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답사여행
창녕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답사여행
창녕 하면 우포늪을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떠오르는 것이 우포늪뿐이라면 창녕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창녕은 가야소국 가운데 하나인 비화가야가 세력을 떨친 곳으로, 신라 진흥왕이 가야를 복속시킨 뒤 신라 땅임을 선포하며 진흥왕척경비를 세운 고장이기도 하다.
가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광대한 역사 유적이 남아 있으며, 국보 2점과 보물 4점을 비롯해 소중한 문화유산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부내륙고속도로 창녕IC로 나가면 넓게 펼쳐진 창녕 읍내 너머로 우뚝 솟아오른 화왕산이 눈에 띈다. 삼국시대에 비자화군
화왕군으로 불리던 이곳은 고려시대에 비로소 창녕이란 이름을 얻었다. 삼국시대 비자화군을 토대로 창녕을 ‘붉은 들판’이란 뜻으로 비사벌이라 부른다.
비사벌은 가야의 소국이었던 비화가야가 세력을 떨친 곳으로, 진흥왕 때 신라에 복속된 이후로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비화가야의 흔적으로 여겨지는 교동고분군과 송현동고분군을 비롯해 신라 진흥왕이 비화가야를 복속시키고 그 땅에 세운 진흥왕척경비
통일신라시대의 술정리 동·서삼층석탑, 인양사조성비, 송현동 마애여래좌상, 조선시대 창녕 석빙고와 창녕향교가 읍내를 중심으로 가까운 거리에 흩어져 있다.
문화유산을 차례로 만나보는 것도 좋지만, 창녕 읍내의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조성된 ‘진흥왕행차길’과 ‘송현이길’을 걷는 것도 추천한다.
진흥왕행차길은 진흥왕척경비를 중심으로 이어지며 이동거리는 약 7㎞다. 송현이길은 송현동고분군에서 발굴된 순장 인골의 주인인 1,500년 전 가야 소녀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송현리에서 발굴됐다 하여 소녀에게 ‘송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길도 그 이름을 따랐다.
송현이길의 이동거리는 약 4㎞이다. 두 길은 서로 겹치는 구간이 있지만, 크지 않은 창녕 읍내를 걸으며 문화유산 답사를 즐기기에 제격이다.
진흥왕행차길은 창녕박물관을 출발해 진흥왕척경비가 있는 만옥정공원, 창녕 석빙고, 술정리 하씨 고가, 술정리 동·서삼층석탑, 직교리 당간지주
인양사조성비, 사직단, 만덕지를 지나 창녕향교로 이어진다. 송현이길은 창녕박물관에서 교동·송현동고분군
송현동 마애여래좌상, 진흥왕척경비, 창녕 석빙고, 창녕향교를 거쳐 교동고분군과 창녕박물관으로 되돌아오는 코스다.
창녕IC에서 창녕 읍내로 들어가는 길에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술정리 서삼층석탑이다.
1㎞ 채 안 되게 떨어져 있는 술정리 동삼층석탑과 서로 비교하며 둘러보면 좋다.
두 삼층석탑은 술정리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자리 잡고 있다. 둘 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이지만 여러모로 다른 점을 보인다.
동삼층석탑은 국보 제34호로 지정되었고, 서삼층석탑은 보물 제520호다. 동삼층석탑이 조금 클 뿐, 탑의 형식과 모습은 대체로 비슷하다.
동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고, 선이 날카로우며, 정제된 느낌이 든다.
그에 비해 서삼층석탑은 조금 날렵하며, 선이 뭉툭하고 부드러운 느낌이다.
서삼층석탑은 남중파크로 난 좁은 길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고, 동삼층석탑은 창녕공설시장을 찾으면 쉽다.
창녕상설시장을 나와 명덕로를 따라 우회전해 가다 보면 조선시대 걸작품인 창녕 석빙고를 만난다.
석빙고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얼음창고다. 2012년에 개봉했던 차태현 주연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조선시대 한양의 석빙고였던 서빙고를 주제로 했다.
석빙고는 경주, 안동, 청도, 달성에도 있는데, 창녕에는 창녕읍과 영산면 두 곳에 석빙고가 남아 있다.
창녕 석빙고는 보물 제310호로 지정되었다.
창녕군청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만나는 삼진아파트 인근의 인양사조성비(보물 제227호),
송현동고분군 입구의 창화사와 가까운 곳에 있는 송현동 마애여래좌상(보물 제75호)도 창녕 읍내에서 만나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창녕 읍내를 관통하는 20번 국도는 북쪽으로 청도, 남쪽으로 낙동강을 건너 의령 땅으로 이어진다.
읍내를 벗어나 청도로 가는 국도변에는 교동고분군이, 화왕산군립공원 입구의 창화사 인근에는 송현동고분군이 자리한다.
두 고분군이 하나로 묶여 사적 제514호로 지정되었다.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은 5~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비사벌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던 비화가야의 흔적이다. 고려시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따르면, 비화가야는 금관가야, 고령가야, 아라가야, 성산가야와 함께 5가야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