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골목여행 천천히 걸으며 즐겨보자

대구 골목여행 천천히 걸으며 즐겨보자

대구 골목여행 천천히 걸으며 즐겨보자

청주여행이야기 청주 중앙공원 은행나무전설

예부터 내륙중앙에 위치해 영남지방의 행정,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해왔던 대구는 골목골목마다 역사와 문화가 담긴 곳이 많다.

때문에 거리마다 시간이 만들어 낸 다양한 이야기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우러져 풍요롭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대구 골목여행을 시작해 보자.

가장 먼저 골목여행을 시작할 곳은 향촌동 추억의 거리다. 동성로와 약령시거리에 비해 낯선 ‘향촌동 추억의 거리’는 어떤 곳일까.

<향촌동 소야곡-조향래 作>이란 책은 이렇게 적고 있다. “…1950년대 대구 향촌동은 한국 문단의 중심지였다.

전란의 여파와 가난의 질곡에도 낭만이 있었고, 피폐와 절망 속에서도 술이 익고 음악이 흘렀다.

피란시절 향촌동은 우리 문화․예술의 요람이었다.…” 향촌동 골목의 탄생은 이렇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나면서 대구 중구 향촌동, 북성로 일대에 시인 박두진, 구상, 작곡가 김동진, 화가 이중섭 등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인들이 피난살이를 위해 모여들었다.

이때부터 작가들은 향촌동 일대에서 문학과 예술의 르네상스를 이루며 청춘을 불살랐다고.

그 흔적들이 남겨져 있는 곳이 바로 향촌동이다.

골목안쪽으로 보이는 한양제화 2층은 1950년대 젊은 작가들이 출입하던 ‘곤도주점(주인 권씨의 창씨개명에서 유래한 이름)’이었다고 한다.

같은 건물 지하 1층은 ‘녹향’이라는 음악감상실이 있었던 자리. 골목 곳곳에서는 피난시절 대구에 흘러 넘친 문학과 예술의 향기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현재는 현황판과 현판, 그리고 더러 남아있는 건물을 통해 당시 예술인들의 발자취를 되새겨 볼 수 있다.

구상 시인의 ‘초토의 시’가 출판된 꽃자리 다방, 전쟁 당시 외신들이 “폐허에서 바흐의 음악이 들린다”고 타전했다는 르네상스 음악감상실

김광섭,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구상, 등 종군 문인들의 합숙소나 다름없었다는 감나무집(술집) 등 술집과 다방의 흔적을 하나씩 찾아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여행이 될 것이다.

대구 중구의 중앙네거리에서 대구역 네거리 방향으로 가다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면 향촌동이 나온다.

지금은 당시의 간판도, 사람들도 사라졌지만, 향촌동 골목 구석구석에는 그들의 발자취가 서려 있다. 주변에 경상감영공원이 있다.

중앙네거리에서 반월당역으로 내려가다 보면 ‘약령시’ 안내판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구시내 골목탐방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방특구’거리가 시작됐다는 뜻이다.

대구광역시 중구에서 발간된 <중구를걷다>는 약령시에 관해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국내 제일의 약재시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시장에서도 한약재 유통의 거점 역할을 했던 대구 약령시는

1658년(효종 9년)에 경상감영 내에 개장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문화유산…” 본격적으로 거리에 접어들면 한약재 냄새가 거리에 가득하다.

덕분에 700m에 달하는 거리를 걷는 것이 짧게 느껴질 정도.

고풍스러운 정취를 풍기는 간판과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한약방들이 많다. 약령전시관도 볼만하다.

이곳은 약령시의 350년 역사와 전통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독특한 한방유물과 박제들을 전시하고 있어 볼거리가 많다.

일요일은 휴관이며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약령시거리 주변으로 약령공원(한방테마형 약령쉼터)과 한약재도매시장이 있다.

지하철 반월당역 4번 출구를 이용하면 된다. 약전골목에서 갈라지는 길에는 떡전골목도 구경할 만 하다.

떡전골목은 1940년경 덕산시장(염매시장)에서 시작된 전통 있는 골목이다. 반월당역 14, 15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청주여행이야기 청주 중앙공원 은행나무전설

청주여행이야기 청주 중앙공원 은행나무전설

청주여행이야기 청주 중앙공원 은행나무전설

야생화 생태 여행 연풍새재 옛길 따라 떠나는 조령산

1392년 고려가 멸망하기까지 고려는 건국초기부터 멸망에 이르는 기간 동안 오랑캐들의 침략으로 하루도 편할 날 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더구나 고려 말 약 100여년정도 지속된 원의 간섭은 고려의 힘을 약화시켰고 특히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잦은 침략은 백성들의 삶을 고통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부패한 귀족과 사찰은 백성들이 농사지을 땅마저 빼앗았으며 1368년 원이 멸망하고 명이 들어서자 정치세력들은 친명파와 친원파로 갈려져 첨예한 대립을 거듭했다.

이 당시 친명파였던 이성계는 요동정벌 명령을 거부하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고려왕조가 멸망하는데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직지’의 고장으로 잘 알려진 청주는 충청북도의 중심지로 아름답고 서정적인 도시풍경과 더불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화재들이 산재해있어 교과서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 중 하나이다.

또한 규모 있는 도시의 명성에 걸맞게 여행자들이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음식점과 숙박시설 및 휴식공간 등 여행자들을 위한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신록이 푸르러지는 6월에 청주를 여행한다면 청주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여행지를 답사하며 그 여행지속에 숨겨져 있는 다양한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 보자.

청주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중앙공원에는 1000여년이 가깝도록 그 자리를 지켜온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있다.

나른한 오후가 되면 할아버지 무릎을 베고 누운 손주가 낮잠을 자고 있을 것만 같은 편안하고 수려한 나무이다.

1000여년이 가깝게 자란 나무답게 허리둘레가 어마어마해서 장정 여럿이서 팔을 뻗어도 닿을 것 같지 않은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다.

대부분의 오래된 나무들이 그러하듯이 이 은행나무에도 전설이 하나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흉년이 들거나 전쟁이 날 때 울음으로 알려준다는, 청주여행이야기 마을마다 전해 내려오는 비슷한 전설이 아닌 고려 말의 정치상황과 관련된 전설이다.

청주 중앙공원은 옛 청주관아가 있던 곳으로 압각수라 불리는 은행나무 옆으로 청주옥이라는 감옥이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고려 공양왕 시절에 10여명의 죄수들이 이곳 청주옥에 잡혀오게 된다.

죄수들 중에는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양촌 권근, 인재 이종학 선생 등의 충신들도 포함되어있었다.

이중에서 목은 이색선생은 학문과 인품이 뛰어나 훗날 조선성리학의 뿌리가 되신 분이다.

이들 죄수들은 이성계와 공양왕을 모함했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청주옥에서 모진 고초를 당했다.

고문이 어찌나 심했던지 죄수들 모두 밤늦은 시각이 되자 죽은 자처럼 축 늘어진 상태가 되었다.

모진 고문이 있던 날 밤 갑자기 천둥번개를 동반한 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물은 삽시간에 불어나서 청주옥을 휩쓸었다.

감옥에 갇혀있던 죄수들은 물론 관리들과 백성들까지 모두 불어난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목은 이색선생도 예외는 아니어서 급작스럽게 불어난 물에 떠내려가게 되었다.

이색선생께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름드리 은행나무의 가지를 붙든 뒤였다.

신비스럽게도 하늘 높은 곳에 있던 은행나무 가지가 저절로 내려와 이색선생을 붙잡은 것이었다.

이색선생이 은행나무 가지를 붙들자 은행나무 가지는 다시 사뿐히 하늘로 올라갔다.

덩달아 이색선생께서도 하늘로 올라가 은행나무꼭대기에 앉게 되었다.

그런데 왕을 모함한 죄로 잡혀온 죄수들도 다 같이 은행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닌가?

죄수들이 은행나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본인들을 고문했던 관리들이 하나같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며 급한 물살에 밀려 떠내려가고 있었다.

청주 고을 사람들이 이를 보고 하늘이 무고한 죄수들을 살렸음을 칭송하며 감복했다고 전해진다.

또 고려 공양왕 역시 하늘이 살린 자들은 죄가 없음을 밝히고 그들을 풀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야생화 생태 여행 연풍새재 옛길 따라 떠나는 조령산

야생화 생태 여행 연풍새재 옛길 따라 떠나는 조령산

야생화 생태 여행 연풍새재 옛길 따라 떠나는 조령산

산호빛 바다를 양편에 거느린 비진도를 아시나요?

백두대간 중 하나인 조령산은 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의 경계다.

조령산에서 만나는 조령관은 문경새재의 일원으로 ‘새들도 넘기 힘들다’는 조령이다.

문경새재처럼 조령관에서 충북 괴산 방면으로 이어진 옛길이 있었다. 조령관에서 소조령에 이르는 연풍새재다.

최근 조령산자연휴양림 입구부터 조령관까지 1.5km 구간에 복원된 옛길은 졸참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한 숲

다양한 야생화를 관찰할 수 있는 생태 교육장으로 손색이 없다.

조령산자연휴양림과 그 안에 자리 잡은 백두대간생태교육장은 자연을 탐구하고, 자연의 소중함을 배우는 공간이다.

조령산 인근에는 예부터 닥나무를 이용해 만든 신풍한지의 역사를 배우고 한지 체험도 가능한 괴산한지체험박물관

아름다운 수옥폭포, 거대한 암반에 새긴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 보개산 자락에 들어앉은 각연사 등 청정한 자연에 깃든 문화유산도 만나볼 수 있다.

백두대간 중 하나인 조령산(1017m)은 산림이 울창하고 암벽 지대가 많아, 기암절벽과 어우러진 산세가 아름답다.

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의 경계로, 과거 보러 가는 선비나 보부상이 넘던 이화령과 문경새재 3관문인 조령관이 있다.

조령관, 조곡관, 주흘관으로 이어지는 문경새재길은 문경 조령 관문(사적 147호), 문경새재(명승 32호) 등이 자리 잡아 역사적으로 중요하고 경치도 아름다운 곳이다.

그중 조령관은 충북 괴산의 경계인데도 문경새재 하면 경북 문경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예부터 괴산 사람들은 조령관을 넘어 한양으로 향하는 소조령까지 8km를 연풍새재로 불렀다.

이곳은 문경새재가 유명해지면서 소리 없이 잊혀갔다.

하지만 최근 괴산군이 조령산자연휴양림 입구부터 조령관까지 1.5km를 연풍새재 옛길로 복원, 옛길의 역사뿐만 아니라 숲과 야생화 등 자연이 어우러진 길로 거듭났다.

연풍새재 옛길과 조령관을 거쳐 조령산자연휴양림으로 내려오는 코스는 가볍게 걸으며 야생화를 즐길 수 있는 숲길이다.

휴양림 내 자리한 백두대간생태교육장까지 둘러보면 최고의 생태 여행이 된다.

조령관에서 신선암봉, 조령산 정상으로 가는 산행 코스도 있지만, 가파르고 바위가 많아 등산객이 주로 이용한다.

연풍새재 옛길 곳곳에는 은대난초, 산딸기꽃, 둥굴레와 비슷한 죽대, 민백미꽃, 애기똥풀 등 다양한 야생화가 피어 계절을 음미하기 좋다.

제철을 맞은 천남성도 흔히 만난다. 천남성은 뿌리와 덩이줄기가 약재로 쓰이기도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사약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조선 숙종 때 장희빈이 사사될 때도 천남성이 쓰였다고 한다.

20분 정도 오르면 하늘이 트이면서 조령관에 이른다. 백두대간 조령 표석이 우뚝 서 있다.

북으로는 월악산과 소백산, 남으로는 속리산으로 백두대간이 이어진다. 조령약수 방면으로 신선암봉과 조령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가 있다.

등산로를 따라 잠시 오르니 큰애기나리가 보인다.

한 뼘쯤 자라다 비스듬히 눕는 애기나리와 달리 큰애기나리는 무릎 높이까지 자라고, 5월이면 연한 녹색 꽃이 수줍게 피어난다.

여리고 예쁜 애기나리보다 크게 자라서 큰애기나리라고 부른다. 어린순은 나물로 먹는다고 한다.

참꽃마리는 이름이 예쁘다. ‘참’은 모양이나 품질이 더 좋은 것을 뜻하는 접두사고, 꽃이 피기 전에 꽃줄기가 달팽이 모양으로 도르르 말려 꽃말이에서 꽃마리가 되었다.

즉 참꽃마리는 꽃마리 가운데서 으뜸이다. 꽃대가 펴지고 올라가면서 꽃이 피는데, 이름만큼이나 앙증맞고 예쁘다.

산호빛 바다를 양편에 거느린 비진도를 아시나요?

산호빛 바다를 양편에 거느린 비진도를 아시나요?

산호빛 바다를 양편에 거느린 비진도를 아시나요?

.부여 백제문화단지 1400년 전 백제의 숨결이 깨어나다

시인 정지용은 통영 미륵산에 올라 ‘문필로는 그 아름다움을 묘사할 능력이 없다’고 했다.

570개의 섬이 쪽빛 바다 위에 빚어놓은 풍경, 그 한가운데에 비진도가 있다.

안섬과 바깥섬, 2개의 섬을 금빛 해변이 아슬아슬 이어놓은 섬이다.

산호길을 따라 미인전망대에 오르면 산호빛 바다가 해변 양쪽으로 펼쳐진 신비한 모양이 한눈에 들어온다. 너무 아름다워 미인도라 불리는 그 섬으로 떠난다.

통영에서 남쪽으로 13km 떨어진 비진도는 뱃길로 40분 거리다.

통영항여객터미널에서 배에 올라 너울너울 쪽빛 바다 위를 달리면 갈매기들이 뒤따라오며 섬으로 가는 마음을 더욱 설레게 한다.

한산도, 용호도, 오곡도 등 올망졸망한 섬들이 그려내는 풍경에 빠져 있는 동안 어느새 비진도에 닿는다.

비진도에는 내항과 외항, 두 마을이 있다. 여행객들은 대부분 해수욕장이 있는 외항에 내린다.

배에서 내리면 말 그대로 그림 같은 풍광에 심장이 쿵 멎는다. 새하얀 백사장이 안섬 쪽으로 뻗어 있고, 백사장 양쪽으로 쪽빛 바다가 펼쳐진다.

비진도는 쌍둥이처럼 닮은 2개의 섬이 모랫길 하나로 아슬아슬 이어지는 섬이다.

모랫길은 길이가 550m로 한쪽은 고운 모래, 다른 한쪽은 몽돌로 이루어진 신비한 해변이다.

몽돌과 모래사장 사이에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니는 길이 놓여 있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기적처럼 그 길을 건너면 외항마을이다. 외항마을 앞에는 비진도해수욕장이 있다.

민박집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해변으로 뛰어가면 맑고 깨끗한 에메랄드빛 바다가 반긴다.

연한 물빛이 해변에서부터 점점 짙어지며 쪽빛이 되기까지 일곱 빛깔의 바다에 눈이 부시다. 풍덩 뛰어들어도 좋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다.

모래사장 반대쪽은 몽돌해변이다. 몽돌해변은 해수욕이 금지돼 있는데, 고둥과 소라를 잡거나 낚시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더위가 멀찌감치 달아나버린 해수욕장의 하루해는 짧기만 하다.

놀다 보면 어느새 해변이 붉게 물들고, 점점이 떠 있는 섬 사이로 일몰이 장관을 연출한다.

해변에 앉은 채로 지는 해를 바라보는 일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멋진 경험이다. 해변 옆에는 해송 숲이 있다.

백년 넘은 해송이 우거진 숲은 시원한 그늘에서 바다 풍경을 감상하기 좋은 명당이다.

비진도의 비경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선유봉에 올라야 한다.

아무리 더운 여름날이라도 선유봉 미인전망대에서 보는 비진도의 풍광을 놓쳐서는 안 된다.

외항 선착장에서 미인전망대를 지나 해발 312m의 선유봉을 거쳐 노루여전망대와 비진암으로 하산하는 이 길은 비진도 산호길이다.

한산도 역사길을 비롯해 연대도 지게길, 미륵도 달아길, 매물도 해품길, 소매물도 등대길 등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있는 바다백리길의 6개 코스 중 하나다.

6개 섬 가운데 가장 먼저 백리길 조성이 시작된 비진도 산호길은 총 5.2km로, 쉬는 시간까지 잡아 넉넉히 3시간 정도 소요된다.

선착장에 있는 국립공원 탐방지원센터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바다백리길 표시가 있다.

그 파란색 선을 따라가면 산호길 입구가 나타나고, 본격적으로 산길이 시작된다.

길은 가파르지만 동백나무, 구실잣밤나무, 곰솔 등 섬에 자생하는 나무에 안내판이 걸려 있어 섬의 생태를 살피며 쉬엄쉬엄 걷다 보면 힘든 줄도 모른다.

그렇게 30분 정도 오르면 첫 번째 전망대인 망부석전망대가 나타난다.

한산도와 용호도, 추봉도 등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아름다운 섬들을 조망하기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 10분쯤 오르면 산호길 최고의 절경 포인트인 미인전망대에 다다른다.

부여 백제문화단지 1400년 전 백제의 숨결이 깨어나다

부여 백제문화단지 1400년 전 백제의 숨결이 깨어나다

부여 백제문화단지 1400년 전 백제의 숨결이 깨어나다

한옥의 보물섬 상화원

백제문화단지의 정문인 정양문을 지나면 시원스런 중앙광장이 펼쳐지고, 그 뒤로 사비궁이 자리해 있다.

사비궁은 정전인 천정전을 중심으로 서궁과 동궁으로 나뉜다.

천정전이 왕의 즉위 의례나 신년 행사 등 국가의 각종 의식을 거행했던 공간이라면 서궁과 동궁은 왕의 집무 공간이다.

서궁에선 무신, 동궁에선 문신에 관련된 업무를 처리했다고 한다.

서궁과 동궁의 정전을 각각 무덕전과 문사전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천정전 중앙에는 어좌(御座)가 놓여 있다.

용좌라고도 불리는 어좌는 왕이 앉던 의자다.

천정전의 어좌는 부여와 공주 지역에서 발굴된 백제시대 유물을 토대로 재현한 것으로, 기단부의 문양은 국보 제128호인 금동관음보살입상의 대좌에서

어좌 뒤 봉황문은 부여 규암면 외리에서 출토된 유물에서 차용한 것이다.

봉황은 태평성대에만 나타나는 전설 속의 새로 용, 거북, 기린과 함께 사령(四靈)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어좌 양옆으로는 왕과 왕비의 평상복과 대례복이 전시돼 있다.

서궁의 무덕전은 백제시대 복식을 체험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선 왕이 입던 용포에서 장군의 갑옷에 이르기까지 백제의 다양한 복식을 무료로 체험해볼 수 있다.

무덕전 중앙의 멋스러운 의자와 드라마 <계백> 에 나왔던 주인공들의 실물 크기 모형은 모두 기념촬영을 위한 소품들이다.

동궁의 문사전으로 걸음을 옮기면 백제 제26대 성왕이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천도를 선포하는 장면을 홀로그램으로 만나볼 수 있다.

사비궁 우측에는 능사(陵寺)가 자리해 있다. 능사는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백제 위덕왕 14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백제문화단지 내 능사는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절터(능산리사지·사적 제434호)에서 발굴된 유구를 토대로 복원한 것이다.

여기서 잠깐! 능사를 사찰의 이름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능사는 사찰의 이름이 아니라 ‘능 옆에 지어진 절’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이다.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던 사찰을 원찰이라 부르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실제로 능산리 절터에서 백제왕릉원까지는 직선거리로 채 200m도 되지 않는다.

백제문화단지 내 능사에는 대웅전과 오층목탑을 포함해 향로각, 부용각, 결업각, 자효당, 숙세각 등 부속 전각까지 고스란히 복원돼 있다.

그 중 시선을 끄는 건 단연 오층목탑이다. 높이 38m에 이르는 이 거대한 탑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복원한 백제시대 목탑이다.

능산리 절터 목탑 자리에서는 능사의 창건연대가 적힌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호)이 출토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리함과 함께 백제를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인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도 이곳 절터의 서쪽 건물지에서 출토되었다.

불전에 향을 피우기 위해 사용했던 백제금동대향로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우리 유물 100선’에 선정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능사의 향로각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백제문화단지 내 능사에 복원해놓은 향로각에는 백제금동대향로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디오라마가 전시돼 있다.

능사 뒤로는 백제시대 고분을 이전, 복원해놓은 고분공원이 자리해 있다.

이곳에는 백제문화단지 화계조성부지에서 출토된 석실분 4기와 부여군 은산면 가중리에서 출토된 석실분 3기 등 총 7기의 고분이 자리해 있다.

한옥의 보물섬 상화원

한옥의 보물섬 상화원

한옥의 보물섬 상화원

인천 파라다이스시티 씨메르 상상 이상의 스파

한옥이 섬으로 들어갔다. 섬을 수호하던 나무는 전입신고를 마친 오래된 집을 감쌌다.

사람은 손길을 뻗어 길을 내고 연못을 만들었다. 섬에서 본 바다가 조화로워 상화원이라 이름 붙였다.

죽도에 정원이 생긴 사연이다. 풍경이 아름다워 보물섬이란 소문이 뭍으로 퍼졌다.

혼자 조용히 무더위 피할 시간이 간절하다면 보령시 죽도 상화원으로 향하자.

장항선 대천역에 내려 택시로 갈아타니 죽도까지 10여 분 거리다. 원래 서해에 떠 있던 섬이 간척사업으로 도로가 놓이며 육지와 연결되었다.

한때 난개발의 위기에 놓이기도 했지만 죽도의 자연을 온전하게 지키겠다는 섬 주인의 고집 덕분에 지금의 모습을 보존할 수 있었다.

주인은 섬을 보호하기 위한 의미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조화를 숭상한다는 뜻을 담아 상화원(尙和園)이라는 이름의 정원을 만들기로 했다.

죽도의 자연에 상처 내지 않겠다는 결심과 함께였다. 섬에 한옥을 들여올 생각은 어떻게 했을까.

이질적으로만 느껴지는 둘의 만남은 오늘날 생각해보니 절묘했다. 방문객들은 예상치도 못한 한옥을 섬에서 만나 기뻤다.

사라질 위기 앞에서 생명을 연장한 한옥이었다.

상화원 어디에서든 바다는 손에 잡힐 듯하다. 길과 어깨를 맞댄 울창한 숲은 몸을 숨기기에 충분하다.

인파가 몰리는 여행지가 부담스럽다면 상화원은 잠깐 나의 행방을 묘연하게 만들 근사한 은신처가 된다.

상화원 전체를 도는 데 1시간 30여 분이면 족하다.

섬까지 와서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 조급함은 잠시 접어두자.

상화원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에 잘생긴 한옥 한 채가 반긴다. 의곡당이다. 경기도 화성 관아에서 정자로 이용하려고 지었던 한옥이다.

고려 후기 또는 조선 초기에 세웠다고 추정한다. 상화원으로 옮겨오기 전에는 천막을 쳐서 다방으로 썼다.

보존을 위해 이곳으로 오지 않았다면 이미 철거되었을 가옥이다.

의곡당은 현재 방문객센터로 쓰인다. 관람하는 이들에게 간단한 음료와 떡을 제공한다.

상화원 안에는 식당이나 매점이 없으니 참고하자. 마실 물을 챙기지 못했다면 회랑에 갖다놓은 생수자율판매대를 이용하면 된다.

상화원 관람은 입구를 등지고 오른쪽에서부터 시작된다. 1km가 넘는 회랑을 따라 걸으면 된다.

회랑으로 향하기 전 초록 잎이 무성한 팽나무에게 눈길 한 번 주자. 누가 적어두었는지 ‘팽나무 약 200살’이라 쓴 나무판자가 익살스럽다.

넉넉하게 드리운 나무 그늘이 고마운 계절이다.

‘산책로 입구’라 쓰인 푯말이 출발점이다. 회랑 바닥에 설치한 하얀색 줄은 방문객들에게 이정표 구실을 한다.

50m마다 설치한 거리 표시가 얼마나 걸어왔는지 알려준다. 덕분에 길을 찾는 수고는 덜하고 마음에 담는 풍경의 크기는 배가 된다.

회랑은 죽도 원주민이 오랜 시간 지나던 길을 그대로 따라 만들었다. 섬의 등고선과 닮은 높낮이에 지루할 새가 없다.

지붕을 얹어 궂은 날씨에도 산책하는 데 어렵지 않다. 계단이 많아 유모차나 휠체어로 가기엔 불편하다. 길 중간에 의자와 탁자를 둔 쉼터가 충분하다.

인천 파라다이스시티 씨메르 상상 이상의 스파

인천 파라다이스시티 씨메르 상상 이상의 스파

인천 파라다이스시티 씨메르 상상 이상의 스파

활동적인 휴식을 위한 양양 해담마을 휴양지

따스함이 간절한 계절이다. 자연스럽게 스파로 발길이 향한다.

겨울철 물놀이 트렌드가 온천에서 워터파크로 변하는가 싶더니, 신개념 스파가 속속 등장한다.

한국형 찜질 문화와 유럽식 스파를 결합한 씨메르도 그중 하나다.

서해 일몰을 바라보며 즐기는 인피니티풀을 비롯해 어두운 동굴 속에 있는 듯한 케이브스파

LED 이미지로 다른 시공간을 여행하는 기분이 드는 버추얼스파 등 특별한 스파가 한자리에 모였다.

인천 중구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에 자리한 씨메르는 2018년 9월에 문을 열었다.

씨메르는 하늘을 뜻하는 프랑스어 ‘ciel’과 바다를 뜻하는 ‘mer’를 합친 이름이다.

1만 3000여 ㎡(4000평) 규모로, 동시에 약 2000명까지 이용할 수 있다. 규모만 큰 게 아니다.

구석구석 볼수록 눈이 번쩍 뜨인다.

미술관처럼 깔끔하게 연결된 복도, 열대지방을 연상케 하는 의자, 도서관 콘셉트로 꾸민 휴게 시설까지 매력적인 공간이 이어진다.

스파에서 자꾸 카메라를 드는 이유다.

씨메르는 크게 아쿠아스파존과 찜질스파존으로 나뉜다. 아쿠아스파존은 발랄하고, 찜질스파존은 편안하다.

아쿠아스파존의 대표 공간은 워터플라자로, 이탈리아 산마르코광장을 모티프로 만들었다.

넓은 수영장에서 남녀노소가 사계절 내내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

수영장 곳곳에 놓인 알록달록한 의자가 기분을 상쾌하게 만든다.

워터플라자에는 실내 인피티니풀이라는 재미난 공간이 있다.

투명 아크릴로 벽을 만들어 수영하는 모습이 밖에서도 보인다. 친구들끼리 인증 사진 찍느라 바쁘다.

아쿠아클럽은 이름 그대로 클럽이다. 낮에는 편안한 음악이 나오지만, 주말 밤이면 풀 파티가 열리는 클럽으로 변신한다.

편안한 스파를 원한다면 버추얼스파와 케이브스파를 찾아보자. 버추얼스파는 벽면 가득한 LED 영상이 특징이다.

눈앞에 바다가 펼쳐지기도 하고, 울창한 숲이 나타나기도 한다. 조용한 음악과 함께 명상하는 기분이다.

케이브스파는 높은 천장과 어두운 조명으로 유럽의 동굴이 생각난다. 외부 소음과 차단돼 온전히 감각에 집중할 수 있어, 어르신들이 선호하는 공간이다.

이번에는 야외로 나가볼 차례다. 실내 수영장도 좋지만, 알싸한 바람을 맞으며 물을 가르는 야외 수영도 남다른 재미다. 물론 물은 따듯하다.

야외에서 특별한 공간은 3층 동쪽과 서쪽에 있는 옥상 수영장이다. 서해로 탁 트인 전경에 가슴이 시원하다.

하늘과 바다, 아름다운 노을을 한자리에서 감상하며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기 적당하다. 밀키탕과 히노끼탕 등 노천스파존도 있다.

아쿠아스파존에서 인기 있는 시설은 슬라이드다. 4층 높이에서 튜브를 타고 내려오는 아쿠아루프&토네이도슬라이드로 워터파크만큼 짜릿한 물놀이를 만끽한다.

아쿠아스파존이 감각적이라면, 찜질스파존은 우아하다. 찜질스파존에는 찜질방 7곳과 휴게 시설 2곳이 있다.

활동적인 휴식을 위한 양양 해담마을 휴양지

활동적인 휴식을 위한 양양 해담마을 휴양지

활동적인 휴식을 위한 양양 해담마을 휴양지

공주 고마나루와 공산성 곰 여인의 전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과 부드러운 나뭇잎들의 움직임에 귀가 기울여지고 눈 앞에는 아늑한 산과 계곡의 청량함이 보인다.

눈을 돌려 텐트 사이로 밤 하늘을 올려다 보니 별빛이 쏟아지고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떠오르게 된다.

서서히 눈을 감고 캠핑이 가져다 주는 묘미에 대해 생각에 잠겨 본다.

캠핑은 여행이 주는 아름다운 설렘과 맑은 자연, 더불어 가족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여행방법이 아닐까?

강원도 양양에는 맑은 자연과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체험거리로 가득한 해담마을이 있어서 여름이 즐겁다.

야영캠프, 페인트볼 사격, 뗏목타기, 활쏘기 체험 등을 해담마을에서 맘껏 즐기고 주변을 좀 더 둘러보게 된다면 송천리 농촌 체험마을

오색약수터, 하조대해수욕장,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 등으로 이동하여 추억을 연장시키는 것도 좋을 듯하다.

으리으리한 시설에 잘 차려진 사설야영장과는 다르게 해담마을의 캠핑장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연이 있어서 매력적이다.

뒤에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그 앞으로는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그 계곡은 전반적으로 수심이 깊지 않아 물놀이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천혜의 자연환경에, 마을에서 준비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들도 더해져 지루할 틈이 없다.

물과 육지를 오가며 스릴 넘치는 짜릿함을 즐길 수 있는 수륙양용자동차와 옛날로 돌아간 듯 흥미로운 활쏘기 체험 등이 있고

계곡에서 즐기는 뗏목타기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체험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해담마을의 캠핑장은 각 사이트가 반듯하게 조성되어 있는 곳은 아니다. 우선 예약된 곳의 적당한 자리를 골라 텐트를 치면 되는데

울퉁불퉁한 돌이 많은 흙바닥이기 때문에 돌을 잘 골라내고 그야말로 야생인 상태에 텐트를 쳐야 한다.

자연 그대로의 땅에 캠핑장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사방을 둘러싼 자연으로부터 크나큰 마음의 위로를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보살핌 아래

빗속에서 텐트를 치는 것과 비가 온 뒤 맑게 갠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는 것 모두 캠핑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희열일 것이다.

가끔 캠핑을 하다 보면 야생을 가장 야생답게 즐기는 캠핑라이프에 도취된 나머지 주위에 돌들을 주워와 둥그렇게 화로대를 만들고

그 안에 숯불을 피우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이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다. 일단 자연석이 훼손될 뿐만 아니라 숯불을 맨바닥에 피우게 되면

바닥에 있는 풀들이 모두 죽게 될 수 있다. 또한, 바비큐를 할 때 생기는 고기기름과 숯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게 되어 자연을 오염시킨다.

불을 피웠던 돌을 하나하나 주워 수세미로 깨끗이 닦아낸다고 하더라도 한번 오염된 자연은 되돌리기 힘들다.

우선 캠핑장에서 장작을 피울 수 있는지 아니면 숯불만 가능한지 혹은 바비큐 자체가 금지되어있는지 자세히 파악해야 하고

그 후에 지정된 장소에서 시중에서 팔고 있는 화로대로만 불을 피워야 한다.

캠핑장만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지 이러한 예절 바른 행동, 작은 규칙도 소홀히 하지 않는 행동 하나하나를 우리 자녀들이 보고 배우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공주 고마나루와 공산성 곰 여인의 전설

공주 고마나루와 공산성 곰 여인의 전설

공주 고마나루와 공산성 곰 여인의 전설

안동 하회마을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문화의 자긍심을 찾다

고마나루에는 전설이 하나 전해온다. 인간 세상을 동경하던 연미산의 곰이 여인네로 변신해 길 잃은 나무꾼과

아들딸 낳고 잘 살다가 나무꾼이 마을로 돌아가 버리자 슬픔을 이기지 못해 금강에 몸을 던졌다는 내용이다.

그 이후 금강이 범람하고 거칠어질 때마다 곰 가족을 기리며 제를 올렸다고 한다.

고마나루의 ‘고마’는 ‘넓다’는 의미다.

백제시절 서해에서 올라온 배나 금강 상류를 오가던 배가 드나들던 넓은 나루터가 고마나루다.

고마나루엔 지금도 아담한 곰 사당이 남아있다.

돌로 깎은 작은 곰 상을 모신 사당 주변으로 키 큰 소나무들이 우거져 보기 좋다. 솔숲 사이사이 현대 작가들이 만든 곰 가족상도 있다.

강변으로 내려가면 백제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국가가 주관하여 금강에 수신제를 지내던 웅진단 터가 나온다. 강 건너편이 곰 가족이 살던 연미산이다.

시간이 넉넉하면 고마나루에서 시작해 공주의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는 고마나루명승길(총 23km, 6시간 30분 소요)을 걸어보는 것도 좋다.

코스는 ‘고마나루-공주한옥마을-국립공주박물관-송산리 고분군-황새바위성지-산성시장-공산성-금강철교-정안천 생태공원-연미산-공주보-고마나루 수상공연장-고마나루’다.

공산성은 백제 시대에 쌓은 왕성이다. 22대 문주왕이 475년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뒤

538년 성왕이 사비(부여)로 옮길 때까지 64년간 5대에 걸친 백제 왕들이 공산성 안 왕궁에서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웅진성이라 했고, 고려 시대에는 공주산성, 조선 시대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렀다.

성의 동서남북에 영동루, 금서루, 진남루, 공북루 등 성문이 있다. 주차장에서 올라가는 길에 보이는 주 출입문은 서문에 해당하는 금서루다.

백제 때는 고마나루를 이용했지만, 조선 시대에는 공북루 아래 큰 나루터가 있어 금강을 건넜다.

공북루 위쪽 전망대에 오르면 푸른 금강과 공주 시내 전망이 시원하다.

성벽은 2.6km로 한 바퀴 둘러보는 데 1시간 30분 정도 걸리고, 금서루에서 왕궁추정지와 쌍수정까지 보고 돌아오는 데는 30분이면 충분하다.

4~10월 매주 토·일요일(7~8월 제외) 금서루에서 웅진수문병교대식이 열린다.

백제 의상 체험, 활쏘기, 백제 왕관 만들기, 백제 탈 그리기 등 체험 코너도 마련된다.

해가 지고 조명이 들어오면 공산성의 밤 풍광을 보러 나선다.

화려하지 않지만 정겨움이 느껴지는 공주 야경과 금강 위에 걸린 철교, 성벽을 비추는 조명이 시원한 밤공기와 어울려 기분 좋다.

동글동글한 언덕처럼 보이는 송산리 고분군은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의 밝혀진 무령왕릉을 비롯해 고분 7기가 모여 있다.

1~6호 분은 백제 시대 왕과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7호 분은 백제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능으로, 1971년 여름 5~6호 분의 배수로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됐다.

모형전시관에서 고분 발굴 과정, 내부 모습, 백제 문화 등을 접할 수 있다. 모형전시관을 둘러보고 공원처럼 깔끔하게 조성된 고분군 주변을 산책하면 된다.

백제 시대 문화를 테마로 한 국립공주박물관에는 무령왕릉의 주요 출토 유물이 전시되었다.

왕릉에서 출토된 유물 4600여 점 가운데 무령왕 금제관식(국보 154호), 무령왕 금귀걸이(국보 156호) 등 12점이나 국보로 지정됐다.

무령왕릉에서 국립공주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자리한 공주한옥마을은 공주를 찾는 개별 여행객은 물론 수학여행객에게도 인기 있는 숙소다.

안동 하회마을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문화의 자긍심을 찾다

안동 하회마을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문화의 자긍심을 찾다

안동 하회마을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문화의 자긍심을 찾다

활동적인 휴식을 위한 양양 해담마을 휴양지

편안한 동녘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안동을 일컬어 대한민국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부른다.

척박한 산악지역인 경상북도에서 비교적 너른 땅을 차지하고 있는 안동은 불교문화가 강한 주변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유교문화가 뿌리 깊다.

벼슬길을 탐하지 않고 학문을 숭상했던 안동양반들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지금까지 잘 남아있어 대쪽같은 선비정신을 여행 중에도 느낄 수 있는, 멋이 살아있는 고장이다.

1999년 안동 하회마을에서 생일잔치를 열었던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안동을 두고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운 지닌 마을’ 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굽이쳐 돌아가는 아름다운 하천과 깎아지를 듯 아찔하지만 수려하고 기품 있는 절벽들

그리고 그 아래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을풍경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도 편안하게 남아있는 곳이 바로 안동이다.

안동은 또한 뿌리 깊은 양반의 음식문화가 일반 시민들에게도 전통적으로 남아있어 경상북도의 인근 지역들과는 다른 독특한 음식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양반들의 제사문화가 담겨있는 헛제삿밥, 내륙지방에서 생선을 즐길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이었던 간고등어

몸에 좋은 건강한 발효음료인 식혜, 콩가루를 섞어 반죽해 만든 건진국시, 달콤한 간장양념에 매운 청량고추와 감자

당면 등을 넣어 보글보글 끓여 만든 맛있는 안동찜닭 등은 안동에서 빠뜨리면 섭섭한 음식들이다.

맛과 멋이 가득한 안동에서 가장 유명한 문화는 국보 121호 안동 하회탈을 들 수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우리나라 중요무형문화재 69호로도 지정되어있다.

하회탈은 안동 하회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하회별신굿탈놀이에 사용되는 탈을 일컫는 말이다.

원래는 12개의 탈이었지만 현재 전해 내려오는 하회탈은 모두 9개이다.

탈 하나하나가 표정이 풍부하고 생동감이 느껴지며 턱이 분리되어 말을 할 때 움직이도록 만들어진 탈도 있어서 탈을 사용하여 표정연기가 가능할 만큼 기능적인 면에서도 탁월하다.

아주 먼 옛날, 하회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자주 발생하여, 마을에 근심이 대단하였다.

이 때 하회마을에는 허도령이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마음씨가 맑고 고왔을 뿐만 아니라 멀리서도 한눈에 허도령임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외모도 곱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어느 날 허도령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이런 말을 전했다. “지금 마을에 흉흉한 변고들이 자꾸만 생겨나는 이유는 마을을 지켜주는 신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다.

신의 노여움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탈을 만들어 쓰고 춤을 추어야한다. 이 탈을 네가 만들거라. 단, 탈을 다 만들 때까지는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아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누군가가 이 사실을 알게 되거나 엿보기만 해도 모두 다 피를 토하고 죽게 될 테니 그리 알아라.”

잠에서 깨어난 허도령은 아무도 몰래 마을 어귀에 움막을 짓고 12개의 탈을 만들기 시작했다.

원래 탈 만들기에 재주가 뛰어났던 허도령은 신을 기쁘게 할 탈을 만들기 위해 있는 힘을 다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허도령을 사모했던 한 마을 처녀가 허도령이 마을에서 사라진 것을 알아채고 찾아 나섰다.

처녀는 허도령을 백방으로 헤매다가 드디어 허도령이 작업하던 움막을 찾았다. 허도령은 마침 마지막 탈을 조각하던 차였다.

“도련님..” 처녀가 사모하는 마음을 담아 허도령을 불렀고, 처녀와 눈이 마주친 허도령은 목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하고 죽었다.

그 모습을 본 처녀는 사모하는 허도령을 자신이 죽이고 말았다는 죄책감에 그 길로 부용대 높은 절벽 위로 올라가 자결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