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근대사의 중심지 대구
대한민국 근대사의 중심지 대구
대구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중심도시이다.
6학년 1학기 2단원 ‘근대 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과 민족 운동’ 과 관련하여 일제강점기의 살아있는 역사체험여행을 떠나보자.
1900년 초 일제는 한국을 경제적으로 파탄시켜 한국경제를 일제에 예속시키기 위해 강력한 차관정책을 썼다.
1907년 한국이 일제에 진 외채만 1300여만원, 더 이상 외채상환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대구를 중심으로 나라의 빚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일어났다.
이 국채보상운동의 중심도시가 바로 대구다.
대구는 이렇게 한국 근대 역사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해냈으며 지금도 그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대구의 골목 구석구석에 남아있다.
생생했던 당시 함성과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 같은 대구 근대 골목투어의 출발점 동산 청라언덕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선교사 챔니스 주택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에는 근대 시대를 살다간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주택이 그대로 보존되어 지금은 의료, 선교박물관으로 일반인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선교사 챔니스 주택은 당시 서양식 건축물의 낭만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일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우리의 근대문화유산이다.
동산의료원 옆 제일교회와 선교사 주택 사이로 난 90여개의 계단이 바로 3.1 만세운동길이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계단이지만 1919년 우리나라에서 일제의 무단통치에 항거하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당시
대구의 학생들과 시민들은 이 계단을 통해 태극기를 흔들며 대구 시내로 쏟아져 내려왔다.
당시 생생했던 현장을 증언이라도 하듯이 계단 양쪽 벽으로 가득 당시의 사진과 글들이 전시되어있다.
한 장 한 장 역사책 읽어 내려가듯 소중하게 읽어 내려오면 서문시장으로 통하는 길이 나오며 계산성당과 마주하게 된다.
계산성당은 1902년에 건축된 우리나라에서 세번째로 오래된 고딕 양식의 건축물입니다.
1886년 로베트 신부가 경상도 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하던 중 현재 계산성당 자리에 초가집을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게 되며 계산성당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목조건물로 시작했으나 불에 타게되어 1902년 지금과 같은 고딕양식의 성당으로 다시 그 모습을 바꿨습니다.
계산성당은 대구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서양식 건축물임과 동시에 대구에서 유일한 1900년대 성당 건축물이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저항시인 이상화의 시 한편을 대구의 어느 쌀쌀한 겨울 골목길 끝에서 만난다.
풋내 나는 살지고 부드러운 흙, 땀내나는 우리의 땅을 그는 상처 입은 다리로 절둑거리며 끝끝내 걸어가고 있다.
꿈결 속에 만난 듯한 다정한 이웃들, 지금은 빼앗긴 들이지만 봄을 기다리는 시인의 마음이 그대로 읽혀져 아름다웠던 그의 발자취를 느끼러 골목을 돌아간다.
골목 어귀에는 그의 명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가 빼곡하게 벽화로 적혀있다.
그리고 그가 생전에 살았던 아름다운 작은 집을 골목 어귀에서 만날 수 있다.
이상화 고택에 사용된 고벽돌 담장은 당시 근대의 분위기를 잘 살리기 위해 KT&G 측으로부터 일부를 기증받아 복원하였다.
집안에는 그의 생전 유품과 사진들이 정갈하게 전시되어있어 시인 이상화의 흔적을 느껴볼 수 있다.
이상화 고택 바로 이웃해서 자리잡고 있는 고택은 국채보상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고 서상돈의 고택이다.
뽕나무 골목 설화의 주인공 두사충은 중국 두릉 사람이다.
그는 시인 두보의 21대손으로 임진왜란 때 귀화하여 지금의 대구 계산성당 인근 지역에서 살았다.
당시 두사충은 조선의 열악한 의복문제를 해결하는데 관심이 많아 집근처에 뽕나무를 많이 길렀다고 한다.
어느 날 뽕나무잎을 따던 두사충은 이웃집에서 절구를 찧던 아름다운 아낙에게 마음을 빼앗겨 매일 넋이 나간 듯 담장 위에 올라갔다.
아들을 안쓰럽게 여긴 두사충의 아버지는 미모의 아낙을 찾아가 중매를 넣었는데, 마침 미모의 아낙은 남편을 잃고 홀로사는 처지여서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 뽕나무 골목은 그 많던 뽕나무는 모두 사라지고 담장 벽화 한 장으로 두사충과 아낙의 사랑이야기가 남아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