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깔나는 전주 여행의 완성 남부시장 한옥마을 야시장

맛깔나는 전주 여행의 완성 남부시장 한옥마을 야시장

맛깔나는 전주 여행의 완성 남부시장 한옥마을 야시장

폐교에서 책 짓는 마을로 고창 책마을해리

수백 채 한옥 지붕 위로 달빛이 내려앉은 고요한 밤, 상인들이 문 닫고 돌아간 전주 남부시장에 오방색 조명이 환하게 켜진다.

남부시장 한옥마을 야시장이 열린 것. 매주 금·토요일이면 길이 250m 시장 통로에 이동 판매대 45개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먹거리와 공연, 즐길 거리가 풍성해 여행자는 물론 주민도 찾는 곳이다.

주말 야시장에 다녀가는 손님은 평균 8000~9000명.

에너지 넘치는 청년 상인과 손맛 좋은 다문화 가정 사람들, 시니어클럽 어르신이 저마다 ‘비밀 병기’로 손님맞이에 분주하다.

남부시장 한옥마을 야시장은 아케이드 시설이 갖춰져 궂은 날씨에도 끄떡없다.

천재지변이 있지 않는 한 무조건 열린다. 2층에 위치한 청년몰은 야시장보다 한발 앞서 남부시장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숙소로 발길을 돌리기 아쉬운 당신, 색다른 밤을 선물할 남부시장 한옥마을 야시장으로 가보자.

남부시장 한옥마을 야시장은 풍남문으로 향하면 찾기 쉽다.

풍남문에서 가까운 북문, 남부시장주차장이 있는 동문, 천변주차장 쪽 남문, 서문 모두 오방색 조명으로 밝힌 간판이 입구를 밝힌다.

야시장은 하절기에는 18:00~24:00까지, 동절기에는 17:00~22:00까지 손님을 맞는다.

십자로에 늘어선 야시장 판매대는 각양각색이다. 야시장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먹거리가 45개 판매대 중 31개다.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 전주에 왔으니 여기저기 다니며 배불리 먹었다 해도, 이곳 야시장의 유혹을 견디지 못할 터.

오직 남부시장 한옥마을 야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메뉴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군복을 입고 야시장의 후예를 꿈꾸는 ‘군대리아’의 버거, 나무젓가락에 낙지를 돌돌 말아 양념을 바르고 토치로 구운

‘낙지호롱’의 낙지꼬치, 인기 만점 ‘총각네스시’의 소고기불초밥, ‘지글지글팟’의 야채뚱땡과 철판스테이크도 긴 줄을 참고 기다려야 맛볼 수 있는 메뉴다.

이곳 야시장 먹거리 판매대에서는 토치를 이용한 불 쇼가 색다른 볼거리다.

짧은 시간 강한 화력으로 익혀 음식의 풍미를 더한다.

베트남, 태국, 중국, 라오스, 필리핀 등의 이국적인 음식도 맛볼 수 있다. 전주에 정착한 다문화 가정 사람들이 실력을 선보인다.

속을 시원하게 풀어줄 베트남 쌀국수, 알록달록한 라오스 만두(사구)가 단연 인기다.

음식 값은 3000~5000원 내외로 저렴하지만, 그 맛의 유혹에 끌려 2만~3만 원은 거뜬히 지출할지 모른다.

야시장에서는 전주 전통의 맛도 느껴볼 수 있다. 남부시장 터줏대감인 ‘조점례남문피순대’와 콩나물국밥집이 성업 중이다.

남문으로 시장에 들어서면 갖가지 소품 판매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목공예, 도자기공예, 자수, 액세서리 등 아기자기한 소품이 많다. 동문 입구로 들어섰다면 상가번영회 고객지원센터에 들러보자.

이곳에서 받은 지도를 들고 시장 곳곳을 살펴보는 방법도 추천할 만하다.

야시장 중앙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진다.

통기타·색소폰 연주, 버스킹 등 하루 2회 공연이 있고, 매월 마지막 금요일에 노래자랑이 열린다.

현장에서 접수하니 노래 실력을 자랑하고 싶다면 도전해보자.

야시장을 구경하다 보면 남문 방향에 2층 청년몰로 올라가는 계단이 눈에 띈다.

청년몰은 한옥마을에 야시장이 들어서기 전부터 남부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처음에는 사람보다 드나드는 고양이가 많다고 할 정도로 빈 점포가 수두룩했다.

1999년 남부시장 화재 이후 대부분 창고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꿈 많은 청년 창업자들이 ‘적당히 벌고 아주 잘살자’는 모토로 방치된 공간에 하나둘 모여들었다.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많아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로 인기다. 청년몰이 문을 여는 시각은 오전 11시. 야시장과 달리 매일 운영한다.

폐교에서 책 짓는 마을로 고창 책마을해리

폐교에서 책 짓는 마을로 고창 책마을해리

폐교에서 책 짓는 마을로 고창 책마을해리

아련한 추억 품은 보수동 책방골목 산책

아이들이 떠난 학교는 오랫동안 외로웠다.

잠들어 있던 학교에 활기를 불어넣은 지 10여 년, 울창한 ‘책숲’이 들어섰고 사람들의 발길이 다시 이어졌다.

폐교에서 책마을로 재탄생한 이곳엔 ‘함께 쓰는’ 수많은 이야기가 종이 위에 새겨지고 있다.

평범하지만 소중한 우리들의 이야기다.

저 멀리 파도 소리 들리고 별들의 세세한 움직임까지 또렷이 보이는 고창의 월봉마을.

1933년, 이 작은 마을에 초등학교가 들어섰다. 나지막한 건물이 세워졌고 아이들에게 친근한 동물상이 교정 곳곳에 놓였다.

많은 학생들이 이 작은 배움터에서 꿈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2001년, 나성초등학교는 문을 닫았다.

서울에서 출판사에 몸담고 있었던 책마을해리의 이대건 촌장은 선친이 세웠던 잠든 학교를 깨워야겠다고 생각했다.

2006년, ‘책마을’을 만들겠다는 꿈으로 폐허가 된 학교를 가꿔나가기 시작했고, 2012년엔 아예 가족과 함께 이곳에 정착했다.

“유럽엔 책마을이 많아요. 오래된 책을 모아둔 전통 있는 곳이죠.

책마을해리는 책이 있는 공간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삶, 이야기를 한 권으로 묶어내는 곳이었으면 해요.

스스로 저자가 되고 실제로 출판이 되는, 그리고 책 속에 쓴 꿈이 마법처럼 이뤄지는 마을이죠.”

삐걱거리는 복도를 다시 깔고, 교실을 말끔하게 단장했으며, 벽에 화사한 그림을 그렸다. 그러곤 차곡차곡 책을 들여놨다.

책마을해리가 생겨나면서 20여 가구가 사는 월봉마을에 활기가 돋아났다.

동네 어르신들은 자식들이 다녔던 학교가 다시 문을 열자 반겼다. 그리고 농사일이 끝나고 나면 이곳에 모였다.

글은 잘 모르지만 농사짓기 박사인 할아버지와 자식 키우기 선수인 할머니들이 각자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놨고, 그것은 소중한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책마을도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었다. 붉은 벽돌을 가득 덮은 담쟁이덩굴이 계절의 운치를 더한다.

책마을해리엔 12만 권의 책이 있다. 방송국과 출판사, 도서관, 개인 등에게 기증 받은 책들이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책이 쌓여 있는 ‘책숲시간의숲(책숲)’엔 묵직한 시간이 흐른다.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나무 서까래와 첩첩이 쌓인 책들의 시간이 묘하게 교차된다.

책숲 옆엔 종이를 만들어볼 수 있는 한지공방이 자리한다.

공방 한가운데 종이로 만든 작은 집에 들어가자 부드러운 공기가 감싸 안는다.

공방 창문 너머엔 닥나무 몇 그루가 자란다. 옆 교실엔 거대한 자태를 뽐내는 활판인쇄기도 있다.

낡아 보이지만 지금도 끄떡없이 돌아가는 인쇄기다.

교실 2칸으로 이루어진 ‘버들눈도서관’엔 수만 권 중에 고르고 고른 그림책과 어린이․청소년 책이 그득하다.

책을 기획하고 글쓰기, 그림 그리기 등을 하는 ‘누리책공방’에선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진다.

마룻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과 한 글자라도 더 익히려는 어르신들의 열정이 넘치는 공간이다.

아련한 추억 품은 보수동 책방골목 산책

아련한 추억 품은 보수동 책방골목 산책

아련한 추억 품은 보수동 책방골목 산책

큰나무집에서 난 큰밥심

부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바로 자갈치와 해운대. 부산과 동시에 떠오르는 이들은 부산을 대표하는 쌍두마차가 아닐까.

먼저 자갈치시장부터 살펴보자. 자갈치시장 지척에 자리한 BIFF(부산국제영화제)광장 그리고 국제시장과 부평시장(깡통시장)은 묶어서 여행하기 좋다.

여기서는 이들을 ‘자갈치권’이라 부르기로 한다. 남포동과 중앙동까지 포함한다.

해운대는 동백섬(APEC누리마루)과 문탠로드를 묶어서 살필 수 있다. ‘해운대권’이다.

이 둘을 잇자면 대중교통으로 1시간이 넘게 필요하다. 동선을 짤 때 참고하는 편이 좋다.

이번 여행의 주무대는 ‘자갈치권’이다. 최종 목적지는 보수동 책방골목.

이름만으로도 추억이 전해진다. 보수동 책방골목에 가려면 자갈치역이나 중앙동역에서 내려야 한다.

이왕 보수동으로 향하는 김에 자갈치역에 내려 ‘자갈치권’ 볼거리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자갈치 시장을 보고 BIFF광장에서 부평동 족발골목을 지나 국제시장과 부평시장(깡통시장)을 양쪽에 품고 북쪽으로 향하면 보수동 책방골목이다. 자, 자갈치역에서 지금부터 출발!

부산 지하철 1호선 자갈치역 4·6·8번으로 나오면 해안을 따라 자갈치 시장이 펼쳐진다. 자갈치라.

덜컥 부산 아지매들의 매콤한 ‘꼼장어’부터 떠오른다. 지금이야 별미로 자리잡은 꼼장어에 스민 애환도 따라온다.

사철 먹을 수 있지만 그 맛이 고소한 봄에서 여름까지를 최고로 친다.

꼼장어의 본명은 먹장어와 목꾀장어다. 부산과 영남지역에서 ‘꼼장어’라 부르던 것이 전국구로 넓혀져 본명보다 더 유명해졌다.

자갈치 시장 한 켠 바다를 따라 꼼장어집들이 몰려있다. 밤바다와 꼼장어를 안주삼아 맛보는 한잔은 부산여행의 백미다.

싱싱한 오징어며 고등어 좌판과 맞은편에 이어진 생선구이집들이 사람들을 반긴다. 짠내에 버무려진 꼼장어 구이 냄새가 제법 매콤하다.

자갈치 시장을 구경하고 BIFF광장으로 향한다. 영화인들의 바디페인팅보다 먼저 반기는 건 이승기의 씨앗 호떡.

부산 별미로 꼽히는 어묵과 보기에도 입안이 얼얼한 떡볶이 등 간식거리들도 가득이다. 부산국제영화제 현장답게 극장들이 제법 많다.

자갈치 시장을 등 뒤에 대고 국제시장으로 향하는 길. 국제지하상가 시작 전 큰 사거리 왼쪽으로 부평동족발골목이 펼쳐진다.

부산 별미 ‘냉채족발’ 여기서 맛보면 되겠다.

다시 국제지하상가 시작 전 사거리로 돌아오자. 바다를 등에 대고 북쪽으로 직진한다. 왼쪽으로 부평시장, 오른편으로 국제시장이다.

자갈치 시장을 중심으로 뻗은 좌청룡 우백호 같다. 부평시장에서 유부보따리며 호박죽으로 속을 채우고 국제시장에서는 쇼핑을 즐겨보자.

국제시장 끝자락 국민은행 사거리에서 큰길을 건너면 왼쪽으로 보수동 책방골목이 시작된다.

보수동 책방골목임을 알리는 안내판과 함께 구불구불 좁은 골목이 펼쳐진다.

방금 전까지 속해있던 시끌벅적한 시장골목과는 다른 냄새다. 골목을 따라 양옆으로 빼곡하게 쌓인 책들이 정겹다.

언젠가 누군가의 가슴 한켠을 차지했을 손때 묻은 책들에 그들의 학창시절이 더해진다.

보수동 책방골목에 대해 알고 싶다면 <동아서적> 맞은편에 자리한 보수동책방골목 문화관부터 들러보자.

층마다 보수동 책방골목의 추억들을 소개하고 있다. 북카페도 있으니 잠시 쉬어가도 좋겠다.

주말(금~일) 오전10시부터 오후4시까지는 문화해설사들에게 보수동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6·25전쟁으로 임시 수도가 된 부산은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민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주로 지금껏 살펴 본 자갈치 시장, 부평시장, 국제시장 등의 시장통 자락에 정착했다.

지금도 볼 수 있는 자갈치시장의 난전에서 옛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곳 보수동 사거리 골목에 처음 자리를 잡은 <구 보문서점>의 손정린 부부도 그랬다.

전쟁통 북에서 피난 온 부부는 보수동 골목에 박스를 깔고 미군부대에서 나온 헌잡지와 만화, 고물상으로부터 모은 갖가지 헌책 등으로 노점을 열었다.

이것이 보수동 책방골목의 시작이었다.

큰나무집에서 난 큰밥심

큰나무집에서 난 큰밥심

큰나무집에서 난 큰밥심

대한민국 근대사의 중심지 대구

점심시간, 도시인은 바쁘다. 음식점으로 느긋하게 걷지 않는다.

사람이 몰리기 전에 들어가고 싶은 것이다. 행여나 줄을 서야 되면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워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가까운 옆집 또는 그 옆집으로 들어간다.

음식이 나오기 무섭게 입으로 가져가는 사람들. 씹는 둥 마는 둥 넘겨대는 통에 입안은 빌 새가 없다.

이렇게 급하게 먹으니 음식의 양념, 센 맛, 자극적인 맛만 남는다.

음식 재료의 각 고유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최소한의 씹음, 음미할 시간이 부족한 바쁜 도시인의 식습관 때문이다.

기분 좋은, 몸에 좋은, 맛있는 여행을 하러 대구 달성군 가창면으로 향했다.

대구 신천대로를 통해 도심을 통과. 달성군으로 넘어가면서 하나 둘 자연의 모습이 늘어간다.

논과 밭, 작은 냇가와 동산, 드문드문한 거리를 사이에 둔 레스토랑과 휴양지 등 도심 외곽의 풍경이다.

곧 가창면에 이르고 ‘우록리 방면’ 안내판을 따라 샛길로 접어든다.

목적지인 큰나무집(대표. 조갑연)이 가깝다. 이 음식점은 ‘궁중백숙’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최근 내놓은 ‘사찰밥상’으로 또 다른 관심을 받고 있다.

템플스테이를 찾는 이가 늘고, 육류를 제외한 식단의 장점이 전문가를 통해 전해지면서 사찰음식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증가하는 추세다.

일반적으로 사찰음식이라 하면, 스님이 먹는 음식으로 고기, 오신채(마늘, 파, 부추, 달래, 무릇)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이 즐겨 먹기에는 다소 밋밋하고, 무언가 허전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에 사찰음식의 좋은 점을 반영하면서 대중적으로 친숙한 음식을 지자체와 식당이 함께 만드는 시도가 여럿 보인다.

그 결과물 또한 드러나는 가운데, 큰나무집의 주인장 조갑연 씨는 “자극적인 양념과 육류를 과도하게 즐기는 풍토에서 벗어나

좀 더 몸에 좋고 맛도 좋은 음식을 만들고 내어드릴 수 있어서 선뜻 참여했다”라며 사찰밥상을 만들게 된 계기를 전했다.

조 씨의 밥에 관한 철학은 확고하다. 그녀는 사찰음식을 다루기 전에 밥부터 이야기해야 된다며 운을 띄웠다.

“한국인 힘은 밥에서 나오는 거 아니겠어요. 밥심이라는 말도 그렇고요.

이렇게 중요한 밥을 편하게, 자주 먹는 곳이 집이니까 손님이 편하게,

부담 없이 들려서 먹을 수 있는 밥상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이어서 조 씨는 “‘친정집에서 먹는 밥’처럼 정성 가득한, 편하게 식사할 수 있는 밥상을 대접하고 싶어요” 그렇다.

어머니가 차린 밥상은 어떤 밥상도 대신할 수 없는 것. 그런 밥상을 염두하며 구상한 밥상 위에 사찰음식의 좋은 점을

살린 조 씨만의 특별함이 큰나무집의 ‘사찰밥상’인 것이다. “배고플텐데 인터뷰는 일단 드시고 더 하시죠”라며 대답할 여지도 없이 자리를 비켜준다.

상다리가 부러져라 나오는 한정식 자리에서 첫 느낌은 푸짐함이지만 쉽게 젓가락 갈 길이 보이지 않았던 어색함.

구성과 양에서 균형을 잡지 못한 코스형 한정식은 후반부로 갈수록 먹는 자체가 곤욕이다.

불편했던 한정식과 달리 사찰밥상은 적당한 반찬 가짓수와 먼저 먹기 좋은, 나중에 먹기 좋은 반찬으로 구분이 쉽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고 예쁜 그릇에 반찬이 예쁘게 담겼다.

큰나무집에서 가장 먼저 별미로 떠올랐다는 호박죽. 손수 호박을 손질해 만들어 풍미가 깊다.

손이 많이 가지만 ‘우리 집 자랑을 만든다’ 생각하면 이처럼 보람있는 요리도 없다고 한다.

찰진 달달함이 입속을 가득 채운 후 식도를 지나면서 단숨에 입맛을 끌어올린다. 호박잎, 양배추, 케일 등 쌈

꺼리가 여럿 준비돼 있어 취향에 따라 손에 한 잎 놓고 밥을 반 숟가락 얹는다.

그 위에 청국장의 두부와 강된장 약간 덜어 쌈을 완성, 한입에 우물우물 씹으니 특별할 것 없는 친숙한 그 맛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기 대신 버섯을 많이 넣은 잡채를 크게 한 젓가락 집어 씹는데 고기가 없다는

허전함보다 쫄깃한 버섯의 식감이 맛을 더하고 간도 밋밋한 기별이 없으니, 잡채에 고기가 없어도 괜찮구나 싶다.

대한민국 근대사의 중심지 대구

대한민국 근대사의 중심지 대구

대한민국 근대사의 중심지 대구

마음마저 덥히는 대구의 소문난 고깃집을 찾아서

대구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중심도시이다.

6학년 1학기 2단원 ‘근대 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과 민족 운동’ 과 관련하여 일제강점기의 살아있는 역사체험여행을 떠나보자.

1900년 초 일제는 한국을 경제적으로 파탄시켜 한국경제를 일제에 예속시키기 위해 강력한 차관정책을 썼다.

1907년 한국이 일제에 진 외채만 1300여만원, 더 이상 외채상환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대구를 중심으로 나라의 빚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일어났다.

이 국채보상운동의 중심도시가 바로 대구다.

대구는 이렇게 한국 근대 역사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해냈으며 지금도 그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대구의 골목 구석구석에 남아있다.

생생했던 당시 함성과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 같은 대구 근대 골목투어의 출발점 동산 청라언덕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선교사 챔니스 주택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에는 근대 시대를 살다간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주택이 그대로 보존되어 지금은 의료, 선교박물관으로 일반인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선교사 챔니스 주택은 당시 서양식 건축물의 낭만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일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우리의 근대문화유산이다.

동산의료원 옆 제일교회와 선교사 주택 사이로 난 90여개의 계단이 바로 3.1 만세운동길이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계단이지만 1919년 우리나라에서 일제의 무단통치에 항거하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당시

대구의 학생들과 시민들은 이 계단을 통해 태극기를 흔들며 대구 시내로 쏟아져 내려왔다.

당시 생생했던 현장을 증언이라도 하듯이 계단 양쪽 벽으로 가득 당시의 사진과 글들이 전시되어있다.

한 장 한 장 역사책 읽어 내려가듯 소중하게 읽어 내려오면 서문시장으로 통하는 길이 나오며 계산성당과 마주하게 된다.

계산성당은 1902년에 건축된 우리나라에서 세번째로 오래된 고딕 양식의 건축물입니다.

1886년 로베트 신부가 경상도 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하던 중 현재 계산성당 자리에 초가집을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게 되며 계산성당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목조건물로 시작했으나 불에 타게되어 1902년 지금과 같은 고딕양식의 성당으로 다시 그 모습을 바꿨습니다.

계산성당은 대구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서양식 건축물임과 동시에 대구에서 유일한 1900년대 성당 건축물이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저항시인 이상화의 시 한편을 대구의 어느 쌀쌀한 겨울 골목길 끝에서 만난다.

풋내 나는 살지고 부드러운 흙, 땀내나는 우리의 땅을 그는 상처 입은 다리로 절둑거리며 끝끝내 걸어가고 있다.

꿈결 속에 만난 듯한 다정한 이웃들, 지금은 빼앗긴 들이지만 봄을 기다리는 시인의 마음이 그대로 읽혀져 아름다웠던 그의 발자취를 느끼러 골목을 돌아간다.

골목 어귀에는 그의 명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가 빼곡하게 벽화로 적혀있다.

그리고 그가 생전에 살았던 아름다운 작은 집을 골목 어귀에서 만날 수 있다.

이상화 고택에 사용된 고벽돌 담장은 당시 근대의 분위기를 잘 살리기 위해 KT&G 측으로부터 일부를 기증받아 복원하였다.

집안에는 그의 생전 유품과 사진들이 정갈하게 전시되어있어 시인 이상화의 흔적을 느껴볼 수 있다.

이상화 고택 바로 이웃해서 자리잡고 있는 고택은 국채보상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고 서상돈의 고택이다.

뽕나무 골목 설화의 주인공 두사충은 중국 두릉 사람이다.

그는 시인 두보의 21대손으로 임진왜란 때 귀화하여 지금의 대구 계산성당 인근 지역에서 살았다.

당시 두사충은 조선의 열악한 의복문제를 해결하는데 관심이 많아 집근처에 뽕나무를 많이 길렀다고 한다.

어느 날 뽕나무잎을 따던 두사충은 이웃집에서 절구를 찧던 아름다운 아낙에게 마음을 빼앗겨 매일 넋이 나간 듯 담장 위에 올라갔다.

아들을 안쓰럽게 여긴 두사충의 아버지는 미모의 아낙을 찾아가 중매를 넣었는데, 마침 미모의 아낙은 남편을 잃고 홀로사는 처지여서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 뽕나무 골목은 그 많던 뽕나무는 모두 사라지고 담장 벽화 한 장으로 두사충과 아낙의 사랑이야기가 남아있을 뿐이다.

마음마저 덥히는 대구의 소문난 고깃집을 찾아서

마음마저 덥히는 대구의 소문난 고깃집을 찾아서

마음마저 덥히는 대구의 소문난 고깃집을 찾아서

신나는 겨울 놀이와 백제 역사를 아우르는 체험 여행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따끈한 불맛이 그리워진다. 옹기종기 불 앞에 모여앉아 고기가 익어가는 동안 이야기꽃을 피운다.

때론 혼자여도 상관없다. 불향 밴 고기 한 점 입안에서 살살 녹으면 언 마음이 사르르 풀린다.

반세기를 이어오는 원조 맛집부터 최근 입소문을 타고 있는 이색 맛집까지, 대구의 추위를 녹이는 불맛 좋은 고깃집을 찾았다.

고기냄새 밴 윗도리를 걸치고 문을 나서면 추위는 저만치 사라지고 얼굴마다 훈훈한 미소가 번진다.

반세기를 지켜온 연탄석쇠불고기의 매력, 단골식당

대구 칠성시장에 가면 50년째 맛의 내공을 이어오는 집이 있다. 연탄석쇠불고기 원조 ‘단골식당’이다.

시장 안 족발골목에 들어서면 집 앞에 활활 타오르는 불꽃만 보고도 단박에 이 집을 찾을 수 있다.

1960년대에 대여섯 식당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시작했던 연탄석쇠불고기는 하나둘씩 문을 닫고 이제 단골식당만이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아담한 식당 안에 들어서면 자리에 앉기도 전부터 고소한 냄새에 군침이 돈다.

메뉴는 오직 석쇠돼지불고기정식뿐. 입구에 있는 연탄 화덕에서 불꽃쇼가 벌어지고 나면 시골 논두렁에 새참을 내오듯 둥근 쟁반 밥상이 대령한다.

김치에 상추겉절이, 깻잎과 풋고추 그리고 된장국이 전부이지만 시골 외할머니 밥상처럼 정겹다.

밥상의 주인공 석쇠불고기는 1인분에 200g이지만 눈대중과 인심으로 담아내 양이 넉넉하다.

고기부터 한 점 입에 넣으면 불향이 입안 가득 퍼지고 고소한 육즙이 혀를 촉촉하게 감싼다.

살살 녹아 부드럽게 넘어가는 고기 맛에 행복한 기운이 온몸에 퍼진다.

고기 맛의 비법을 묻자 주인 할머니는 그저 고기가 좋으면 다 맛있다고 한다.

특별 양념을 쓰냐니까 손사래를 친다. 양념이라고 해봐야 50년 전 시작할 때 양념 그대로라고.

그저 간장, 소금, 고춧가루, 설탕, 참기름, 마늘 등 여남은 가지 기본 양념이 전부다.

큰 재래시장 안에 자리 잡고 있으니 좋은 재료를 마음껏 살 수 있다는 게 비법 아닌 비법이다.

석쇠불고기의 맛과 향은 역시 연탄 화력에 달렸다. 적당한 화력에 석쇠를 알맞게 돌려가며 고기를 익히는 실력이야말로 50년 세월에 단련된 살아 있는 노하우다.

불꽃이 일 때마다 기름기가 빠지고 고소한 육즙은 살려낸다.

적절히 밴 연탄불 향이 더해져 입맛과 함께 기운까지 돋궈준다. 영업시간 08:00~22:00. 매월 둘째․넷째 수요일 휴무. 석쇠돼지불고기정식 6,000원.

대구 시내 가장 핫한 거리인 동성로 삼덕소방소 맞은편에 청사초롱이 걸린 3층짜리 건물이 있다.

‘경성상회’라는 이름처럼 100년 세월을 되돌려 일제강점기 경성에 와 있는 듯한 분위기다.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고종 황제가 입었던 곤룡포와 명성황후가 입었던 적의를 똑같이 만들어

전시해놓았을 뿐만 아니라 한옥의 들창과 탈 등 다양한 전통 인테리어가 예스러운 멋을 자아낸다.

28년째 외식사업을 하는 손관우 대표가 자신 있게 선보이는 경성갈비는 화학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고 전통의 불고기 양념 맛을 재현한다.

양념은 일주일 전에 미리 만들어 숙성을 시켜놓고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 고기에 버무려낸다.

양념에 미리 숙성시킨 고기는 식감이 떨어진다는 단점을 보완해서 경성갈비만의 맛을 탄생시켰다.

비록 미국산이지만 초이스급 이상의 고기만을 들여와 정성껏 만든 양념으로 맛을 내 저렴하게 판매한다.

부드러운 갈빗살과 맛깔스런 양념에 은은한 숯불 향이 더해진 고기 맛에 반해 지글지글 고기 굽는 손길이 바빠진다.

강원도 재래 방식으로 키운 촌돼지만을 취급해 삼겹살을 찾는 손님도 많다.

삼겹살 불판에 함께 나오는 치즈달걀과 간장떡볶이도 삼겹살 인기몰이에 한몫을 하는 조연들이다.

무와 꽃게 육수로 끓인 된장찌개와 음료는 무한 리필이다.

몇 그램(g)이 아니라 몇 근으로 파는 것은 양을 속이지 않는 전통의 상도까지 지키겠다는 경성상회의 양심이다.

영업시간 17:00~05:00. 연중무휴. 경성갈비 반근 1만 6,000원, 삼겹살 반근 1만 6,000원.

신나는 겨울 놀이와 백제 역사를 아우르는 체험 여행

신나는 겨울 놀이와 백제 역사를 아우르는 체험 여행

신나는 겨울 놀이와 백제 역사를 아우르는 체험 여행

예산의 자랑 숯불에 구운 전통 소갈비와 삽다리 곱창

보령과 공주, 아산은 닮은 점이 없지만, 서로 없는 것을 보완해주는 여행지다.

신나는 레저 스포츠와 겨울에 즐길 수 있는 계절 놀이가 많아, 겨울방학 체험 여행지로 제격이다.

겨울 놀이로 가족이 하나 되는 보령, 백제의 역사를 현장에서 생생하게 배우는 공주,

옛 모습을 간직한 시골 마을에서 민속놀이와 풍습을 체험해보는 아산까지 여행 내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1일차> 보령

10:00 한화리조트 대천파로스 박물관은 살아있다

12:00 점심 식사

13:00 대천 짚트랙

14:00 대천해변 & 보령야외스케이트장

16:00 호텔마스타대천

18:00 저녁 식사 및 숙박

<2일차> 공주

10:00 국립공주박물관

11:30 공주한옥마을

12:30 점심 식사

13:30 무령왕릉

15:00 공산성

16:00 계룡산자연사박물관

18:00 저녁 식사 및 숙박

<3일차> 아산

10:00 외암민속마을

12:00 점심 식사

13:00 온양온천

15:00 귀가

보령 여행의 핵심은 겨울바다의 멋이 살아있는 대천해변이지만 아침부터 바닷바람을 맞는 건 피하는 게 좋다.

한화리조트 대천파로스 내부에 자리한 트릭아트미술관 <박물관은 살아 있다(Alive Museum)>는 회화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도 흥미롭게 관람할 수 있다.

착시를 이용한 전시는 페인팅 아트, 디지털 아트, 오브제 아트 영역으로 구성된다.

그림 속 공룡이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 같이 생생하고, 명화 속 모나리자가 유혹하는가 하면,

낭떠러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듯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다. 몸과 다리가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신체 분리 포토 존은 깜짝 놀랄 정도로 그럴듯하다.

주소 : 보령시 해수욕장3길 11-10

문의 : 041-930-8590

이용 시간 : 09:00~19:00

휴무 : 연중무휴

이용료 : 어른 9000원, 청소년 8000원, 어린이 7000원

할인 정보 : 어른 9,000→6,300, 청소년 8,000→5,600, 어린이 7,000→4,900, 중복 할인 불가

대천파로스에서 몸을 충분히 따뜻하게 만들었다면 다음은 시원하게 바다를 활강할 차례다.

대천 짚트랙은 새처럼 날고 싶다는 인간의 오랜 꿈이 현실이 되는 곳이다.

숲이나 강, 호수 위에 설치된 짚트랙은 많지만, 바다 위를 새처럼 날아가는 짚트랙은 국내에 몇 군데 없다.

짚트랙을 타려면 높이 52m 타워에 올라가야 한다. 안전 장비를 갖추고 와이어에 고리를 건 다음 613m를 날아간다.

와이어가 총 4개 있어 4명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다. 출발 신호와 함께 도착점을 향해 재빨리 하강한다.

얼굴에 와서 부딪히는 바닷바람이 상쾌하다. 추운 날에는 마스크나 머플러 등 보온에 신경 써야 한다. 타워에 설치된 전망대에서는 투명한 유리 바닥으로 보이는 풍경이 아찔하다.

대천 짚트랙에서 대천해수욕장의 중심 머드광장은 900m 거리로 가깝다.

머드광장에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빙판을 마련해 보령야외스케이트장으로 운영한다. 짚트랙을 즐기고 곧장 머드광장으로 향한다.

이용료는 없고 스케이트 장비만 대여하면 된다. 스케이트를 처음 타는 사람도 엉덩방아를 몇 번 찧고 나면 요령이 생겨 재미를 붙인다.

아이들이나 활동적인 여행객은 스케이트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둘만의 추억을 쌓으려고 대천해변을 찾아온 커플은 겨울 바다에서 사랑을 속삭인다.

대천해변은 백사장이 폭 100m, 길이 3.5km에 이르는 서해안 최대 해변이다. 경사가 완만하고 모래가 깨끗해서 오래전 해수욕장으로 개발되었다.

해변에 활어회, 생선구이, 조개구이, 해물탕, 바지락칼국수 등 맛있는 식당과 분위기 있는 카페가 즐비하다.

예산의 자랑 숯불에 구운 전통 소갈비와 삽다리 곱창

예산의 자랑 숯불에 구운 전통 소갈비와 삽다리 곱창

예산의 자랑 숯불에 구운 전통 소갈비와 삽다리 곱창

인천 앞바다 한눈에 쏙 소무의도 무의바다누리길

잘 구워진 갈비 한 점을 젓가락으로 드니 참숯 특유의 향이 침샘을 자극하고, 윤기 흐르는 도톰한 고기를 씹는 순간 부드러운 식감과 달콤한 양념 맛에 기분까지 좋아진다.

‘광시한우’라는 명품 한우 브랜드로 유명한 예산에는 이처럼 양념에 잰 한우 암소 갈비를 숯불에 구워 한입 크기로 잘라 내오는 전통 소갈비구이가 있다.

전통 소갈비구이란 무엇인가. 요즘은 생등심이나 생갈비 등 생고기 구이가 각광받지만,

원래 우리 육류 구이 식문화의 주류는 너비아니나 갈비구이, 제육구이 같은 각종 양념 구이였다.

19세기 말의 조리서 《시의전서(是議全書)》에도 양념해서 구워 먹는 ‘가리구이’라는 음식이 등장하는데, 오늘날의 갈비구이다.

가깝게는 1945년이 시초라고 알려진 수원갈비를 비롯해 포천의 이동갈비와 해운대갈비, 1980년대 대형 ‘가든’과 ‘공원’들의 주력 메뉴도 양념 소갈비구이였다.

갈비 양념은 간혹 소금을 쓰기도 하나, 대개 간장을 기본으로 깨소금과 후추, 파, 마늘, 참기름, 설탕 등이 쓰였다.

상 위에 숯불이나 가스 불을 놓고 직접 구워 먹도록 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예산군청 부근에서 30년 가까이 소갈비를 구워온 ‘삼우갈비’는 옛날식 갈비구이의 명가로 손꼽힌다.

오랜 세월 지켜온 손맛 덕에 전국구 맛집으로 꽤 알려졌지만, 지금도 외지 사람보다 지역민들에게 사랑받는다.

맛있는 갈비구이를 만들기 위한 첫째 조건은 당연히 좋은 재료다.

삼우갈비 2대 사장 박유진 씨는 매주 질 좋은 한우 암소 갈비를 들여와 손질과 양념은 물론, 굽는 작업까지 직접 챙긴다.

일주일 치가 대략 24짝, 소 한 마리의 갈비가 좌우 2짝이니 총 12마리 분량이다.

기름을 제거하고 토막 낸 뒤 뼈에 있는 살을 너붓하게 펴서 촘촘히 칼집을 내는 데 꼬박 하루가 걸린다.

갈비 주변에 붙은 다른 부위도 잘 손질해서 양념에 같이 잰다. 그중 1~4번 갈비를 덮은 살치는 등심으로 분류되는 부위로, 눈꽃 같은 마블링이 예술이다.

소 한 마리에서 1~1.5kg 나오는 안창살도 예외가 없단다.

이렇게 손질한 갈비를 양념에 재어 급속 냉동하고, 필요한 양만큼 꺼내 사나흘 동안 해동과 숙성 과정을 거치면 부드러운 고기를 얻을 수 있다.

재료가 좋아도 굽는 기술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

주문이 들어오면 참숯 피운 석쇠에 갈비를 길게 펼쳐 한쪽 면을 굽고, 재빨리 뒤집어 반대쪽도 굽는다.

양쪽이 적당히 익으면 한입 크기로 잘라서 타거나 덜 익은 부분이 없도록 집게로 골고루 굴려준다.

손님상에 나갈 때는 구운 갈비를 데워둔 접시에 담고 시원한 동치미, 배춧속과 고추장, 깍두기, 어리굴젓, 설렁탕 국물 등과 함께 낸다.

구워 나오니 번거롭지 않아 좋고, 1인분도 주문이 가능하니 야박하지 않아 더욱 좋다.

진하고 구수한 갈비구이도 좋지만 갈비탕도 맛있다.

놋그릇 한가득 담겨 나오는 갈비탕은 특히 점심시간에 많이 팔리는데, 늦게 가면 맛보기도 힘들다.

인천 앞바다 한눈에 쏙 소무의도 무의바다누리길

인천 앞바다 한눈에 쏙 소무의도 무의바다누리길

인천 앞바다 한눈에 쏙 소무의도 무의바다누리길

달을 품은 산 왕의 길 을 받들다 경주 함월산 왕의 길

가을, 호젓한 섬길 한번 걸어보자. 통통배만 오갈 뿐 차도 다니지 않는 섬 해변길 말이다.

무의도는 드라마 촬영지와 하나개해변, 호룡곡산 등으로 명성을 떨친 지 오래지만 동생 섬인 소무의도가 입소문이 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무의도 샘꾸미포구에서 소무의도까지 구름다리가 놓이고 무의바다누리길이 조성되면서 찾는 이의 발길이 늘고 있다.

주말이면 무의도 가는 길이 꽤 편리해졌다.

예전에는 두세 차례 버스를 갈아타고 오갔지만 요즘은 인천공항철도가 주말마다 용유임시역까지 연결된다.

기차역에 내리면 무의도행 배가 출발하는 잠진도선착장까지 바다를 옆에 두고 걸어서 닿을 수 있다.

잠진도선착장에서 배를 타면 무의도까지 5분 남짓.

배는 20~30분마다 다니고, 섬 안에서는 뱃시간에 맞춰 버스들이 수시로 오가니 굳이 승용차를 몰고 섬 안에 들어설 필요가 없다.

사실 한적한 어촌마을 풍경을 보러 떠나는데 승용차가 넘쳐나는 것만큼 볼썽사나운 것도 없다.

무의도선착장에서 미니버스를 타면 섬을 가로질러 반대편 광명항까지 덜컹거리며 달린다.

호젓한 섬을 걷는 소무의도 여행은 버스 뒷자리에 앉아 차창을 열고 심호흡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제법 가파른 언덕을 넘어선 버스가 자맥질하듯 고꾸라지면 무의도의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광명항보다는 주민들에게 샘꾸미마을로 익숙한 포구가 드러나고, 포구 건너에 소무의도가 웅크리고 있다.

예전 무의도와 소무의도를 연결하는 방법은 배편이 유일했다.

소무의도 서쪽마을과 동쪽마을은 산으로 가로막혀 산길을 걸어 넘거나 고깃배로 오가야 했다.

샘꾸미에서 소무의도 서쪽마을을 잇는 구름다리가 들어서고 섬을 일주하는 무의바다누리길이 조성되면서 섬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소무의도의 다른 이름은 ‘떼무리’다. 인도교와 연결되는 서쪽마을 선착장 이름도 떼무리선착장으로 불린다.

해안선 길이가 2.5km인 아담한 섬의 역사는 3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씨 가족이 세 딸과 함께 들어와 섬을 개척했고, 유씨 청년을 데릴사위로 삼으면서 유씨 집성촌이 형성됐다고 한다.

인근에서는 새우 등이 많이 잡혔고, 한때는 안강망 어선이 40여 척이나 될 정도로 부유했던 섬이다.

소무의도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군 병참기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섬 안에는 풍어제를 올렸던 터가 남아 있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가족과 함께 휴양차 들렀다는 해변도 있다.

섬 주변은 간조 때면 해변길을 드러낸다. 낚시꾼이나 찾을 줄 알았던 외딴 섬이 품은 사연이 이렇듯 구구절절하다.

414m 인도교를 넘어 들면서부터 나무 데크로 만들어진 무의바다누리길의 윤곽이 드러난다.

무의바다누리길은 총 8개 구간으로 나뉜다. 섬을 오롯이 일주하는 데는 1시간이면 족하다.

낚싯대를 가져왔으면 중간에 포구마을에서 낚시를 즐겨도 좋고, 소담스런 해변에 앉아 도시락을 맛봐도 좋다.

인도교와 서쪽마을을 거치면 떼무리길로 연결된다. 소무의도의 자연생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길은 당산으로 연결된다.

부처깨미길은 만선과 안전을 기원하며 풍어제를 지냈던 곳으로 주변 조망이 빼어나다.

부처깨미길을 넘어서면 몽여해변길로 이어진다.

분주해진 서쪽마을과는 다르게 소박한 포구와 몽여해수욕장의 해변 정취를 음미할 수 있는 길이다.

이곳에서 낚시를 할 수 있는데 소무의도 일대는 우럭, 농어, 놀래미 등이 많이 잡히는 낚시꾼들의 숨겨진 포인트다.

250m로 아담한 규모인 몽여해수욕장은 모래와 하얀 굴껍데기, 몽돌로 이뤄진 해변이다.

몽여해변에서 언덕을 하나 넘으면 명사의 해변으로 연결된다.

이 해변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가족과 함께 휴양을 즐겼다는 고즈넉한 곳이다.

소무의도 남쪽의 해녀섬길은 바다 건너 해녀섬을 조망하는 길로, 능선을 따라 늘어선 기암절벽을 감상할 수 있다.

명사의 해변길과 해녀섬길 아래는 간조 때 물이 빠지면 장군바위까지 해안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장군바위에는 해적들이 바위 모양을 보고 장군과 병사들로 착각해 도발하지 못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달을 품은 산 왕의 길 을 받들다 경주 함월산 왕의 길

달을 품은 산 왕의 길 을 받들다 경주 함월산 왕의 길

달을 품은 산 왕의 길 을 받들다 경주 함월산 왕의 길

충주호 벚꽃 터널과 수안보 벚꽃길 산책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장례 행렬이 이어지던 길,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의 수중릉으로 행차하던 길,

지금은 그 길을 따르는 뭇 후손들이 더위를 식히고 역사를 기억하는 길, ‘왕의 길’에서 두 발로 뚜벅뚜벅 옛길을 더듬는다.

그 자체가 하나의 노천 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경주에는 다 헤아리기도 벅찰 만큼 수많은 신라시대 유적과 유물이 있다.

그래서 경주는 갈 때마다 새롭고, 하루 이틀 혹은 며칠간의 여행으로는 도저히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곳이다.

보름달이 뜰 때는 달빛기행을 하고, 별이 밝은 날엔 별빛기행을 하며 밤에도 무궁무진한 고도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그런 경주에 최근 새로운 길 하나가 추가됐다. 추령터널과 기림사를 잇는 왕의 길이다.

함월산 아랫자락을 잇는 편도 3.9km의 걷기 좋은 숲길이다.

깊이 숨겨진 보물같이 아직은 제 모습을 세상에 널리 드러내지 못했지만 그래서 더 고즈넉하고 아늑하다.

경주 시내를 벗어나 감포 방향으로 가다 보면 함월산 자락에 추령터널이 있다.

이 추령터널 옆으로 왕의 길로 가는 진입로가 나 있다.

길은 처음부터 제 모습을 호락호락 보여주지 않는다.

진입로를 따라 2.5km의 시골길을 40~50분은 걸어야 왕의 길 초입인 모차골 입구에 닿는다.

좋은 길도 좋은 사람처럼 처음부터 그 깊은 속내를 훤히 다 드러내지 않는 법. 깊은 숲을 만나기 위해선 약간의 준비가 필요하다.

추령터널에서 모차골까지 가는 길도 숲길은 아니지만 꽤 한적하게 고만고만 걸을 만한 길이다.

걷다 보면 모차골 조금 못 미쳐 황용약수를 만나게 된다.

철분 함량이 높아 물이 떨어지는 곳의 돌들이 누렇게 변색될 만큼 몸에 좋은 물이다. 이 약수로 목을 축이면 한여름 갈증이 싹 달아난다.

약수 한 사발 들이켜고 나면 어느새 모차골에 닿는다.

모차골은 마차가 다니던 곳이라 하여 ‘마차골’로 불리다가 모차골이 되었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왕의 길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이 길은 왜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신문왕은 신라 31대 임금으로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맏아들이다.

삼국통일 이후 정세를 안정시키고 강력한 전제왕권을 확립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681년 아버지인 문무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을 당시 신라는 겉으로는 평온한 듯 보였지만

안으로는 통일 후의 긴장과 귀족들과의 갈등으로 고군분투하던 시절이었다.

《삼국사기》에 전하길, “근자에 와서 도의가 사라진 상태에서 왕위에 있다 보니 정의가 하늘의 뜻과 달라,

천문에 괴변이 나타나고 해와 별은 빛을 잃어가니 무섭고 두려움이 마치 깊은 못이나 계곡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신문왕이 종묘에 제사를 지내며 조상들에게 바친 제문의 내용이다.

그만큼 통일 직후였던 당시는 귀족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고 외부와의 전쟁 위험도 있어 나라를 다스리기에 어려운 시기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문왕은 즉위 다음해인 682년에 아버지 문무왕의 수중릉이 있는 동해바다에 갔다가 용을 만나

만파식적과 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얻었다. 대나무로 만든 피리인 만파식적을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가 올 때는 날이 개는 등 신비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만큼 나라의 평화와 안녕이 절실했다.

만파식적은 신문왕의 왕권 강화와 정세 안정을 위해 만들어진 설화였을 테다.

그러니까 이 길은 신문왕이 마차를 타고 아버지 문무왕의 묘를 찾아가는 길이자 나라를 구원할 힘을 얻은 길이다.

또 이보다 앞서 문무왕의 장례 행렬이 지나간 길이기도 하다. 처음엔 신문왕길 혹은 신문왕 호국행차길이라 불리다가

현재는 공식적으로 왕의 길로 불리고 있다. 비단 신문왕만 다니지는 않았을 테고,

여러 왕들이 동해로 행차하며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이라는 추측에 따른 것이다.

초입에서 숲길은 야생미가 넘쳐흐른다. 아이 키만 한 개망초가 길을 수놓고 옆으로 흐르는 계곡은 끊임없이 길을 따라온다.

작은 계곡을 건너는 일만도 수십 번이다. 한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숲은 온갖 식물과 갖가지 곤충,

개구리같이 작은 동물들을 무수히 키워내고 있다. 높은 나무에서 매미가 울어대고, 계곡은 졸졸졸 마르지 않고 흐른다.

가는 길은 내내 이런 풍경이다. 온갖 나무와 식물이 한여름에도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숲에 폭 안기는 느낌이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에도 이 길에 들어서면 시원하다. 삼림욕이 거저다.

길은 초입에는 사람 하나 지나다닐 만한 오솔길이었다가 이내 마차와 수레가 지나다녔을 만큼 널찍해진다.

걷다 보면 다양한 이정표를 만난다. 수레가 넘어 다녔다는 수렛재, 급한 경사에서 수레를 끌던 말들이 굴렀다는 말구부리,

신문왕이 잠시 손을 씻으며 쉬어 갔다는 세수방,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한 불령봉표를 거쳐 가며 옛길을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