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를 따라가는 강화도 여행
신미양요를 따라가는 강화도 여행
신미양요의 현장을 따라가며 강화도를 여행한다면, 가장 먼저 들러야 할 곳이 초지진이다.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미군이 처음 상륙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진’은 나루 ‘진(津)’이 아니라 막을 ‘진(鎭)’이다.
그러니까 초지진은 배들이 들고나는 나루터가 아니라 적의 공격을 막는 군사 요새다.
도성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강화도는 예부터 외세의 침략이 잦았고, 이를 막기 위해 곳곳에 진을 설치했다.
1656년(효종 7년)에 구축된 초지진은 신미양요를 일으킨 미군뿐 아니라,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군과도 격전을 벌인 장소다.
초지진 앞의 소나무에 지금도 선명히 남아 있는 포탄 자국이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대포를 끌고 이곳에 상륙한 미군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5년 전 일어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책임을 묻는 것, 다른 하나는 조선과 통상 협정을 맺는 것.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 후기에 빈번하게 출현한 ‘서양 오랑캐의 이양선’ 중 하나였다.
당시 이양선들은 조선과의 통상을 목적으로 들어왔으나, 대부분 중무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협상이 아니라 대포와 총칼로 통상을 강요했고, 여의치 않으면 약탈자로 변신하기도 했다.
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올라온 제너럴 셔먼호도 예외는 아니었다.
평양서윤이 통상을 거부하자 바로 강도로 돌변하여 대포와 장총을 쏘며 금은과 인삼 등을 요구했다.
이에 격분한 평양 사람들이 벌떼같이 모여들어 배를 불질러 침몰시켰다.
그런데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조선을 침공한 것은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배가 불타버렸을 뿐 아니라 선원들까지 전원 사망했기 때문에 미국은 철저히 응징하고 배상을 받고자 두 번이나 원정을 계획했지만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이 막 끝난 뒤라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를 틈타(?) 프랑스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몇 달 뒤 7척의 군함으로 조선을 침공했고, 그중 4척이 강화도에 상륙했다.
물론 이들도 명분이 있었다. 그해 프랑스 신부 9명이 불법 선교 혐의로 처형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강화도를 점령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약탈이었다.
프랑스 군대의 약탈은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에 패배해 달아날 때까지 20여 일 동안 계속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병인양요다.
이 때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귀중한 서적을 비롯한 수많은 보물이 프랑스로 넘어가게 된다.
이중 외규장각 도서들은 2011년에야 ‘영구 대여’라는 형식으로 고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초지진에서 약 5km 떨어진 정족산성은 조선군과 프랑스군이 최후 결전을 벌인 장소다. 이곳의 ‘정족산사고’에는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되어 있었다.
조선의 관군이 목숨을 걸고 프랑스군을 물리친 이유 중 하나는 무엇보다 소중한 왕조실록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병인양요가 일어나고 5년 뒤, 미군 함대가 중국 상하이를 출발했다.
군함 5척에 1,200여 명의 군인을 태운 미군 함대를 맞이한 것은 어제연이 이끄는 조선 관군이었다.
이미 병인양요를 겪었던 조선은 나름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초지진으로 상륙한 미군 선발대 650여 명은 조선의 관군과 처절한 육박전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