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다완의 명맥을 잇고

한국 다완의 명맥을 잇고 대중화에 힘쓰는 김선식 명사

한국 다완의 명맥을 잇고 대중화에 힘쓰는 김선식 명사

한국 다완의 명맥을 잇고 대중화에 힘쓰는 김선식 명사

원주 가을기운 만끽하는 주말여행 코스

무려 8대째다. 문경 출신의 김선식 사기장은 7대인 아버지 ‘이천 김복만 사기장’에게서 도자기를 전수 받아 30년 넘게 흙을 만지고 있다.

1730년생인 1대 김취정이 영조시대 사기장으로 발물레를 돌렸으니 300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도자기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조선의 질 좋은 백토를 찾아 충북 단양, 경북 상주로 가마를 옮겼고,

3대 김영수 사기장이 19세기 초 문경읍 관음리 가마터에 정착한 것이 관음요의 출발이다.

8대 김선식 사기장까지 총 5대에 걸친 역사이자 우리나라 도자기가 걸어 온 길이다.

“우리나라 백토가 좋습니다. 중국 광맥의 좋은 토질이 우리나라까지 이어져요.

반대로 일본에서는 땅을 파면 화산재만 나올 겁니다.

경기도 이천은 대충 파도 좋은 백토가 나오니 도자기가 많이 만들어졌고, 자연스레 유약 기술이 발달했죠.”

김선식 사기장의 말처럼 우리나라에는 소백산 줄기의 사토 광맥을 중심으로 많은 가마터가 있다.

문경은 신라시대 초기부터 경주, 안동에서 백제와 고구려를 잇는 지리적 거점인데다가

도자기를 구울 수 있는 땔감이 풍부하고 물이 맑아 일찍이 도자기가 많이 생산되었다.

머슴도 사기그릇을 쓸 정도였죠. 도자기가 나오는 날이면 잡상인이 못 들어오도록 가마터 앞에 금줄을 쳤습니다.

할아버지가 관음리 일대에 논밭을 다 사들일 만큼 인기가 좋았죠.

기근이 심하던 한국전쟁 전후에는 도자기가 생계의 큰 수단이었습니다.

동네 공통 가마에 불을 때고, 사발이 나오면 사람들이 광주리에 실어 팔았어요.

영새(장작) 지어나르고 무거운 유약을 배달하던 시중꾼도 많았지요. 동네 사람 모두 사기장이었어요.

” 대접, 뻐등사발, 항아리 등 생활 식기로서의 도자기가 가장 대중적이던 시절이다.

한 마디로 가마 하나가 온 동네 사람을 먹여 살렸다.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여름에는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 도자기를 만들어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기름병, 요강, 유병, 타구(가래나 침을 뱉는 도구), 꽃병 등 각종 생활 도자기를 장작가마로 만들었어요.

그런 지속적 노력덕분에 현재까지 3대가 함께 사기장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저를 포함해 둘째 할아버지가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인정 받았고 현재 다음 세대까지 사기장의 길을 수련하고 있습니다.”

9대의 가업을 이을 김선식 명사의 아들 김민찬 군까지 가족 모두가 사기장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김선식 사기장을 만나는 날 때마침 ‘문경 찻사발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문경새재 도립공원에 찻사발을 만드는 요장 35곳이 한자리에 모였다.

코로나 이후 다시 개최된 2022년 축제에 문경의 대표 사기장을 비롯해 많은 방문객이 상기된 표정으로 오랜만의 잔치를 만끽하는 풍경이다.

1999년부터 매년 열리는 대표 도자기 축제이지만 왜 ‘찻사발’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

사실 조선 찻사발이 유명해지게 된 건 초기 일본 다인들이 찻사발을 말차 전용 그릇으로 사용하면서부터다.

중국의 차 문화가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에 전해지면서 일본의 ‘다도’ 의례가 꽃을 피웠고,

‘이도다완’이라 부르는 조선 찻사발은 일본 다도가 지향하는 차의 정신과 실용미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전후로 많은 조선 도공이 일본으로 납치되고, 그들이 일본 근대 도자기 혁명을 이끈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조선 도공이 사라지면서 오히려 우리나라에는 다완의 명맥이 끊기게 된다.

국내에 찻사발이 알려지기 시작한 건 그보다 한참 후인 ‘86서울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이 열렸을 때다.

당시 ‘한국차 마시기 운동’ 캠페인이 있었고, 관광 민예품으로 찻사발을 만들면서 조금씩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2021년에는 스위스 베른시립미술관에서 조선 찻사발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일본이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할 때 전해진 것으로 추측할 뿐 정확한 경로가 알려진 바는 없다.

그만큼 조선 찻사발의 가치와 그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는 것과 같다.

17세기 중반까지 조선의 사발로 만들어지다가 사라진 그릇을 20세기에 활발하게 재현하고,

체험과 축제를 통해 대중화하려는 노력이 중요한 이유다.

신북천의 아름다운 물소리가 들리는 문경 갈평리에 미산 김선식 사기장의 요장이 있다.

25년 전 초기 가마터가 있던 관음리에서 늠름한 소나무가 드리워진 이곳으로 요장을 옮겼다.

진짜 가마 불을 때는 요장인지 장작나무를 보면 알 수 있다. 예열용 막나무와 10년 이상 건조한 적송이 질서 있게 구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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