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말을 걸어왔다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얼굴이 말을 걸어왔다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의 할머니들은 아무 말이 없다.
얼굴로 지난한 세월을 이야기한다. 그림 속 할머니들은 깊게 팬 주름에 서러운 이야기가 겹겹이 쌓여 있다.
박물관 얼굴에는 1000여 개의 얼굴이 복닥거린다.
어떤 얼굴은 뭔가를 염원하는 듯하고, 어떤 얼굴은 기나긴 세월을 지나며 감정의 무용함을 깨달은 듯하다.
시간이라는 씨줄과 이야기라는 날줄로 직조된 얼굴들.
무수한 얼굴이 전하는 말을 들으러 경기도 광주를 찾는다.
1930년대 솜털이 하얗던 소녀들은 2019년, 백발성성한 할머니가 됐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생긴 지 80여 년이다.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 할머니 238명 중 생존한 할머니는 22명뿐.
이들의 평균 나이는 90대에 접어들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할머니들을 좀 더 잘 기억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반가운 소식이 있다.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이 새로 증축된 것이다.
“우리가 강요에 못 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 두어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 말에 힘입어 1998년 처음 문을 열었다.
그 후로 20년에 접어드는 2017년 말, 유품전시관과 추모기록관(이하 추모관)이 세워졌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소녀상 ‘못다 핀 꽃’과 할머니들 흉상이 있는 입구를 지나 나눔의 집 뒤편으로 향하면 추모관이다.
옅은 회벽에 기와를 얹은 2층 건물이다.
추모관 1층 전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기획전시관에는 할머니들 초상화가, 유품전시관에는 할머니들 유품이, 그림전시관에는 할머니들이 직접 그린 그림 20여 점이 전시돼 있다.
벽 양옆에 가로세로 1m가 넘는 그림 10점이 나란하다. 공연예술가 팝핀현준이 그린 할머니들 그림이다.
그는 말했다. “할머니들 얼굴이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또 그렸다”고. 할머니마다 표정도 분위기도 제각각이다.
백발의 박옥련 할머니는 입을 한 일자로 굳게 다물었고, 배춘희 할머니는 생긋 미소 지을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김군자 할머니는 금방이라도 “밥은 먹었우?” 하고 말을 걸어올 듯 장난기 어린 눈빛이다.
할머니들은 입을 열어 자신을 설명하는 대신, 선과 색이 빚은 표정으로 한 많은 인생을 내비친다.
소녀의 피눈물은 말라붙어 할머니의 주름이 됐다. 화폭 속 할머니들은 끝내 일본의 공식 사죄를 받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가까운 일은 기억 못해도 옛일은 왜 이리 생생한지 모르겠다.”
김순덕 할머니의 말씀이다. 유품전시관에는 할머니 열일곱 분의 인생 이력과 사진, 생전에 쓰던 물건이 있다.
‘한 맺힌 삶을 살다.’ 전시관 소개 글에 딸린 제목이다. 즐거운 일보다는 한스러운 일이, 기억하고픈 일보다는 잊고 싶은 일이 많은 인생이었다.
“끌려간 친구들은 다 죽고, 나 혼자만 살아 돌아왔어.”
11살,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중 가장 어린 나이. 김외한 할머니는 일본 홋카이도에서 혼자 돌아왔다.
김옥주 할머니는 일자리가 있다는 일본인 집주인의 말에 속았다. 도착한 곳은 중국 하이난섬 위안소였다. 단 몇 줄로 축약하기에는 사연 하나하나가 길고 길다.
생전 쓰시던 물건들은 어찌나 소박한지. 돋보기, 화투, 한글 교본, 고국으로 넘어올 때 손에 ‘단디’ 쥐었을 여권….
울컥했다 화가 났다 아릿했다 분주한 마음을 달래가며 보느라 걸음이 느려진다.
그림전시관에는 잔잔한 음악이 깔린다. 서촌 골목길, 작은 갤러리에 들어온 듯하다.
할머니들은 1993년부터 그림 수업을 받았다. 처음에는 주변 사물을 따라 그리는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비통한 지난날을 표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