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정조를 만나다 수원 화성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정조를 만나다 수원 화성
짧은 주말, 아이들에게 역사적으로 유익한 곳을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라면 수원과 화성을 1박 2일로 다녀오는 것은 어떨까?
수원과 화성에는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루었던 정조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조선후기의 걸출한 군주 정조가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을 찾아 발걸음을 옮겨보자.
특히 수원화성은 그 아름다움과 규모 그리고 과학성으로 인해 1997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우리나라 성곽건축기술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성곽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능을 살펴볼 수 있는 이곳은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수원화성은 둘레가 약 5.7킬로미터에 성벽의 높이는 평균 5미터 정도로 견고하고 튼튼한 성이다.
화성을 건축하는데 들어간 벽돌 수만 하더라도 거의 70만장에 육박한다.
한국전쟁당시 화성 성곽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으나, [화성성역의궤]에 자세한 건축과정이 기록되어 있어서 복구가 가능했다.
수원화성을 건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정조시대의 대 학자 정약용 이다.
정약용 선생은 중국의 [기기도설]이라는 책을 참고로 하여 거중기를 발명하였으며
도르레를 이용한 거중기를 통해 성곽을 건축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크게 단축시켜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었다.
수원화성의 성문은 모두 네 개(장안문, 팔달문, 창룡문, 화서문)인데 그 중 정문에 해당하는 문은 장안문이다.
장안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으로 그 크기와 아름다움이 국보 제 1호인 숭례문과 비교되기도 한다.
장안문은 철통 방어시설인 옹성을 갖추고 있는데, 성문을 항아리 모양으로 한 겹 더
에워 싼 성벽을 의미하는 옹성은 화공 등의 공격에 대비하기위한 매우 훌륭한 방어시설이다.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 구실을 했던 이유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을 살피러 행차를 할 때 한양에서 수원화성으로 들어서는 가장 첫 번째 입구이기 때문이었다.
장안문을 지나면 수원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인 화홍문을 만날 수 있다.
총 일곱 개의 수문 위에 세운 누각인데 수문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마치 꽃비를 뿌린 듯이 아름답다.
사시사철 너무나 아름다운 화홍문 주변은 늘 많은 여행객들로 붐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에 희생되어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었다.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는 왕이 된 후 가장 먼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원래 있던 자리에서 조선 제일 명당인 융릉으로 옮기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융릉은 사람들이 이미 많이 모여서 살고 있는 곳이었다.
정조는 그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키지 않고 새로운 장소에 성을 쌓고 집을 지을 돈과 이사비용까지 챙겨 사람들을 살게 하는데, 그 곳이 바로 지금의 수원화성이다.
사도세자를 모신 융릉에는 훗날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뿐만 아니라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도 함께 묻혀있다.
융릉은 다른 능과는 좀 다르게 정자각과 능침이 이루는 축이 일직선이 아니라 약간 비껴서 조성되어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효심 깊은 정조가 아버지의 능을 조성할 때 뒤주에 갇혀 돌아가실 때도 답답하셨을 것인데
정자각 바로 뒤에 능침을 조성한다면 얼마나 더 답답하시겠느냐 라는 말에 따른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