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선비들이 극찬한 그곳 서울 수성동계곡
조선의 선비들이 극찬한 그곳 서울 수성동계곡
조선의 선비들은 어디에서 무더위를 이겨냈을까. 한양도성 안쪽에 그 답이 있다.
인왕산에서 발원해 세종마을(서촌)을 지나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옥류동천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다. 서울 시내를 현대적으로 개발하며 하천을 지하에 두고 아스팔트로 덮었기 때문이다.
상류의 계곡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다.
인왕산 수성동계곡(서울기념물)은 왕족과 사대부 등 양반이 자주 찾았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뒤로는 인왕산이, 앞으로는 저택과 경복궁이 펼쳐지는 명승지였다.
조선의 대표 화가 겸재 정선이 《장동팔경첩》에 ‘수성동’을 남겼을 정도다. 어디 그뿐일까.
19세기 학자 유본예가 한양의 관청과 궁궐, 명승지를 한데 묶어 소개한 《한경지략》이나, 작가 불명의 지리서 《동국여지비고》 등에도 수성동계곡이 경치가 빼어난 곳이라며 극찬했다.
선비들은 휴식을 취하거나 지인과 담소를 나눌 때, 혹은 책을 읽기 위해 수성동계곡을 찾았다.
그들은 계곡물 소리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도 비 내리는 날 수성동계곡의 물소리를 듣고 시를 썼다.
수성동(水聲洞)이라는 이름 또한 ‘물소리가 유명한 계곡’이라는 뜻이다.
현재는 건천으로 평소에 물이 흐르지 않는데, 많은 비가 내린 뒤에는 수성동계곡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수십 년 전, 수성동계곡이 영영 사라질 뻔했다. 1971년에 계곡 좌우로 옥인시범아파트 9개 동이 들어섰다.
당시에 필요한 개발이었지만, 수성동계곡의 경치는 아파트에 가리고 말았다.
다행히 40여 년이 지난 2012년, 낡은 옥인시범아파트를 철거하고 수성동계곡 복원 사업을 진행해 지금의 풍경으로 돌아왔다.
수성동계곡을 복원할 때 참고한 자료 중 하나가 정선의 ‘수성동’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그림에 있는 돌다리(기린교)가 아파트 철거 과정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종전의 공원화 계획을 철회하고, 수성동계곡 복원 사업을 진행했다. 수성동계곡이 문화재로 지정될 때도 기린교의 존재가 큰 역할을 했다.
필운대로에서 옥인길을 따라 쭉 걸어 들어가면 수성동계곡을 만난다.
한양도성 인왕 구간을 걷는 중이라면 인왕산공원으로 내려와도 계곡 위쪽에 닿는다.
복원된 수성동계곡은 약 190m로 길지 않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수성동계곡은 지역 문화재로 관리한다.
앞서 언급한 기린교를 비롯해 안평대군이 살던 집으로 추정되는 비해당 터 등이 계곡 내에 자리한다.
기린교는 길이 3.8m 장대석 두 개를 붙여 만들었다. 한양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 보존된 것이며, 통돌로 만든 가장 긴 다리다.
기린교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수성동계곡 복원 사업도 요원했을 테니, 그 중요성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아쉽게도 물놀이하기 쉬운 곳은 아니다. 발을 겨우 적실 만큼 수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괜찮다.
너른 바위에 자리를 펴고 앉아 푹 쉬었다 갈 수 있으니까. 수성동계곡 바위에서 시를 읊고 노래 부르던 선조들처럼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겨보자.
수성동계곡은 주변 풍경만으로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계곡 양옆의 산책로를 따라 걸어보자.
수종이 다양한 식물이 작은 숲을 이룬다. 이왕이면 인왕산자락길까지 둘러보자.
청운공원부터 수성동계곡, 사직근린공원으로 이어지는 2.5km 무장애 탐방로가 조성됐다.
인왕산자락길 중간 지점에 있는 전망대에서 서울의 전망을 감상하는 것도 추천한다.
수성동계곡 인근에 볼거리가 많다. 대표적인 곳이 인왕산과 경복궁 사이에 형성된 세종마을이다.
북촌과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에 왕족, 사대부, 중인이 거주하던 지역이다.
1920년대쯤부터 몰락한 사대부의 저택이 철거된 자리에 ‘ㅁ 자형’ 도시 한옥이 대규모로 들어섰는데, 그 모습이 지금도 남아 있다. 도시 한옥은 여전히 주민의 삶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