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불교의 명맥을 이어온 도시
여주 불교의 명맥을 이어온 도시
조선 시대 중엽의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였던 청담 이중환은 그의 저서인 택리지에서
“남한강이 젖줄처럼 흐르고 있는 여주는 일찍이 대동강변의 평양, 소양강변의 춘천과 더불어 나라 안에서 가장 살기 좋은 강촌으로 손꼽힌다.”
라고 표현했다. 많은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주의 강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고 쌀과 도자기와 땅콩을 특산물로 자랑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멋스러운 고장” 여주에 대한 옛 학자의 표현이 결코 빈말은 아닌 듯하다.
여주하면 곧바로 신륵사가 머리에 떠오른다. 주로 산속에 있는 여느 사찰과는 달리 물가에 자리 잡고 있어서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는 사찰이다.
남한강변 봉미산 자락의 고즈넉한 숲속에 있는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조선 성종 때에는 영릉의 원찰이 되어서 왕실의 지원을 받기도 했는데, 강변의 절벽 위에 벽돌로 쌓은 탑이 있다 해서 “벽절” 이라 불리기도 했다.
벽돌로 쌓은 이 다층전탑(多層塼塔)은 완성된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전탑으로 유명하다.
신륵사 조사당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그의 스승 무학대사와 인도 스님인 지공대사, 그리고 고려 말의 고승인 나옹선사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조사당 안에는 세 대사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고 앞 마당에는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 오래된 향나무가 있다.
조사당 뒤편의 돌계단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독특한 형태의 부도를 하나 만나게 된다.
고려 우왕 때인 1379년에 만들어진 나옹선사의 석종형 부도인데 옆에 있는 석종비 뒷면에 새겨진 진당시는 목은 이색의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여주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명소인 영릉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세종대왕과 왕비 소헌왕후가 합장되어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의 왕릉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데 정문 근처에 있는 세종관에서는 덕망 있고
인자한 모습으로 그려진 세종대왕의 어진도를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운보 김기창 선생의 작품이기도 하다.
여주읍 능현리에는 일제에 의해 “민비” 라 불리던 명성황후의 생가가 자리 잡고 있다.
고종의 첫 부인이면서 순종의 어머니인 명성황후가 열여섯 살 되던 해까지 살던 집이다.
오랫동안 일반 민가로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완전히 복원작업이 끝나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생가 근처에는 명성황후 기념관이 있으며 생가 앞에는 “명성황후탄강구리” 라는 고종의 친필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영월루는 말 그대로 “달맞이하기에 좋은” 아주 고풍스런 누각으로 남한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마암 절벽 위에 다소곳이 자리 잡고 있다.
본래 이 누각은 여주군청 청사의 정문으로 이용되었던 것인데 지난 1925년에 지금의 자리에다 옮기고 ” 영월루 ” 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누각에 오르면 확 트인 강줄기뿐만 아니라 멀리 봉미산 자락에 살짝 걸려 있는 신륵사가 아스라이 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