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로 떠나는

산사로 떠나는 고즈넉한 힐링 여행

산사로 떠나는 고즈넉한 힐링 여행

산사로 떠나는 고즈넉한 힐링 여행

위로가 필요할 땐 서천의 숲과 바다로

대지가 잠에서 깨어난다는 곡우(穀雨)가 지났다.

조만간 천지가 진초록들로 물들기 전 여린 새순들을 따라 한 박자 쉬어가기로 했다.

정상에 오르지 않아도 되고 딱히 무언가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길을 걷고 싶을 때가 있다.

그저 조용히 쉬기 위해 발길 닿는 대로 움직여 찾은 곳은 수도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충북 자락의 속리산 법주사, 그리고 차량으로 50분 거리에 자리한 청남대이다.

이제 막 세상 구경을 나온 여린 신록들이 법주사 일주문 앞까지 마중을 나왔다.

부드러운 흙길에 올라 건장한 나무줄기, 그리고 그가 환영하듯 내놓은 연한 새순들과 반갑게 인사한다.

아직 따갑지 않고 부드럽기만 한 햇살이 새순 사이로 스며든다. 사브작 사브작 언제까지라도 걸을 수 있는 흙길을 따라 법주사로 들어선다.

보은 속리산 법주사. 지금으로부터 1500여년 전, 신라 진흥왕 때 의신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불교국가였던 신라부터 조선 중기까지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듭하며 거대한 사찰로 자리 잡은 법주사.

그러나 한반도 전역을 초토화시킨 임진왜란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7여 년간 계속된 지리한 전쟁은 수십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사찰을 전소에 가깝게 망가뜨렸고 인조가 즉위하고 난 후에야 벽암대사의 중창으로 가람의 모습을 갖춰갔다.

일단 법주사를 제대로 보려면 그가 품은 국보와 보물을 파악하는 게 먼저다.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팔상전(국보 제55호)․석연지(국보 제64호) 총 3점의 국보와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법주괘불탱화(보물 제1259호) 등 10여점의 보물을 비롯해 수십여 점의

문화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법주사 일원이 사적 및 명승지로 지정된 이유이기도 하다.

법주사가 품은 국보와 보물만 찾아보는 데도 제법 시간이 필요하다.

‘속리산 법주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금동미륵대불은 거대하다.

법주사에 들어서기 전부터 보이는 이 거대한 불상은 정면에 자리한 팔상전의 왼편에 자리한다.

아무리 봐도 현대식으로 보이는 미륵불은 신라 혜공왕 때 진표율사가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대원군의 경복궁 중수 작업으로 몰수됐던 미륵불은 1964년 시멘트로, 이어 1990년 청동대불로 태어났다.

지금의 금동 모습을 되찾은 것은 2000년에 들어서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유일한 5층 목조탑 팔상전과 더불어 법주사를 대표한다.

한반도의 배꼽에 자리하는 팔상전 역시 임진왜란 이후 다시 지어졌다.

내부에 들어서면 벽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표현한 팔상도가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었다.

중앙에서 시계방향으로 돌아보면 부처의 생애를 한눈에 살필 수 있다.

팔상전을 나오면 대웅보전(보물 제915호)에 가기 전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보리수나무,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과 먼저 닿는다.

두 마리 사자가 앞발을 높이 치켜든 형상이 독특한 쌍사자석등은 이름과 꼭 같은 모습이 눈길을 끈다.

사찰의 중심인 대웅보전은 그 양식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세워졌다고 짐작한다.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며 조선 중기 양식을 갖추게 됐다.

능인전과 능인전 지척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도 놓치기 아쉽다. 잠시 부처의 공간에 머물다 아까 밟고 들어온 흙길을 따라 다시 세상으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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