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성주사지 허물어진 절터에서 온기를 느끼다
보령 성주사지 허물어진 절터에서 온기를 느끼다
옛 절터는 따사롭다. 봄으로 가는 길목, 잔설이 있어도 생채기 난 돌탑 위로 어느새 훈풍이 스친다.
보령 성주사지는 크고 유서 깊은 절터다. 성주산 자락에 둥지 틀 듯 자리한 폐사지에는 지난한 세월이 담겨 있다.
사적 307호 성주사지에는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흔적이 골고루 묻어난다.
국보 1점과 보물 3점을 비롯해 땅 안팎의 귀한 유물이 허물어진 절터를 의연하게 지키고 있다.
거친 돌덩이로 에워싼 절터의 외형만 봐도 번창했을 당시 규모가 짐작된다.
성주사의 과거는 백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합사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절은 본래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호국 사찰이었다.
백제가 멸망하고 폐허가 된 사찰은, 800년대 중반 통일신라 선종의 대가인 무염대사(낭혜화상)가 다시 일으킨 것으로 전해진다.
통일신라 말기 유행한 선종은 불경을 깊이 알지 못해도 수양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불교 종파로, 당시 백성 사이에 크게 유행했다.
선종의 큰절이 전국에 9개 세워졌는데(구산선문), 그중 성주산문의 중심지가 성주사다. 성주산문은 구산선문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많은 승려를 배출했다.
성주사 일대에 승려 수천 명이 머물 때는 아침이면 사찰 앞 성주천이 쌀 씻은 물로 하얗게 흘렀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성주사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쇠퇴하다가 17세기 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된 터의 흔적을 살펴보면 중문, 석등, 오층석탑, 금당, 강당의 가람 배치 형상을 띤다.
성주사지에서 가장 도드라진 유적은 낭혜화상탑비(국보 8호)다.
성주산문을 일으킨 무염대사를 기리기 위해 최치원이 왕명에 따라 비문을 지었다.
10세기 초 세워진 거북 받침돌 위 비석에는 무염대사의 일생과 업적, 성주사를 일으키고 선종을 전파한 내용이 낱낱이 적혔다.
비석의 재료로 성주산 일대에서 채취되는 남포오석을 사용해, 글자 하나하나가 큰 훼손 없이 보존되었다.
성주면 일대에서 나는 검은 돌(오석)은 최근에도 귀한 조각상을 만드는 데 이용된다.
폐사지에 들어서면 이방인이 처음 알현하는 유물은 석등과 오층석탑이다.
성주사지 오층석탑(보물 19호)은 이중 기단에 석탑을 세운 형태로, 높이 6m가 넘는다. 석탑은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 양식이 혼재되었다.
절터를 가로질러 봉긋 솟은 금당 터를 지나면 삼층석탑 3기가 병풍처럼 나란히 서 있다.
금당 터 뒤에 석탑이 도열한 모습도 이례적이다. 이금진 문화해설사는 성주사 뒷산의 산세가 약해 석탑이 산의 기운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서 삼층석탑과 중앙 삼층석탑은 각각 보물 47호, 보물 20호로 지정되었으며, 두 탑 모두 통일신라 말기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품격 높은 유물 사이에서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서는 것은 석불입상이다. 석불은 풍화되고 잘려 나가 귀도, 코도 깨진 형상이다.
타원형 얼굴과 양어깨를 덮은 법의에서 소박한 느낌이 전해진다. 석불은 조선 시대 민불로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성주사지를 에워싼 성주산은 보령을 상징하는 명산으로, 깊은 숲과 계곡이 있다.
성주산은 두 계곡을 품고 있는데, 화장골계곡에 성주산자연휴양림이 들어섰다. 편백 숲이 사계절 깊은 휴식을 선사하는 곳이다.
지하 400m 수직갱으로 내려가는 듯한 엘리베이터가 실감 나고, 미니 연탄 만들기 체험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