고 큰 산’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라는 의미가 담겼다.

해발 1187m로 규모보다 풍기는 느낌에서 ‘무등’의 가치가 빛난다.

인구 100만이 넘는 도시를 껴안은 산 가운데 높이 1000m대는 무등산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등산은 2013년 국립공원 21호로 지정되었다.

가을 무등산 산행은 억새 덕분에 발걸음이 들뜬다. 10월에 접어들면 정상 주변으로 억새가 하얗게 피어난다.

긴 숲길을 무념무상 걸으며 피로감이 덜한 것도 불현듯 억새와 마주할 광경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무등산 억새 산행은 오르는 길, 고개, 능선에 따라 다채롭다.

가장 일반적인 출발 포인트는 두 곳. 증심사 지구에서 출발해 중머리재와 장불재를 거쳐 정상에 오르는 코스,

원효사 지구 원효분소에서 출발해 서석대에 오른 뒤 장불재를 돌아오는 코스다.

증심사 지구 중머리재 코스는 산행 초입에 사찰, 미술관 등 볼거리가 곁들여져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다.

산 중턱인 중머리재를 넘어서면서 크고 작은 억새 숲이 길동무가 된다.

원효분소 입구에서 서석대까지 하늘을 가리는 울창한 숲과 무등산옛길이 호젓하게 이어진다.

원효사 지구 코스에서는 우회하는 꼬막재 방향을 선택하거나, 사양능선을 넘나들며 여유롭게 억새를 감상할 수도 있다.

무등산 산행은 원점 회귀보다 올라가고 내려오는 길을 달리하는 게 진면목을 즐기는 요령이다.

증심교에서 출발해 문빈정사, 증심사를 거쳐 중머리재로 향하면 첫 쉼터인 당산나무까지 평이한 길이다.

당산나무는 수령 450년, 둘레 4.8m 아름드리 느티나무다.

당산나무에서 계곡 숲길과 돌계단을 거쳐 한 시간 정도 오르면 시야가 탁 트이는 너른 공간과 마주한다.

억새 산행의 서막을 알리는 중머리재다. 해발 617m 중머리재만 올라도 억새 너머로 작은 능선이 아득하게 펼쳐진다.

중머리재에서 장불재까지 본격적인 억새 산행이 이어진다.

용추삼거리에서 중봉으로 방향을 잡아도 억새가 흐드러지고, 갈 길을 고집해 장불재에 오른 뒤 큰 숨을 쉬어도 좋다.

장불재는 정상 등반의 마지막 쉼터이자, 무등산 억새 향연의 대표적인 아지트다.

장불재에서 백마능선으로 길을 잡으면 완만한 곡선을 따라 억새 숲을 가로지른다.

하늘거리는 억새 꽃이 백마 갈기처럼 보인다고 해서 백마능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억새는 위치와 시간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해를 등지고 올려다보는 억새는 짙은 갈색을 띠고,

정상에서 해를 마주하는 억새는 은빛으로 부서진다. 석양의 억새는 황금빛으로 물들며 가을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장불재에서 억새밭 너머로 바라보는 정상 주상절리대는 무등산을 대표하는 풍경이다.

입석대, 서석대 등 높이 1000m 주상절리대는 무등산의 지질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천연기념물 465호다.

주상절리대는 흐린 날이면 구름에 휩싸여 그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부산의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곳 산복도로

부산의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곳 산복도로

부산의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곳 산복도로

아이디어 톡톡 튀는 서울 시내 이색 카페

부산의 독특함을 만나고 싶다면 산복도로에 가야 한다.

산복도로에서 내려다보는 시원한 풍광도 좋지만, 그곳에 부산의 어제와 오늘이 있기 때문이다.

산복(山腹)은 산허리를 뜻하며, 산복도로는 경사지를 개발하면서 맨 위쪽에 자리한 도로다.

부산은 평지가 좁고 산이 많아 땅이 부족했다. 일제강점기에 일자리를 찾아 전국에서 온 사람들이 살 곳이 마땅치 않아 산으로 올라갔다.

산에는 무허가 판자촌이 하나둘 생겼다. 한국전쟁 때는 피란민이 봇짐을 지고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광복 당시 28만 명이던 부산 인구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100만 명이 훌쩍 넘었다. 그렇지 않아도 비좁은 산비탈이 판잣집으로 뒤덮였다.

사람들은 산에 움막을 짓고, 깡통을 펴 지붕을 올렸다. 힘겨운 시절이었다.

아이들은 몸집만 한 물통을 이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물을 길렀고, 마을 사람들은 공동 화장실을 사용했다.

팍팍한 삶이지만, 산동네는 피란민에게 안식처이자 희망의 터전이었다.

산동네에도 길이 필요했다. 1964년 10월 산동네를 연결하는 첫 산복도로가 열렸다.

중구 대청동 메리놀병원 앞에서 동구 초량동 입구까지 1820m 구간에 걸친 망양로다.

이후 구봉산과 천마산을 비롯해, 부산 곳곳에 산복도로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부산은 ‘산복도로의 도시’가 되었다.

최근 산복도로 재생 사업을 통해 부산의 애틋한 역사를 품은 산복도로가 새롭게 조명된다.

산비탈에 숨은 이야기를 만나고,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부산의 보석 같은 경치를 볼 수 있도록 구석구석 정비했다.

먼저 망양로(望洋路)에 가보자. 이름처럼 부산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길로, 발길 멈추는 곳이 모두 전망대다.

황홀한 풍광에 걸음이 저절로 느려진다. 망양로의 랜드마크는 ‘유치환우체통’이다.

파란 바다와 대결이라도 하듯, 빨간 우체통이 바다를 등지고 섰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하는 시 <행복>이 머릿속에서 흐른다.

유치환우체통은 부산과 인연이 깊은 유치환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으로, 편지를 넣으면 1년 뒤에 배달된다.

유치환우체통에서 민주공원 방향으로 걷다 보면 ‘이바구공작소’를 만난다.

이바구는 ‘이야기’의 경상도 사투리. 이곳에서는 풍경만으로 알기 힘든 산복도로의 속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산복도로 사람들이 펼쳐놓은 <요강 이바구뎐>을 비롯해, 산복도로의 풍경을 펜으로 그린 작품이 전시된다.

이바구공작소 근처에는 국내 의료보험의 시초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만든 장기려 박사를 기념하는 ‘더나눔’ 센터가 있다. 돈이 없는 환자에게

‘닭 두 마리 값을 내주시오’라는 처방전을 썼다는 장기려 박사의 일화를 비롯해 가슴 뜨겁게 하는 이야기가 고스란히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