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큰 자랑 선비 정신
대구의 큰 자랑 선비 정신
조선 시대 성리학을 이끈 다섯 명의 대가를 가리켜 ‘조선오현(朝鮮五賢)’이라 부른다.
김굉필(1454~1504)은 영남학파 종조(宗祖) 김종직의 제자이자 사림파 영수(領袖) 조광조의 스승으로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이황도 그의 학문을 논하며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고 칭송할 정도다.
그러한 대학자가 남긴 선비 정신을 찾아 떠나는 길. 목적지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대니산 자락이 강을 향해 자세를 낮춘 곳에 있는 도동서원이다.
낙동강을 따라 달성군 현풍면에서 구지면으로 향하다 보면 ‘다람재’라는 작은 고개가 나온다.
이곳에 오르면 잠시 여행의 속도를 늦추게 된다.
산을 따라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낙동강이 여러 산줄기와 어우러져 절경을 자아내고 있는 것.
아름다운 경치에 빠져 있노라니 산자락의 경사면을 따라 정갈하게 건축된 서원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김굉필의 학문과 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도동서원이다.
어린 시절을 대니산 자락 동쪽의 솔례촌(현 달성군 대리)에서 보낸 김굉필은 18세에 장가들며 처가가 있던 합천군에서 생활했다.
당시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의 수제자로 들어가며 조선 성리학의 맥을 잊게 되었다.
이후 26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시절인 1498년에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단이 되어 발생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평안도 회천으로 귀양을 떠났다.
이후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사약을 받았다. 비록 그는 정쟁에 휘말려 역사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유배 당시 양성한 후학들에 의하여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대표적인 제자가 바로 조광조이다.
이처럼 성리학의 큰 줄기를 이어받아 죽을 때까지 후학 양성과 유학의 본질을 세상에 전하기에 헌신했던 사람.
그가 유학자로서의 본분을 다한 데에는 성리학의 기본이라 일컫는 《소학》에 심취했기 때문이라 한다.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칭할 정도였다.
대학자가 걸어온 역사의 흔적을 되새기며 서원 앞에 다다랐다.
문루인 수월루 앞에 도착하니 땅을 향해 가지를 늘어트린 커다란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도동서원이 사액된 것을 기념하여 김굉필의 외 증손인 한강 정구가 식수한 것으로 수령이 400년을 헤아린다.
잠시 나무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노라니 문화해설사가 다가와 설명을 곁들인다.
“이 은행나무는 김굉필 선생을 닮았습니다. 자세히 보면 나무 안에서 다른 나무 여럿을 키우고 있거든요.
스스로 터전이 되어 후학을 양성한 선생을 닮았잖아요.”
과연 커다란 줄기 안에서 서로 다른 나뭇가지가 보인다. 해설사의 설명이 이어진다.
“이 나무의 영험함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40년 전에 태풍이 불어 8톤 트럭 두 대 분량의 가지가 잘려나갔습니다. 당시 며칠간 나무가 소리 내며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평소 나무 밑은 아이들의 놀이터였는데, 아무도 다친 이가 없었고요. 서원에 깃든 남다른 기운이 나무에도 서린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