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지문 한밤마을 돌담길 걷다
천년의 지문 한밤마을 돌담길 걷다
이런 산골에 어떻게 사람이 모여 마을을 형성했을까.
궁금증은 지도에서 쉽게 풀렸다. 주변 지리를 살피면, 한밤마을이 유일한 분지로 그 주위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다.
또 팔공산의 여러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한밤마을을 휘감아 흐르니 배산임수에 적합하며 분지의 규모도 비교적 넓어, 사람이 머물기 시작한 때는 오래 전이었으리라.
꼬불꼬불한 한티재를 넘어 북쪽으로 향하면 사과밭, 계단논, 내천 등 시골풍경이 파노라마로 이어진다.
그리고 한 마을을 관통하는 구간을 만난다. ‘이곳이 한밤마을이구나’ 차곡차곡 쌓인 돌담으로 하여금 도착했음과 동시에 마음 설레게 하는 풍경을 기대하게 된다.
실제로 주위를 살피니 지도 상에서 본 것보다 분지 규모가 상당히 크다.
한밤마을 규모 또한 평소 접하던 마을보다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주위에 병풍처럼 나란히 솟은 산 천년의 지문 덕분에 분위기 또한 남다르다.
마치 화산의 분화구에 서 있는 것 같다. 숨을 크게 한번 들이키고 내뱉어본다.
도시 빌딩 숲에서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히 뚫린다. 귀에 맴돌던 소음과 눈앞의 분주함은 온데간데없다. 이래서 시골은 일단 좋다.
한티로와 한밤마을이 만나는 곳에 ‘대율리 대청’ ‘상매댁’ 표지판이 세워졌다.
눈에 띄는 것부터 둘러보자. 처음 온 곳이지만, 걸음이 편안하고 마음은 어느 때보다 안락하다.
오감 중 어느 하나 자극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없으니, 이게 ‘평온함’이구나 싶다.
주위 풍경이 담백하달까. 질리지 않는 매력이 잔잔하게 목격된다.
“털 털 털” 경운기 엔진 소리가 위협감 없이 울리며 골목을 빠져나간다.
다 쓴 연탄을 싣고 어디론가 향하는 경운기에서 한밤마을 모습 중 하나를 담는다.
길 양옆으로 세워진 돌담은 불규칙한 배열로 쌓였지만, 불안하거나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편안한 시골풍경을 자연스럽게 받쳐준다. 이러한 진풍경의 중심 ‘한밤마을 돌담길’에 들어섰다.
먼저 한밤마을과 팔공산의 관계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다. 팔공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산맥은 상당히 험준하다.
그만큼 협곡도 깊고 거칠다. 그 협곡들 가운데 팔공산의 북서방향이 한밤마을과 이어진다.
팔공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한밤마을로 내려오는 길을 떠올리면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처럼 팔공산~협곡~분지로 이어지는 길목이 한밤마을에 있는 돌의 이동 경로다.
그렇다면, 그 돌은 어떻게 생겨난 걸까.
태고부터 오랜 기간 잦은 홍수를 겪으며 팔공산의 바위와 돌이 깎이고 쪼개지고, 흙은 쓸려 내려가면서 돌이 분지에 쌓였다고 전해진다.
이런 과정이 반복된 후, 한밤마을에 사람이 모여 삶의 터전을 일궜을 터. 자연스레 돌을 사용한 담장을 세우게 된 것이다.
요즘에는 보기 드문 돌담 중 그 원형이 잘 보전된 곳으로 유명하지만, 과거에는 미학적 관점보다 쓸모없는 돌덩어리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 컸을 것이다.
따라서 집과 집 사이의 경계에 돌을 쓰고, 경작지를 가르는 경계에도 돌을 썼다.
한밤마을의 돌담은 하나하나가 예부터 숱하게 손을 탄 애물단지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 돌담은 보안, 안전 등 이 개념에 충실하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넘어갈 수 있는 높이일뿐더러, 담장 너머로 이웃집 속이 적날하게 보이는 수준이다.
도시에서 볼 수 있는 담장과는 별개의 의미가 있는 것.
담장을 쌓으면서도 자연을 포용하는 자세를 찾아볼 수 있는데, 담장을 놓아야 하는 곳에 나무가 있다면 나무도 담장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구성했다.
이런 자연스러움은 인간의 집까지 이어진다. 한옥이 돌담과 이렇게 잘 어울렸나.
궁궐에서 보아온 담장과 한옥의 조화도 뛰어나지만, 한밤마을에서 볼 수 있는 조화 또한 인상적이다. 조금은 딱딱해 보이거나
권위적으로 보일 수 있는 기와집 한옥이 둔덕이 쌓인 돌담과 어울리니, 친근함까지 갖춘 균형의 한 집으로 인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에서 살 수 있다면, 도시의 편리함을 쉽게 등질 수 있을 듯싶다.
누구나 꿈꿔 본 한옥 살림, 그 이상적 생활에 잘 어울리는 집이다. 주위 병풍을 친 산과 어울리니 멋진 풍경 또한 매력이다.
이 같은 한옥의 멋과 감동을 넉넉히 살필 수 있는 곳이 있다. ‘상매댁’이다.
남천고택이라고도 불리는 ‘상매댁’은 한밤마을의 한옥 중에서 큰 규모와 오래된 역사로 손꼽히는 가옥이다.
자료에 따르면 조선 현종 2년(1836)에 지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원래 가옥의 형태는 ‘興’자형의 독특한 배치를 이뤘으나 해방을 거치면서 현재의 건물만 남고 대문이 옮겨지면서 방향이 바뀌었다.
‘Π’자형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됐으며 외곽으로 자연석을 사용한 정자, 대나무 숲 등이 한옥미를 배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