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닮다 지오푸드 제주를 담다

제주를 닮다 지오푸드 제주를 담다

제주를 닮다 지오푸드 제주를 담다

대구의 큰 자랑 선비 정신

제주도와의 만남은 육지 이방인에겐 늘 설렘이다.

이른 새벽에 비행기를 타고 도착해 늦은 밤 비행기로 되돌아오는 빡빡한 업무 일정 속에도 제주행 비행기의 탑승구를 오르는 발걸음은 소풍 길에 나서는 아이처럼 언제나 들떠 있다.

1주일이라는 비교적 긴 휴가기간을 할애해 리조트에서 뒹굴뒹굴 보낼 계획을 짤 때도 마찬가지.

그때까지 만나지 못한 신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란 막연한 기대감이 불쑥불쑥 기분 좋게 다가온다.

제주도를 향한 설렘은 만날 때마다 제주 섬이 상상조차 못 했던 경이로운 감동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감동은 용머리해안이었던 것 같다. 뭍에선 전혀 보지 못했던 지층, 마치 시루떡의 단면을 연상케 했다.

무슨 이런 단층이 다 있나, 바위인가 흙인가 궁금해 손으로 직접 까칠까칠한 표면을 만져보기까지 한 기억이 떠오른다.

다음은 동남쪽에 위치한 성산일출봉. 뜨거운 마그마가 분출하면서 바다와 만나 형성된 왕관 모양의 봉우리다.

멀리서보면 멀리서 보는 대로 아름다운 웅장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발 한발 걸어 올라가 정상에서 봐도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경이로움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한 번은 오동통한 제 한 몸조차 가누기 어려울 정도의 거센 바람에 혼쭐난 날도 있었다.

그것도 신기해 그저 웃음 밖에 안 나왔다.

몽당연필부터 새 연필까지 키가 다른 수십~수백 개의 연필묶음을 세워놓은 듯한 주상절리대가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든 적도 있었다.

또 유홍준 선생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돌하루방 어디 감수광’을 사 들고 오름을 걸을 땐 제주 섬의 속살을 발견하는 탐험가의 즐거움을 만끽하기도 했다.

하루를 봐도 눈이 휘둥그레지고, 일주일을 보내도 모든 게 신기하기만한 제주도.

정작 그 섬에서 태어나 40년을 살아온 본토박이 섬사람조차 “나도 매일매일 놀라며 산다”고 말하는 곳이 제주도다.

이런 제주의 경이로움 중심엔 화산으로 시작한 흙과 땅이 있다. 수십만 년 전 화산 활동이 만들어낸 작품인 셈이다.

제주가 ‘화산학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까닭이기도 하다.

유네스코에선 이를 인정해 2010년 제주를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했다.

세계지질공원은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공원을 말하지 않는다.

뛰어난 자연유산의 지질학적인 가치를 보호하면서 이를 토대로 관광을 활성화해 지역경제의 발전을 도모하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에 제주관광공사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지질(GEO·지오)을 테마로 한 음식 ‘지오푸드(GEO FOOD)’를 개발해 보급에 나선 것이다.

지오푸드는 한라산, 만장굴, 성산일출봉, 천지연폭포, 용머리해안, 산방산, 우도 등 제주도의 지질과 관련된 핵심 명소의 특성과 문화적 환경을

모티브로 삼아 제주지역에서 생산한 식재료를 활용한 로컬푸드다.

돔배고기, 몸국, 오메기떡 등 기존 제주 음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먹거리를 개발해 도민들의 소득을 올리겠다는 의도가 시작점이다.

독일의 ‘지질와인’, 영국의 ‘지질치즈’, 일본의 ‘지오스위츠’나 ‘지질호빵’ 등 외국에도 유사한 형태의 음식이 있단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지오푸드를 먹어본 결과, ‘역시 인간의 힘이 자연을 따를 재간은 없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하지만 다행히 자연과 문화를 사랑하는 제주도민들의 뜨거운 열정을 입안에 담는 별난 경이로움을 맛봤다.

대표적인 지오푸드 업소와 메뉴를 소개한다.지오푸드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베이커리다.

대표적인 메뉴는 용머리해안 지층 카스테라. 코코아 반죽과 화이트 반죽을 켜켜이 쌓아 만든 제품이다.

눈으로 얼핏 보면 용머리해안이라고 느끼기 어렵지만, 입에 넣어보면 예전에 손으로 느꼈던 용머리해안의 거친 촉감이 살아있다.

대구의 큰 자랑 선비 정신

대구의 큰 자랑 선비 정신

대구의 큰 자랑 선비 정신

영동 황간으로 떠나는 풍경 여행

조선 시대 성리학을 이끈 다섯 명의 대가를 가리켜 ‘조선오현(朝鮮五賢)’이라 부른다.

김굉필(1454~1504)은 영남학파 종조(宗祖) 김종직의 제자이자 사림파 영수(領袖) 조광조의 스승으로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이황도 그의 학문을 논하며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고 칭송할 정도다.

그러한 대학자가 남긴 선비 정신을 찾아 떠나는 길. 목적지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대니산 자락이 강을 향해 자세를 낮춘 곳에 있는 도동서원이다.

낙동강을 따라 달성군 현풍면에서 구지면으로 향하다 보면 ‘다람재’라는 작은 고개가 나온다.

이곳에 오르면 잠시 여행의 속도를 늦추게 된다.

산을 따라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낙동강이 여러 산줄기와 어우러져 절경을 자아내고 있는 것.

아름다운 경치에 빠져 있노라니 산자락의 경사면을 따라 정갈하게 건축된 서원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김굉필의 학문과 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도동서원이다.

어린 시절을 대니산 자락 동쪽의 솔례촌(현 달성군 대리)에서 보낸 김굉필은 18세에 장가들며 처가가 있던 합천군에서 생활했다.

당시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의 수제자로 들어가며 조선 성리학의 맥을 잊게 되었다.

이후 26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시절인 1498년에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단이 되어 발생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평안도 회천으로 귀양을 떠났다.

이후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사약을 받았다. 비록 그는 정쟁에 휘말려 역사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유배 당시 양성한 후학들에 의하여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대표적인 제자가 바로 조광조이다.

이처럼 성리학의 큰 줄기를 이어받아 죽을 때까지 후학 양성과 유학의 본질을 세상에 전하기에 헌신했던 사람.

그가 유학자로서의 본분을 다한 데에는 성리학의 기본이라 일컫는 《소학》에 심취했기 때문이라 한다.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칭할 정도였다.

대학자가 걸어온 역사의 흔적을 되새기며 서원 앞에 다다랐다.

문루인 수월루 앞에 도착하니 땅을 향해 가지를 늘어트린 커다란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도동서원이 사액된 것을 기념하여 김굉필의 외 증손인 한강 정구가 식수한 것으로 수령이 400년을 헤아린다.

잠시 나무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노라니 문화해설사가 다가와 설명을 곁들인다.

“이 은행나무는 김굉필 선생을 닮았습니다. 자세히 보면 나무 안에서 다른 나무 여럿을 키우고 있거든요.

스스로 터전이 되어 후학을 양성한 선생을 닮았잖아요.”

과연 커다란 줄기 안에서 서로 다른 나뭇가지가 보인다. 해설사의 설명이 이어진다.

“이 나무의 영험함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40년 전에 태풍이 불어 8톤 트럭 두 대 분량의 가지가 잘려나갔습니다. 당시 며칠간 나무가 소리 내며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평소 나무 밑은 아이들의 놀이터였는데, 아무도 다친 이가 없었고요. 서원에 깃든 남다른 기운이 나무에도 서린 게 아닐까요.”

영동 황간으로 떠나는 풍경 여행

영동 황간으로 떠나는 풍경 여행

영동 황간으로 떠나는 풍경 여행

마산 브라운핸즈 낡은 버스 차고지의 감각적인 변신

충북 영동군 서쪽에 자리 잡은 황간면은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다.

서쪽으로 더 가면 영남 지방을 이어주던 추풍령과 백두대간의 굵직한 산세, 금강의 지류인 초강천과 석천의 물줄기가 어울리며 수려한 풍경을 선사한다.

한천팔경인 월류봉, 석천과 백화산이 품고 있는 반야사, 한국전쟁의 상흔이 짙은 노근리평화공원을 둘러보고, 경부선 황간역과 추풍령역을 차례로 돌아본다.

가슴 아픈 비극의 현장, 노근리평화공원

노근리평화공원은 미군이 저지른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안타까운 노근리 사건의 진실이 규명되는 과정과 잊힌 과거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평화기념관, 실제 사건이 벌어진 쌍굴다리를 비롯해 위령탑과 조각공원, 전망대 등의 시설을 갖췄다.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은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4일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쌍굴다리로 불리는 개근철교 주변에서 벌어진 비극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은 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영동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당시 임계리 일대에 모인 피란민들을 남쪽으로 피란시키는 과정에서 미군은 방어선을 넘는 자들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무차별 기관총 난사로 무고한 민간인 몇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평화기념관에는 사건의 개요와 함께 1960년대에 시작된 노근리 사건의 진상 규명 요구부터 1999년 9월 AP통신 보도로 노근리 사건이 알려지게 된 경위

이후 진상조사와 2001년 당시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의 유감 표명,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까지 50년의 길고 길었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노근리평화공원 길 건너편에는 비극적인 사건의 현장인 개근철교가 있다.

‘이곳은 노근리 사건의 현장입니다’라고 쓰인 커다란 안내판이 마치 절규하는 듯하다.

철교에는 당시 총탄의 흔적이 흰 페인트 속에 갇혀 있다. 이 좁은 터널에서 몇백 명의 무고한 생명이 이유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다.

죽음을 맞이했던 몇백 명의 안타까운 비명은 사라진 지 오래고, 지금은 열차만이 무심히 철교 위를 지난다.

황간역은 황간면 소재지에서 초강천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어 다소 동떨어진 느낌이 들지만, 경부선 개통과 함께 문을 열어 11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석탄 수송용 화물열차가 정차한 큰 역에서 지금은 하루에 무궁화호 15대만 정차하는 한적한 역이 되었다.

과거를 돌아보면 ‘퇴락’이지만, 현재의 황간역은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해 ‘변화무쌍함’을 보여준다.

작은 역 광장에는 고향을 주제로 한 시와 그림이 새겨진 전통옹기가 옹기종기 모여 있고, 어렸을 적 한 번쯤 해봤을 땅따먹기, 돈가스, 사방치기 등 전통놀이판이 그려져 있다.

주말이면 시낭송회나 음악회도 열려 기차를 타지 않더라도 황간역을 알음알음 찾는다.

‘지역주민과 함께 가꾸는 아름다운 문화영토’라는 슬로건이 잘 어울린다. 황간역에 비치된 노랑자전거는 기차를 이용하는 여행객이라면 한 번쯤 타볼 만하다.

황간역에서 예약자에 한해 무료로 대여해준다. 황간역에서 가까운 월류봉(2.5km)이나 반야사(7.8km) 등을 다녀올 수 있다.

마산 브라운핸즈 낡은 버스 차고지의 감각적인 변신

마산 브라운핸즈 낡은 버스 차고지의 감각적인 변신

마산 브라운핸즈 낡은 버스 차고지의 감각적인 변신

군산으로 떠나는 주전부리 먹자여행

업사이클링(upcycling)이 트렌드가 된 요즘, 리사이클링(recycling) 차원을 넘어 버려지고 낡은 것에 디자인을 더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세상이다.

최근에는 건축 분야에 업사이클링 방식이 적극 활용되며 각광받고 있다.

오래된 공간이 주는 따뜻함과 새로운 디자인에서 나오는 감각이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낸다. 사람들이 업사이클링 건축 공간에 열광하는 이유일 것이다.

업사이클링 건축의 묘미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마산의 핫 플레이스 ‘브라운핸즈’를 소개한다.

지금 경남 일대에서 가장 ‘핫한’ 장소를 꼽으라면 단연 브라운핸즈 마산점이 아닐까 싶다.

이곳을 찾아가는데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외진 길이 이어진다. 불안해질 무렵 반가운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을 따라 들어가 처음 만나는 공간은 가스 충전소. 바닥에 있는 친절한 화살표 안내가 아니었다면 “설마, 여기?” 하며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가스 충전소를 지나 들어가면 그제야 탁 트인 바다와 브라운핸즈가 나타난다.

주변 분위기가 말해주듯 이곳은 원래 버스 차고지 겸 정비소였다.

수십 년 동안 마산 시내를 오가던 버스가 모이고 정비되던 곳이다.

버스 차고지가 철거된다는 이야기를 접한 브라운핸즈 이준규 대표가 업사이클링 복합 문화 공간으로 되살리자고 제안

브라운핸즈 마산점이 탄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산은 이 대표의 고향이기도 하다.

브라운핸즈는 라이프스타일 디자인 브랜드로, 2014년 서울 도곡동의 오래된 자동차 정비소를 복합 문화 공간 ‘브라운핸즈 쇼룸&카페’로 오픈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브라운핸즈 도곡점은 빈티지한 분위기 덕에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촬영지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두 번째 브라운핸즈 쇼룸&카페가 2015년 여름, 마산에 문을 열었다.

버스 차고지의 분위기를 최대한 유지하는 선에서 리노베이션 작업이 진행됐다.

건물 전면에 보이는 ‘안전제일’이나 내부의 ‘닦고 조이고 기름 치자’는 문구가 고스란히 살아 있다.

정비사가 차량 아래 들어가 작업하던 움푹 파인 공간 등 옛 정비소의 독특한 요소도 곳곳에 살려두었다.

브라운핸즈는 쇼룸과 갤러리 역할도 한다. 카페 안에서 브라운핸즈 제품을 만나고,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이곳에 들어서면 눈에 띄는 포인트 중 하나가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다.

브라운핸즈와 현대미술 조각가 정의지가 협업해 만든 예술 작품이다. 버려진 양은 냄비와 리벳, 알루미늄 주물로 만든 조명 기구가 업사이클링 공간을 더욱 빛내준다.

카페 내부에는 이렇게 참신한 구경거리가 가득하고, 외부에는 바다 전망이 펼쳐진다.

버스 차고지로 남았다면 아까웠을 자리에 브라운핸즈가 있다.

마산에서 브라운핸즈만큼 주목받는 곳이 또 하나 있다.

빨간 벽돌 건물이 인상적인 ‘브릭루즈’. 가게 이름도 프랑스어로 ‘빨간 벽돌(brique rouge)’이라는 뜻이다.

가정집을 개조해 레스토랑 겸 카페로 운영한다.

군산으로 떠나는 주전부리 먹자여행

군산으로 떠나는 주전부리 먹자여행

군산으로 떠나는 주전부리 먹자여행

창녕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답사여행

군산은 근대 역사 도시다. 구도심 곳곳에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적산가옥도 많고 구조선은행, 구군산세관, 근대역사박물관 같은 근대 문화유산도 즐비하다.

미곡을 수탈해 가던 옛 철길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군산의 근대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여행이 아니다.

구도심에 펼쳐진 근대의 흔적들을 덤으로, 갖가지 먹을거리를 찾아다니는 일명 ‘먹자여행’이다.

군산에서는 길거리에 흔한 웬만한 식당도 40년 역사를 쉽게 넘긴다. 해방 후부터 쭉 이어지고 있는 식당이나 주전부리도 심심찮다.

역사는 거리나 건물, 철길에도 흐르지만 우리네 음식에도 생생하게 흐르고 있다.

군산 하면 바로 떠오르는 이성당

2~3년 전부터 전국 곳곳에서 오랫동안 시간과 맛을 쌓아온 옛날 빵집들이 호황이다.

그런 이유로 요즘엔 군산 하면 이성당부터 떠오른다.

이성당 단팥빵은 군산 가면 꼭 한번 먹어보고 싶은 간식이 됐고, 숱하게 매스컴을 탄 덕분에 이제 군산에 가도 쉽게 맛볼 수 없는 명물이 됐다.

해방 후 역사만 67년에 이르는 이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단팥빵과 야채빵이 구워져 나오는 것은 하루 몇 차례.

그날그날 정해진 시간에 빵이 나오는데, 기다리고 있던 손님들이 그 시간을 보상받고자 한 번에 몇십 개씩 사가는 통에 단팥빵 쟁반은 빵이 나오기 무섭게 바닥을 드러낸다.

빵이 채 식기도 전에 빵을 차지하고자 하는 손님들의 빠른 손놀림이 먼저 식을 판이다.

그래서 단팥빵이나 야채빵은 1인당 사갈 수 있는 빵의 갯수를 제한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맛본 따뜻한 단팥빵 하나는 기다림에 지친 마음을 단숨에 위로한다.

담백하고 달달한 팥소가 가득 든 단팥빵은 몽실몽실 부드럽고, 어릴 적 시장에서 엄마가 사주시던 아삭아삭 야채빵도 옛날 맛 그대로다.

애써 찾아가고 기다린 보람이 있다.

사실 빵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 건 빵이 나오기까지의 기다림과 설렘 때문이다.

아무때고 단번에 살 수 없다는 아쉬움, 누구나 사먹고 싶어 하는 빵을 차지했다는 기쁨

먼 데서부터 부러 찾아갈 때까지 빵 하나에 담긴 기대 같은 것들이 어우러져 실제보다 더 맛있게 느껴질 법도 하다.

이성당 빵의 70% 정도는 쌀가루를 섞어 만들고 어떤 것은 100% 쌀가루로 만들기도 한다.

그중 블루빵이 100% 쌀가루 빵이다. 쫄깃하고 소화도 잘 되는 쌀가루로 만든 빵은 식사 대용으로도 손색없다.

이성당에서는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 계란프라이와 스프, 커피와 샌드위치가 어우러진 모닝세트를 판매한다.

서양식 아침식사를 동경하던 옛날부터 지금까지도 인기다. 영업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 30분까지(유동적 휴무).

군산에는 이성당 말고도 또 다른 의미의 명물 빵집이 있다. 바로 영국빵집이다.

1980년대 초에 문을 열어 동네 빵집으로 꾸준히 이름을 알리다가 3년 전부터 군산에서 생산되는 ‘흰찰쌀보리’라는 보릿가루를 반죽에 섞으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흰찰쌀보리는 희고 찰기가 있는 보리 품종으로 군산에서 대량 생산된다.

보리는 원래 농약을 칠 필요가 없는 곡물이어서 안심이 되는 데다 찰쌀보리가 찰기까지 더해 쫀득한 빵이 만들어진다.

자칫 퍽퍽할 수 있는 소보로빵도 촉촉하고 쫀득하다.

보릿가루를 50% 정도 섞어 만드는 단팥빵과 부추빵을 비롯해 100% 보리 반죽으로 만드는 보리만쥬가 영국빵집의 대표 빵이다.

창녕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답사여행

창녕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답사여행

창녕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답사여행

상큼하고 쫀득한 영주의 별미와 디저트

창녕 하면 우포늪을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떠오르는 것이 우포늪뿐이라면 창녕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창녕은 가야소국 가운데 하나인 비화가야가 세력을 떨친 곳으로, 신라 진흥왕이 가야를 복속시킨 뒤 신라 땅임을 선포하며 진흥왕척경비를 세운 고장이기도 하다.

가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광대한 역사 유적이 남아 있으며, 국보 2점과 보물 4점을 비롯해 소중한 문화유산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부내륙고속도로 창녕IC로 나가면 넓게 펼쳐진 창녕 읍내 너머로 우뚝 솟아오른 화왕산이 눈에 띈다. 삼국시대에 비자화군

화왕군으로 불리던 이곳은 고려시대에 비로소 창녕이란 이름을 얻었다. 삼국시대 비자화군을 토대로 창녕을 ‘붉은 들판’이란 뜻으로 비사벌이라 부른다.

비사벌은 가야의 소국이었던 비화가야가 세력을 떨친 곳으로, 진흥왕 때 신라에 복속된 이후로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비화가야의 흔적으로 여겨지는 교동고분군과 송현동고분군을 비롯해 신라 진흥왕이 비화가야를 복속시키고 그 땅에 세운 진흥왕척경비

통일신라시대의 술정리 동·서삼층석탑, 인양사조성비, 송현동 마애여래좌상, 조선시대 창녕 석빙고와 창녕향교가 읍내를 중심으로 가까운 거리에 흩어져 있다.

문화유산을 차례로 만나보는 것도 좋지만, 창녕 읍내의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조성된 ‘진흥왕행차길’과 ‘송현이길’을 걷는 것도 추천한다.

진흥왕행차길은 진흥왕척경비를 중심으로 이어지며 이동거리는 약 7㎞다. 송현이길은 송현동고분군에서 발굴된 순장 인골의 주인인 1,500년 전 가야 소녀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송현리에서 발굴됐다 하여 소녀에게 ‘송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길도 그 이름을 따랐다.

송현이길의 이동거리는 약 4㎞이다. 두 길은 서로 겹치는 구간이 있지만, 크지 않은 창녕 읍내를 걸으며 문화유산 답사를 즐기기에 제격이다.

진흥왕행차길은 창녕박물관을 출발해 진흥왕척경비가 있는 만옥정공원, 창녕 석빙고, 술정리 하씨 고가, 술정리 동·서삼층석탑, 직교리 당간지주

인양사조성비, 사직단, 만덕지를 지나 창녕향교로 이어진다. 송현이길은 창녕박물관에서 교동·송현동고분군

송현동 마애여래좌상, 진흥왕척경비, 창녕 석빙고, 창녕향교를 거쳐 교동고분군과 창녕박물관으로 되돌아오는 코스다.

창녕IC에서 창녕 읍내로 들어가는 길에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술정리 서삼층석탑이다.

1㎞ 채 안 되게 떨어져 있는 술정리 동삼층석탑과 서로 비교하며 둘러보면 좋다.

두 삼층석탑은 술정리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자리 잡고 있다. 둘 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이지만 여러모로 다른 점을 보인다.

동삼층석탑은 국보 제34호로 지정되었고, 서삼층석탑은 보물 제520호다. 동삼층석탑이 조금 클 뿐, 탑의 형식과 모습은 대체로 비슷하다.

동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고, 선이 날카로우며, 정제된 느낌이 든다.

그에 비해 서삼층석탑은 조금 날렵하며, 선이 뭉툭하고 부드러운 느낌이다.

서삼층석탑은 남중파크로 난 좁은 길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고, 동삼층석탑은 창녕공설시장을 찾으면 쉽다.

창녕상설시장을 나와 명덕로를 따라 우회전해 가다 보면 조선시대 걸작품인 창녕 석빙고를 만난다.

석빙고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얼음창고다. 2012년에 개봉했던 차태현 주연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조선시대 한양의 석빙고였던 서빙고를 주제로 했다.

석빙고는 경주, 안동, 청도, 달성에도 있는데, 창녕에는 창녕읍과 영산면 두 곳에 석빙고가 남아 있다.

창녕 석빙고는 보물 제310호로 지정되었다.

창녕군청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만나는 삼진아파트 인근의 인양사조성비(보물 제227호),

송현동고분군 입구의 창화사와 가까운 곳에 있는 송현동 마애여래좌상(보물 제75호)도 창녕 읍내에서 만나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창녕 읍내를 관통하는 20번 국도는 북쪽으로 청도, 남쪽으로 낙동강을 건너 의령 땅으로 이어진다.

읍내를 벗어나 청도로 가는 국도변에는 교동고분군이, 화왕산군립공원 입구의 창화사 인근에는 송현동고분군이 자리한다.

두 고분군이 하나로 묶여 사적 제514호로 지정되었다.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은 5~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비사벌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던 비화가야의 흔적이다. 고려시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따르면, 비화가야는 금관가야, 고령가야, 아라가야, 성산가야와 함께 5가야에 포함되었다.

상큼하고 쫀득한 영주의 별미와 디저트

상큼하고 쫀득한 영주의 별미와 디저트

상큼하고 쫀득한 영주의 별미와 디저트

논산 연산오계 오골계가 아닌 오계라 불러다오

영주에 가면 말랑하고 쫀득한 갈등이 기다린다.

45년 전통의 소울푸드 메밀묵밥을 먹어야 할지, 30년 추억을 담은 쫄면을 먹어야 할지, 행복한 고민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나드리분식은 매콤한 쫄면의 추억을 찾는 중년층으로 붐비고, 순흥의 구수한 전통묵밥은 다이어트 음식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의 관심이 뜨겁다.

반전 매력이 있는 영주 별미에 촉촉한 순흥기지떡과 고구맘 파이까지 맛보고 나면 영주의 하루가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하고 구수하다.

영주의 옛맛, 순흥전통묵집의 메밀묵밥

소박한 가정식 식당이 유독 눈에 많이 띄는 영주에는 토박이들만 가는 동네 맛집이 많다.

한우로 유명한 한우식당은 물론이고, 풍기 인삼으로 업그레이드한 한방삼계탕, 순흥의 메밀묵밥집 등을 손에 꼽는다.

부석사 근처 마을인 순흥에는 1970년대부터 전통묵밥 한 가지만 만들어온 순흥전통묵집이 있다.

벽 두께가 두 자(60cm)가 넘을 만큼 투박하게 지은 토담집이 오랜 세월 든든하게 자리를 지켜왔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는 토담집 아랫목에 앉아 먹는 묵밥은 구수하다.

부엌에 딸린 안채 말고도 널찍한 식당이 두 군데나 있는데, 마당 가운데 야외 테이블에 앉아 먹는 묵밥도 별미다.

달고 시원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메밀묵밥 한 그릇에 옛집 마당의 정취가 감칠맛을 더한다.

메밀을 맷돌에 곱게 갈아 가마솥에 쑤어내고 하룻밤을 식혀야 먹을 수 있는 메밀묵은 옛맛을 이어가는 슬로푸드다.

먹고 일어서면 금세 배가 푹 꺼진다고 할 만큼 다이어트 음식으로 최고다.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는 메밀은 농약이 필요 없는 작물이라 무공해 식품으로도 주목받는다.

잘 식힌 메밀묵을 낭창낭창하게 썰어서 요것조것 올리는 고명도 푸짐하다.

송송 썰어낸 신 김치와 상큼한 무생채를 올리고, 바삭하게 구운 김가루와 깨소금을 듬뿍 뿌린다.

주인 할머니가 해마다 담그는 소고기간장으로 간을 맞추는 노란 빛깔의 멸치육수가 메밀묵을 흥건하게 적시면 메밀묵밥이 완성된다.

밋밋한 메밀묵이 요리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영주에는 쫄면의 양대 산맥이 있다.

30년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중앙분식과 나드리분식이 그것이다.

쫄면 하나로 경쟁하는 중앙분식과 돈가스, 김밥 등 다양한 분식 메뉴와 쫄면을 선보이는 나드리분식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다.

영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굵은 생면 면발이다. 고무줄처럼 질기게만 느껴지는 쫄면이 아니다.

적당히 쫀득하면서 씹을수록 부드럽고 단맛이 느껴지는 면발에 영주 쫄면의 매력이 숨어 있다.

직접 담근 고추장을 섞어 만든다는 고추장소스는 투박하고 묵직한 맛이 입에 착착 붙는다.

분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쫄면 한 그릇이 요리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아삭아삭 소리도 경쾌한 단무지와 따끈한 국물 한 그릇은 매운 쫄면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궁합이다.

나드리분식에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쫄면이 있다. 어린아이의 입맛을 배려해 만들었다는 간장쫄면인데, 매운맛을 싫어하는 어른들에게 더 인기 있다.

양조간장에 사과, 양파, 오이 등 갖가지 채소를 넣어 졸이다 보면 감칠맛이 좋은 간장소스가 만들어진다고.

2인 이상 갔을 땐, 매운 쫄면과 함께 옛날식 돈가스를 시켜서 나눠 먹으면 좋다.

매콤한 쫄면에 바삭한 돈가스는 세트메뉴처럼 맛있게 어우러진다. 보기에도 클래식한 돈가스는 32년 전 레시피 그대로 요리한다.

양파와 사과, 배 등을 갈아서 생등심을 재웠다가 바삭하게 튀겨내는데, 옛날식 그레이비소스와 구수하게 어우러진다.

논산 연산오계 오골계가 아닌 오계라 불러다오

논산 연산오계 오골계가 아닌 오계라 불러다오

논산 연산오계 오골계가 아닌 오계라 불러다오

경북에서 즐기는 한옥체험 추운 겨울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울 때

대전에서 논산으로 가는 4번 국도를 따라가면 개태사, 돈암서원, 황산벌, 관촉사 등 제법 굵직한 역사를 간직한 문화유산이 산재했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유독 눈에 띄는 표지판이 하나 있다. 천연기념물 제265호로 지정된 ‘연산 화악리의 오계’ 표지판이다.

오골계와는 차원이 다른 독특함과 천연기념물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보양식으로 맛볼 수 있는 특별함이 있다.

뼛속까지 검은 그대, 오계(烏鷄)를 만나보자.

왕건의 명으로 창건된 개태사 인근에는 천연기념물 중 하나인 연산 화악리의 오계를 만나볼 수 있는 지산농원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가운데 사람의 손에 사육, 관리되는 축양동물이 있는데, 올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제주 흑우를 포함해 모두 6종이다.

연산 화악리의 오계도 진도의 진도개(제53호), 제주의 제주마(제347호), 경산의 삽살개(제368호), 경주개 동경이(제540호)와 함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축양동물이다.

연산 화악리의 오계는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재래 닭으로 인정받아 1980년 천연기념물 제265호로 지정되었다.

닭은 원래 동남아시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입 경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온 뒤 현재의 모습으로 토착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오계가 문헌상에 등장하는 것은 고려 말 문신인 제정 이달충의 문집 《제정집》인데, “요승 신돈이 오계와 백마를 먹고 정력을 보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 숙종이 오계를 먹고 건강을 회복한 뒤 오계가 충청 지역의 진상품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가장 가깝게는 연산 지역의 통정대부 이형흠이 철종에게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형흠은 오계의 지정 사육인인 지산농원 이승숙 대표의 5대 조부다.

오계는 흔히 알려진 오골계와는 차이가 분명한데도 오골계와 혼동하기 십상이다.

오골계는 일본의 천연기념물로, 털은 흰 반면 뼈가 검어 오골계라 불린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 《동아일보》에 오계를 소개하면서 오골계라 불러 혼선을 빚은 게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재래 닭은 오골계가 아닌 오계가 맞다. 유홍준 선생이 문화재청장으로 있을 때 비로소 오골계에서 오계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연산 화악리의 오계는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먼저 오계는 외형뿐 아니라 뼈까지 검다.

《동의보감》 <금수편>에는 “닭의 눈이 검으면 뼈도 반드시 검은데 이것이 진짜 오계”라는 내용이 나온다.

오계는 털뿐 아니라 발, 볏, 눈동자와 눈자위, 피부와 뼈까지 까맣다. 가만히 다가가서 보면 전체가 검은 가운데서도 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데 그 빛깔이 참으로 곱고 오묘하다.

오계는 야생 조류에 가까울 정도로 성질이 예민하고 까다롭다. 가둬놓고 사육하면 스트레스를 받아 죽기도 해 사육하기 힘들다고 한다.

게다가 일반 닭보다 성장 속도가 5배 정도 느릴 뿐 아니라 하루에 하나씩 알을 낳는 양계에 비해 오계는 4~5일에 한 개씩 낳는다.

몸집이 작고 활동성이 좋지만 속된 말로 “체구도 작은 놈이 하도 싸돌아다녀 살이 안 찐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오계는 경제성이 떨어진다. 1970년대 들어 양계가 도입되면서 오계는 서서히 도태되기 시작했다.

오계는 1980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천연기념물 지정 문서에 “한국의 희귀 축양동물인 오골계의 멸종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명시되어 있을 만큼 1970년대를 거치면서 멸종 위기의 시간을 걸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당시만 하더라도 몇 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오계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후 2대에 걸쳐 30년 넘게 사육, 관리되고 있다.

사육이 까다롭고 지원이 없다 보니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지산농원 이승숙 대표는 1999년 아버지 병간호를 하러 내려왔다가 이곳에 발을 붙였다.

보험까지 해약할 정도로 사재를 털었고, 오계 음식점을 병행하다 보니 천연기념물 지정 사육인이 아닌 삼계탕집 사장으로 불리기도 해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집단 사육을 하는 동물들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전염병이다. 특히 조류인플루엔자(AI)는 오계에게 가장 무서운 병이다.

자칫하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오계 1,000마리가 한꺼번에 살처분되어 멸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6년과 2008년 등 지난 몇 년 동안 경기도 동두천과 인천 무의도, 경북 봉화와 상주 등으로 오계의 피난 행렬이 이어지기도 했다.

2012년에는 피난을 가야 할 오계들이 지자체의 반발로 발이 묶이기도 했다.

경북에서 즐기는 한옥체험 추운 겨울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울 때

경북에서 즐기는 한옥체험 추운 겨울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울 때

경북에서 즐기는 한옥체험 추운 겨울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울 때

마음 시린 날 커피 한잔의 위로 강릉 사천진해변

여행자들 중에는 따뜻한 아랫목이 있는 고택에서의 하룻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경상북도는 양반의 고장답게 고택이 제법 많고 한옥을 체험할 수 있는 곳도 많다.

이번 겨울 경북의 고택을 찾아 따뜻한 아랫목에서 긴 겨울밤을 보내보면 어떨까?

청송은 사시사철 아름다운 주왕산을 품고 있는 고장이다.

청송읍에서 주왕산으로 가는 길, 청운동이라 불리는 마을에 성천댁이라는 오래된 고택이 있다.

조선 고종 때 행장능참봉을 지낸 임춘섭이란 사람이 이 집을 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집이 지어진 지는 대략 300년쯤 되었다고 한다.

성천댁은 청운동성천댁이란 이름으로 중요민속문화재 제17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천댁은 이 고택이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이곳에 거주하던 할머니의 택호다.

할머니는 16세 때 이곳에 시집와서 90세가 넘게 사셨다는데, 남편을 여읜 뒤로 혼자 고택을 지켰다고 한다.

성천댁은 경상북도의 전형적인 뜰집이다. 뜰집은 ‘ㅁ’ 자형 집으로 중앙에 마당이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작은 공간에 사랑방과 안방, 부엌과 외양간까지 갖췄다.

강원도나 경북 산간 지역은 겨울이 추운 데다 늘 맹수의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집안에 모든 것을 들여야 했다.

성천댁의 매력은 바로 마당이다. 아마도 이처럼 작은 마당은 세상에 없을 게다.

잘 압축해놓은 집 한가운데에 마당까지 만들다니 더구나 ㅁ자 지붕 사이로 마당만큼이나 작은 하늘도 보인다.

마당이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공간이다. 성천댁은 전체적으로 아담하면서도 짜임새가 있어 옹기종기 오붓한 느낌이 절로 든다.

성천댁은 안채와 사랑채로 이뤄졌다. 안채와 사랑채에는 각각 방이 2개 있다.

사랑채는 미닫이문으로 나뉘고, 안채는 뒷방과 큰방으로 각각 나뉜다.

사랑채에는 차를 마실 수 있는 다구가 준비되어 있고, 안마당에서는 투호, 널뛰기, 자치기 등 전통놀이를 즐길 수 있다.

문간채는 입식 주방과 간단한 취사도구가 준비되어 있고, 화장실과 샤워실, 세탁기도 들여놓았다. 예약은 전화로만 받는다.

1990년 임하댐 건설로 지례마을이 물에 잠겼다. 지례마을은 조선 숙종 때 남인의 종장이었던 지촌 김방걸을 입향조로 3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마을이었다.

댐 건설로 마을은 통째로 사라지고, 일부 고택만이 옛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중턱으로 옮겨졌다. 바로 지례예술촌이다.

지촌종택과 지촌제청, 지산서당 등이 1985년 문화재로 지정되어 마을 뒷산 골짜기에 차례로 이전되었다.

여기에는 특별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마을이 수몰되기 전 《꽃신》의 저자인 소설가 김용익 씨가 마을을 찾았는데

곧 수몰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미국의 예술인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예술인촌은 문학, 미술, 음악을 하는 예술가들이 오래도록 머물며 예술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집단 거주지를 말한다.

김용익 씨의 제안으로 지촌종택과 부속 건물들을 옮겨 지례예술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지례예술촌은 지난 2011년에야 도로가 포장됐을 정도로 오지 중 오지다.

안동에서 청송으로 가는 34번 국도변에서 수애당을 지나서도 11km에 이르는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야 지례예술촌에 이른다.

예전에 프랑스 대사 부부가 지례예술촌을 찾아가다 험한 산길에 길이 산중으로 이어지자 납치로 오해했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오지에 있기에 창작활동을 하는 예술인뿐 아니라 수려한 풍경 속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늘 끊이지 않는다.

마음 시린 날 커피 한잔의 위로 강릉 사천진해변

마음 시린 날 커피 한잔의 위로 강릉 사천진해변

마음 시린 날 커피 한잔의 위로 강릉 사천진해변

당진으로 떠난 알찬 하루 여행 심훈기념관에서 우렁쌈장까지

커피와 휴식, 나아가 힐링은 한 팀이다. 덕분에 커피를 품은 강릉이 힐링의 고장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강릉 커피 투어는 제법 여러 동선으로 즐길 수 있는데 오늘은 아직 덜 알려진 사천진해변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이미 유명해진 안목항이나 <보헤미안><테라로사>보다 조용한 곳에서 나를 위한 한잔 선물해보는 것은 어떨까.

살다보면 한 박자 쉬어가야 할 때가 있다. 이럴 때 우리는 ‘한잔’을 떠올린다.

언제든 한잔 나눌 누군가 옆에 있다면 이 풍진 세상 살아갈 힘쯤 솟아나지 않을까.

후들거리는 두 다리로 간신히 땅을 딛고 있을 때, 이때 진짜 한잔이 간절해진다.

나와 단 둘이, 오롯이 나에게 허락된 시간을 함께 할 소중한 한잔.

알코올, 차(茶), 커피 등이 곁을 채울 것이다.

그 중 커피는 알코올보다 안전하고 차(茶)보다 다가가기 수월해 많은 이들이 찾는다.

그래서일까. ‘커피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땅 곳곳에 커피 전문점들이 들어서고 있다.

빠듯한 일과 중 커피 한잔 마시며 쉬어가는 게 일상이 되었으니 그리 과한 표현도 아닌 듯 하다.

그렇다고 전문점에서만 커피를 맛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부담없이 만날 수 있는 인스턴트 커피도 있다. 어쩌면 커피는 생각보다 더 깊이 우리 일상에 스며들었는지 모른다.

다만 지금부터 만나러 갈 오늘의 커피는 좀 멀리 있다. 마음 시린 어느 날, 그대를 위로해 줄 마법 같은 한잔이니 조금 멀어도 그저 기억해주시라.

언젠가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말하고 싶지 않을 때, 누구도 보고 싶지 않은 순간과 맞닥뜨리게 된다면 이곳으로 한잔 하러 가면 어떨까.

여행 좋아하거나 커피 좋아하는 이들은 이쯤 오늘의 여행지를 눈치 챘으리라. 맞다.

커피하면 빼놓을 수 없게 된 고장, 강릉이다. 소나무 향기 가득한 강릉에 커피향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 땅의 드립커피 1세대로 꼽히는 <보헤미안>과 <테라로사>가 자리를 잡고 난 뒤 부터였을까.

커피 자판기들이 안목항에 들어서면서 부터였을까. 커피와는 딱히 인연이 없을 것 같은 강릉은 대한민국 커피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

앞의 몇몇 짐작들이 강릉을 커피의 메카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커피 탐사보도가 아니라 상처받은 영혼을 달래러 가는 길이니 ‘힐링’에 최적화된 여행 동선부터 꾸려보자.

커피의 고장답게 강릉은 커피 집단 거주지역이 제법 많다.

동해안을 따라 쭉 뻗은 지도를 살펴보자.

커피 항구로 알려진 안목항부터 수산시장으로 유명한 주문진까지가 이번 여행의 큰 동선이고 이 둘의 가운데 즈음 자리한 사천진해변이 메인이다.

사천진으로 ‘한잔’하러 가보자.

어째서 안목이나 연곡, 경포가 아니라 사천진이냐고 묻는다면 가장 큰 이유로 그의 무명을 들겠다.

안목항처럼 깔끔하게 정비된 맛은 없지만 독채로 뚝뚝 떨어진 커피가게들이 바다를 향한 모습이 풋풋하고 정겹다.

게다가 아직 해안을 따라 가득 채워지지 않아 여유도 있다.

완성되지 않은 모습 덕분에 모르는 이들은 드라이브를 하며 지나친다.

그래서 사천진의 커피거리는 소중하다. 모두에게 알려지지 않은 덕분에 누구나 찾아들지 않아 안도감을 준다.

그렇다고 완전히 외떨어지지도 않아 혼자서도 찾아들기 부담스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