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미처 몰랐던 수학여행지의 진면목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그땐 미처 몰랐던 수학여행지의 진면목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집 떠나 친구들과 한방에서 자고 노는 것만으로 마냥 좋고 설레던 학창 시절 수학여행.
장기 자랑과 캠프파이어, 한밤중 선생님 몰래 벌인 베개 싸움의 추억이 선명하다.
오래된 단체 사진 속 배경으로 남은 관광지와 유적에 관해선 기억이 가물가물.
그때는 몰랐으나 세월이 흘러 진면목을 발견한 사진 속 그곳을 찾아 충남 공주로 간다.
공주는 475년(문주왕 1)부터 538년(성왕 16)까지 백제의 도읍이었다.
첫 도읍인 한성을 고구려 장수왕에게 뺏기고 옮겨 세운 두 번째 도읍으로, 옛 이름은 웅진이다.
백제 역사는 도읍 순서대로 한성, 웅진, 사비 시대로 구분한다. 사비 시대 도읍은 부여와 익산이다.
웅진 백제는 금강을 굽어보는 산 위에 성을 쌓아 수도를 방어하고 부흥을 일궈 문화적 전성기를 누렸다.
웅진성으로 불린 산성은 고려 시대에 공산성, 조선 시대에 쌍수산성으로 이름을 바꿨다. 현재 명칭은 공주 공산성(사적)이다.
공주 여러 곳에서 찬란한 백제 문화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사적), 공산성이 대표적이다.
두 곳은 부여, 익산 유적 여섯 곳과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1971년 여름 송산리 5호분과 6호분 배수로 공사 중, 온전한 벽돌무덤이 발견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입구에 놓인 지석은 무덤 주인이 백제 25대 무령왕과 왕비임을 분명히 알렸다. 화려하고 정교한 유물 수천 점이 쏟아졌다.
5·6호분을 포함한 송산리 고분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도굴돼 자료도, 유물도 없는 형편이었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무덤 가운데 유일하게 주인이 밝혀진 곳이다.
무령왕릉과 왕릉원에는 무덤이 모두 7기 있다. 1~5호분은 백제 전통 묘제인 굴식 돌방무덤이고, 6호분과 무령왕릉은 중국 양식인 벽돌무덤이다.
백제 사회의 국제성, 개방성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해석한다. 6호분은 사신도가 특징이다.
사방 벽에 무덤 주인을 지키는 동물을 그렸다. 각 무덤 구조와 유물은 무령왕릉과 왕릉원 전시관에서 관람한다.
영상과 패널, 내부를 재현한 모형으로 실제 무덤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전시관에서 나오면 고분군이 보인다. 6호분과 5호분, 무령왕릉이 이어진다.
푸른 소나무에 둘러싸인 길을 걸으며 1~4호분을 차례로 돌아본다. 1~6호분 모두 왕족의 무덤으로 짐작할 뿐, 주인을 정확히 알 수 없다.
관람 시간 오전 9시~오후 6시(명절 당일 휴관),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한시적으로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호젓하고 아름다운 오솔길이 국립공주박물관까지 연결된다.
무령왕릉에서 발굴한 실제 유물은 국립공주박물관에 있다.
왕과 왕비의 목관, 사망 연월일과 무덤 쓴 날짜를 기록한 지석(국보), 1500년간 내부를 지탱한 벽돌, 무덤을 지키는 석수(국보), 왕 내외가
착용한 금제 뒤꽂이(국보)와 은팔찌(국보) 같은 장신구 등을 눈앞에서 보면 감동이 훨씬 크다.
박물관은 무령왕릉 출토품
2021년 11월에 충청권역수장고도 개장했다. 유리 너머로 수장고 안 유물을 들여다보는 구조가 신기하다.
무령왕릉과 왕릉원, 국립공주박물관을 관람한 뒤 고대 왕국 백제의 영광을 상상하며 공산성을 걸어보자.
비단 같은 금강 줄기를 발아래 둔 낮은 능선을 따라 성곽이 2660m가량 이어진다.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공주 시내를 조망하며 완만한 듯 때로 급경사를 이룬 성곽 위를 걷는다.
금서루(서문)에서 출발해 공북루(북문), 진남루(남문), 영동루(동문)를 거쳐 돌아오면 한 시간쯤 걸린다.
웅진 백제 초기 왕궁 터로 짐작하는 추정 왕궁지, 조선 시대에 인조가 이괄의난을 피해 머물렀다는 쌍수정, 세조 때 건립한 사찰 영은사가 성안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