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걸어가니 가만가만 가을이 다가옵니다
자박자박 걸어가니 가만가만 가을이 다가옵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는 명을 가까이 하고 후금을 멀리하였다.
국력을 키운 후금은 나라의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것이 1636년 일어난 ‘병자호란’이다.
막강한 청나라 군대는 빠르게 한성으로 진격하였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47일 동안 대항하던 인조는 결국 청에 항복하였다.
이후 조선과 청은 신하와 임금의 관계를 맺었고 조선의 백성들은 임진왜란 이후 또다시 크나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남한산성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등산로로 이용하고 있지만, 과거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은 가슴 아픈 곳이다.
“아빠, 남문으로 갈 거야? 그럼, 나 먼저 간다아아~”
여덟 살 꼬마의 발에 스펀지라도 달린 걸까.
바닥이 꼬마를 밀어 올리듯 가볍게 남한산성 계단을 밟아 나간다.
아빠보다 몇 십 미터를 앞서 걷다 뒤돌아보며 산성을 감상하는 여유도 지녔다.
한두 번 남한산성을 오른 솜씨가 아니다.
중년의 신사에게서 느껴지는 여유와는 또 다른 맛이 있다.
삶이 곧 경쟁인 현대사회에 남한산성을 자박자박 걷는 꼬마에게서 여유를 배운다.
과자들 틈에 별사탕을 발견하는 마냥, 가을을 걸으니 인생의 단맛이 다가온다.
73칸의 행궁과 80개의 우물이 있던 자리, 남한산성 가을 산행에는 성남시를 경유하는 남문코스가 제격
“…치솟은 능선을 따라가는 성벽이 밤하늘에 닿아 있었고, 모든 별들이 성벽 안으로 모여서 오목한 성은 별을 담은 그릇처럼 보였다…”
작가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일부다 .실제 남한산성의 모습은 굽이친 능선에 은테를 두른 듯 하다.
‘별을 담은 그릇처럼 보인다’는 묘사 또한 실제와 같다.
성의 전체적인 형태가 주변부는 높은데 반해, 중심부가 낮고 평평한 평지를 이루고 있는 점을 보면 그렇다.
수비는 쉽게, 성내의 생활은 편하게 해 산성역할에 적합한 지형이었던 셈.
남한산성은 서울 외곽을 지키는 4대 요새 중 동쪽을 맡은 요새였다.
조선시대 산성의 모습을 가장 완벽히 보존하고 있다.
하지만, 남한산성을 얘기할 때면 으레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애초 신라 문무왕 12년에 토성으로 축성 되었던 이력 때문이다.
석성으로 개축한 것은 조선 광해군 12년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한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역사적, 문학적 배경을 차치하고서라도 남한산성은 충분히 아름답고 장엄하다.
일찍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으로 향하는 문과 73칸의 행궁, 80개의 우물, 45개의 샘이 있고, 광주읍의 행정처도 산성 안으로 옮겼다고 기록돼 있다.
산성의 규모와 산성 내의 공간이 가늠키 힘들만큼 크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얼마 되지 않는다.
동, 남문과 서장대, 현절사, 문무관, 장경사, 지수당, 영월정, 침괘정, 이서 장군사당, 숭렬전, 보, 루, 돈대 등이 남아 있다.
그 중 성곽의 모습을 잘 살필 수 있는 곳은 4대문과 수어장대, 서문 중간의 일부 성곽 정도다.
가을 정취를 느끼며 성곽을 걷는 길은 크게 세개 정도로 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