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국물에 넘쳐

맑은 국물에 넘쳐 나는 남도의 넉넉한 인심

맑은 국물에 넘쳐 나는 남도의 넉넉한 인심

맑은 국물에 넘쳐 나는 남도의 넉넉한 인심

당일치기 부산 여행 송도 가볼 만한 곳

나주시로 가족여행을 간다면 별미기행에 앞서 시내의 나주목문화관부터 들러 역사를 공부해보자.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나주가 발달해온 변천사를 살펴볼 수 있다. 나주는 예로부터 곡창 호남의 상징이며 교통, 군사, 행정의 중심지였다.

조선시대의 이중환은「택리지」에서 나주를 서울(한양)과 닮았다 하여 작은 서울이란 뜻으로 ‘소경(小京)’이라 기록하기도 했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나주에 10여 년 간 머물면서 오씨처녀(장화왕후)를 만나 2대 임금인 혜종이 태어났는데

후에 임금이 태어난 마을이란 뜻으로 ‘흥룡동(興龍洞)’, ‘어향나주(御鄕羅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나주는 고려 성종 2년(983), 전국에 처음으로 12개의 목(牧)을 두었을 때 목이 된 후 조선시대로 넘어와서

1895년 나주관찰부가 설치될 때까지 목사가 천여 년 동안 재임, ‘목사고을’이라 불리기도 한다. 전라도에서는 전주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고을이었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고장이라 음식문화도 발달했다. 나주곰탕, 영산포홍어, 구진포장어가 나주의 3대 별미로 손꼽힌다.

우선 금성관 앞 나주곰탕거리를 찾아가서 나주곰탕에 대한 이야기부터 들어본다.

나주읍성 안의 닷새장을 찾는 장돌뱅이들과

주변 고을에서 장보러 나온 백성들에게 국밥을 팔던 것이 나주곰탕의 시초라고 한다.

흔히 곰탕 국물이 뿌연 것으로 알고 있는 데 나주곰탕은 말갛다.

나주 곰탕의 국물이 다른 지방의 곰탕처럼 뽀얗지 않고 맑은 것은 소의 뼈 대신 양지나 사태 등 고기 위주로 육수를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물이 맑고, 달고, 시원하다. 쇠뼈는 갑자기 많은 손님이 몰려 육수가 다소 부족할 때 비방으로 사용될 뿐이다.

나주목문화관에서 몇 십 미터 떨어진 곳에 금성관이라는 나주객사가 있고 그 앞에 나주곰탕집들이 있다.

60년 전통을 자랑하는 남평할매집에 들어가면 커다란 가마솥에서 하얀 김이 피어나는, 모든 손님에게 시원하게 공개된 주방이 눈길을 끈다.

곰탕이 주문되면 주방장은 미리 밥을 담아놓은 뚝배기를 집어든다.

그 다음 설설 끓는 가마솥에서 국물을 떠서 밥이 담긴 뚝배기를 서너 차례 토렴한다.

곰탕의 제 맛이 바로 이 토렴 과정에 숨어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렴’이란 무슨 뜻인가. 동아새국어사전에는 ‘건진 국수나 식은 밥 따위에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하여

그 국수나 밥을 데우는 일’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잘 삶아진 고기를 토렴한 뚝배기에 넣고, 노란 계란 지단을 올리고, 대파를 한 국자 더 넣으면 국물이 식을 새라 손님상으로 재빨리 가져간다.

반찬이라고 해야 침이 절로 도는 김치와 깍두기가 전부이지만 진하고 고소한 곰탕에 이보다 더 잘 맞는 궁합은 없다.

뜨끈한 국밥 한 숟가락을 떠서 그 위에 빨간 김치나 깍두기 한 점을 얹어 먹으면 느끼한 맛은 전혀 없고 달콤하면서도 구수한 곰탕의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나주곰탕 전문 식당에서는 곰탕 외에 고기가 더 많이 들어간 수육곰탕과 수육도 맛볼 수 있다.

이번에는 나주시가지 남쪽의 영산포로 이동해서 나주의 두 번째 별미인 홍어를 맛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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