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전 다산의

200년 전 다산의 마음이 통하는 路 예서 철학을 묻다

200년 전 다산의 마음이 통하는 路 예서 철학을 묻다

200년 전 다산의 마음이 통하는 路 예서 철학을 묻다

절절 끓는 구들방에 등 지지는 이 맛 영암 월인당

갈수록 정치는 낡고, 경제는 어렵다. 위정이 아닌 위민의 마음을 가진 사람과 차 한 잔 마시고 싶다면

남도답사 1번지 강진으로 가보자. 강진에는 200여 년 전 오직 백성을 위한 충정으로 평생을 살았던 천재학자 다산 정약용의 아우라가 가득하다.

“이런 곳이라면 나도 몇 달 만 유배당했으면 좋겠네.”

동백나무가 늘어서 붉은 꽃을 피우는 오솔길을 지나 다산초당 천일각에 서서 호수 같은 강진만을 마주하자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과연 하늘같은 임에게서 버림받고 ‘땅 또는 바다의 끝’으로 유배당한 자들의 삶은 어떠했을지 궁금해진다.

지난날의 영화를 잊지 못한 채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술과 가무로 지내다 끝내 쓸쓸한 생을 마감한 이도 있었겠고,

성총회복(聖寵回復)이 있었으나 더 이상 권좌에 욕심을 내지 않고,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며 마지막까지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어찌하면 더욱 풍요롭게 해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뇌로 평생을 바친 자도 있었을 터.

감히 짐작건대, 망망대해 고독한 귀양지에서 떠나온 임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

그리고 분노는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었던 지극히 진실 된 감정이리라.

그래서일까. 비극의 상황에서도 절망치 않고 수많은 저술로 자신을 멋스럽게 승화시킨 유배자들의 열정은 더욱 빛을 발한다.

다산(茶山), 불후의 저작을 남기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 그도 빛나는 열정을 가진 이 중에 하나였다.

학문을 사랑했던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18년 동안 고락을 함께 하였으나 순조가 즉위하자마자 당쟁에 휘말리면서 난신적자(亂臣賊子)로 몰려

경북 장기를 거쳐 강진으로 유배당하였던 다산.

나고 자란 고향은 아니지만 18년의 귀양살이 중 약 10여년을 여기서 보냈기에, 정신적 고향이라 일컬어지는 강진 곳곳에는 그의 흔적들이 산재해있다.

봄이 되면 성숙한 여인의 붉은 순정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동백이 발 길 멈출 곳 없는 나그네 마음에 불을

지피는 백련사의 부도밭 주변의 정취(다산과의 교류가 있었던 혜장선사가 있었던 절)와 다산이 8년 동안 거주하면서 ‘목민심서’,

‘경세지표’ 등의 불후의 저작들을 만들어내었던 다산초당, 그리고 혜장선사와 다산이 함께 오르며 생각을 정리하고,

삶의 의미를 사색하던 오솔길까지… 잠시 여유를 갖고 찬찬히 다산의 흔적을 더듬어보자.

“차를 마시는 백성은 흥하고, 술을 즐겨 마시는 백성은 멸한다.”

다산(茶山)이라는 호에서 알 수 있듯 다산 정약용은 차와 관계가 깊다.

차와의 인연 또한 백련사의 주지스님이었던 혜장선사와의 만남에서 시작된 것이다.

다산이 혜장선사를 처음 만난 것은 강진으로 유배 온 이듬해.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마땅히 교류할 사람을 찾지 못했던

다산은 백련사에 갔다가 혜장선사와 조우하게 된다. 그 당시 혜장선사는 추사 김정희의 스승인 옹방강이

‘해동의 두보’라고 칭송할 만큼 뛰어난 스님이었고, 불가의 학승이면서도 유교의 경전에 관심이 깊었다.

이런 혜장선사는 다산 정약용에게 용돈도 주고, 귀한 차도 가끔 내려주기도 하였다 한다.

그러다가 다산이 다산초당에 기거, 만덕산 고갯길을 넘는 오솔길을 넘나들면서 본격적으로 교류하게 됐다.

그리고는 차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함께 차를 마시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다산의 다도애(茶道愛)는 더욱 깊어지기 시작했고, 혜장의 유교지식 또한 넓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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