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치맛자락 아래 춤추는 물결 괴산 수옥폭포와 용추폭포

소백산 치맛자락 아래 춤추는 물결 괴산 수옥폭포와 용추폭포

소백산 치맛자락 아래 춤추는 물결 괴산 수옥폭포와 용추폭포

경주에서 즐기는 해안 트레킹 양남 파도소리길

소백산맥에서 뻗어 내린 높고 낮은 산이 그림처럼 둘러싸고, 소백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계곡의 절경을 만드는 고장이 충북 괴산이다.

여행길 어디서나 소백산 치맛자락을 적시며 춤추듯 휘돌아 가는 물줄기를 만나고, 동양화 한 폭을 감상하듯 눈이 시원하다.

에어컨이나 선풍기는 흉내 내지 못할 청량함과 장쾌함을 선물하는 수옥폭포와 용추폭포를 만나러 간다.

연풍면에 자리한 수옥폭포는 약 20m 높이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가 장관이다.

조령산(1017m) 능선 서쪽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빚어낸 절경이다.

연풍 현감 조유수가 1711년(숙종37) 숙부 조상우를 기리기 위해 지은 수옥정이 폭포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있다.

현재의 정자는 1960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그림 같은 폭포와 정자가 어우러져 영화나 TV 사극의 단골 촬영지가 되기도 했다.

두 팔을 벌려 감싸 안은 듯 이어지는 기암 가운데로 계단처럼 반듯한 암반을 때리며 흘러내리는 폭포의 물소리가 머리까지 맑게 한다.

문경새재나 이화령을 오가던 옛사람들도 이 폭포를 보며 더위를 식히고, 고된 걸음을 쉬었으리라.

수옥폭포 위쪽에는 괴산군이 운영하는 수옥정 물놀이장이 있다.

계곡물을 이용한 야외 수영장으로 어린이에게 인기다. 이용료가 저렴하고 캠핑장도 함께 있어 편리하다.

울창한 숲 속을 지나는 약 700m 산책로 끝에 용추폭포가 있다.

높이 약 10m로 너른 암반을 통과해 쏟아지는 폭포가 장관이며, 가뭄에도 풍부한 수량을 자랑한다.

전국에 이름이 같은 폭포와 계곡이 많지만, 괴산의 용추폭포는 초록 숲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하얀 물줄기가 청량함을 뽐낸다.

우렁차게 쏟아지는 물소리가 깊은 숲 속에 메아리를 만들어 귀로 즐기는 피서가 되어준다.

폭포를 감상하기 좋은 자리에 전망 데크가 설치되었으니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용의 발자국을 찾아보자.

폭포가 떨어지는 암반 주변에 움푹움푹 파인 자리가 용의 발자국이라 전한다.

폭포 아래쪽에서 접근하는 것보다는 폭포 위쪽 사기막골에서 내려가는 것이 수월하다.

계곡에 발을 담그고 쉴 수 있는 자리도 이 길에 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계곡을 찾아 심신을 수양하고 학문에 매진했다.

계곡의 명소에 특별히 이름을 붙이고 노래를 짓는 선비들의 풍류를 구곡(九曲) 문화라 부른다.

화양구곡, 선유구곡, 쌍곡구곡 등 괴산의 계곡은 옛사람들의 멋과 사상이 함께 흐른다.

우암 송시열이 1곡 경천벽부터 9곡 파천까지 이름을 붙이고, 4곡 금사담에 암서재를 짓고 은거한 곳이 화양구곡이다.

속리산국립공원 화양동분소에서 출발해 화양천을 거슬러 오르며 약 3km에 자리한 화양구곡을 만난다.

수량이 풍부한 물줄기를 따라 너른 암반과 하늘로 치솟은 기암절벽이 이어지고, 울창한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한여름 더위를 잊게 한다.

수심이 얕은 곳은 물놀이하기 좋아 가족 피서객이 즐겨 찾는다. 가볍게 걸어도 좋고, 계곡 주변에 자리한 식당을 이용하면 차를 타고 들어갈 수 있다.

경주에서 즐기는 해안 트레킹 양남 파도소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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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사지 허물어진 절터에서 온기를 느끼다

그대, 천년 신라를 품은 경주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학창시절 수학여행지로 봉인되어 있던 경주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어느 봄날 이후였다.

경주 시내 봉분들 위로 흩날리는 꽃비 덕분에 경주를 흠모하게 되었으니까. 봄날의 경주를 만난 적이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리라.

물론 벚꽃 말고도 경주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이 있다.

석굴암·불국사를 필두로 경주시내의 대릉원·첨성대·안압지 등. 어렴풋하게나마 추억 한 조각쯤 떠오르지 않는가.

여기에 남산까지 속속들이 걸어봤다면,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 그대는 경주를 흠모하고 있다.

경주, 어디까지 가봤나요?

경주는 크게 시내권, 석굴암·불국사권, 남산권 그리고 동해권 이렇게 4개 권역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얼마 전부터 찾는 이들이 늘어난 양동마을과 독락당 등 조선시대를 오롯이 품은 공간까지 더하면 더 풍요로운 경주 여행을 누릴 수 있다.

흔히들 알고 있는 대릉원과 첨성대를 품은 시내권은 천년 신라 귀족들의 무덤으로 채워진 공간이다.

석굴암·불국사와 함께 경주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신라인들의 염원을 오롯이 품은 불국토, 남산도 빼놓을 수 없다.

오죽하면 경주에서 천년 신라를 속성(?)으로 살필 방법으로 국립경주박물관과 노천박물관 남산을 찾으면 된다는 말이 있을까.

그리고 여기에 경주가 품은 동해안이 더해진다. 석굴암·불국사만 알던 이들에게는 귀가 솔깃해지는 대목이다.

경주에서 즐기는 동해안이라. 게다가 지금은 바닷고기들이 살찌는 찬바람 부는 계절 아닌가.

포항 구룡포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27km쯤 내달리면 감포항과 닿는다.

경주의 대표적인 동해안 관광지로 꼽히는 감포항은 횟집이며 숙박시설 등을 제법 갖추고 있다.

2박 이상의 일정이라면 이 근처에서 하루쯤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다고 경주에 와서 감포항만 보고 가서는 곤란하다.

감포항에서 남쪽으로 10km만 달려가면 문무대왕 수중릉과 닿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 해도 경주 동해권 여행의 중심은 문무대왕 수중릉과 여기서 내륙으로 1.6km 파고든 곳에 자리한 감은사지 3층석탑이다.

문무대왕(文武王), 그가 누구인가. 기어코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게 한 장본인.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왕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가야 왕손 김유신의 누이, 문명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라 최초 아니, 한반도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과 함께 천년 신라의 토대를 만든 김춘추를 아버지로 또 김유신을 외숙으로 둔 것.

그가 잠들었다는 수중릉을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김유신과 김춘추도 함께 떠오른다.

그들이 그 시대에 만나지 못했더라면 과연 신라는 지금과 같은 역사를 꾸릴 수 있었을까.

보령 성주사지 허물어진 절터에서 온기를 느끼다

보령 성주사지 허물어진 절터에서 온기를 느끼다

보령 성주사지 허물어진 절터에서 온기를 느끼다

파란 하늘과 하늘하늘한 코스모스 명소

옛 절터는 따사롭다. 봄으로 가는 길목, 잔설이 있어도 생채기 난 돌탑 위로 어느새 훈풍이 스친다.

보령 성주사지는 크고 유서 깊은 절터다. 성주산 자락에 둥지 틀 듯 자리한 폐사지에는 지난한 세월이 담겨 있다.

사적 307호 성주사지에는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흔적이 골고루 묻어난다.

국보 1점과 보물 3점을 비롯해 땅 안팎의 귀한 유물이 허물어진 절터를 의연하게 지키고 있다.

거친 돌덩이로 에워싼 절터의 외형만 봐도 번창했을 당시 규모가 짐작된다.

성주사의 과거는 백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합사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절은 본래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호국 사찰이었다.

백제가 멸망하고 폐허가 된 사찰은, 800년대 중반 통일신라 선종의 대가인 무염대사(낭혜화상)가 다시 일으킨 것으로 전해진다.

통일신라 말기 유행한 선종은 불경을 깊이 알지 못해도 수양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불교 종파로, 당시 백성 사이에 크게 유행했다.

선종의 큰절이 전국에 9개 세워졌는데(구산선문), 그중 성주산문의 중심지가 성주사다. 성주산문은 구산선문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많은 승려를 배출했다.

성주사 일대에 승려 수천 명이 머물 때는 아침이면 사찰 앞 성주천이 쌀 씻은 물로 하얗게 흘렀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성주사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쇠퇴하다가 17세기 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된 터의 흔적을 살펴보면 중문, 석등, 오층석탑, 금당, 강당의 가람 배치 형상을 띤다.

성주사지에서 가장 도드라진 유적은 낭혜화상탑비(국보 8호)다.

성주산문을 일으킨 무염대사를 기리기 위해 최치원이 왕명에 따라 비문을 지었다.

10세기 초 세워진 거북 받침돌 위 비석에는 무염대사의 일생과 업적, 성주사를 일으키고 선종을 전파한 내용이 낱낱이 적혔다.

비석의 재료로 성주산 일대에서 채취되는 남포오석을 사용해, 글자 하나하나가 큰 훼손 없이 보존되었다.

성주면 일대에서 나는 검은 돌(오석)은 최근에도 귀한 조각상을 만드는 데 이용된다.

폐사지에 들어서면 이방인이 처음 알현하는 유물은 석등과 오층석탑이다.

성주사지 오층석탑(보물 19호)은 이중 기단에 석탑을 세운 형태로, 높이 6m가 넘는다. 석탑은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 양식이 혼재되었다.

절터를 가로질러 봉긋 솟은 금당 터를 지나면 삼층석탑 3기가 병풍처럼 나란히 서 있다.

금당 터 뒤에 석탑이 도열한 모습도 이례적이다. 이금진 문화해설사는 성주사 뒷산의 산세가 약해 석탑이 산의 기운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서 삼층석탑과 중앙 삼층석탑은 각각 보물 47호, 보물 20호로 지정되었으며, 두 탑 모두 통일신라 말기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품격 높은 유물 사이에서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서는 것은 석불입상이다. 석불은 풍화되고 잘려 나가 귀도, 코도 깨진 형상이다.

타원형 얼굴과 양어깨를 덮은 법의에서 소박한 느낌이 전해진다. 석불은 조선 시대 민불로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성주사지를 에워싼 성주산은 보령을 상징하는 명산으로, 깊은 숲과 계곡이 있다.

성주산은 두 계곡을 품고 있는데, 화장골계곡에 성주산자연휴양림이 들어섰다. 편백 숲이 사계절 깊은 휴식을 선사하는 곳이다.

지하 400m 수직갱으로 내려가는 듯한 엘리베이터가 실감 나고, 미니 연탄 만들기 체험도 가능하다.

파란 하늘과 하늘하늘한 코스모스 명소

파란 하늘과 하늘하늘한 코스모스 명소

파란 하늘과 하늘하늘한 코스모스 명소

공주 마곡사 솔바람길 마곡천을 따라 마곡사의 신록을 노래하다

경기도 구리시 토평동에 자리한 구리한강시민공원은 9월 중순부터 가을 코스모스가 드넓게 펼쳐져 장관을 이룹니다.

한강을 따라 코스모스도 따라 흐르듯 물결치는 곳.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사이 길에 들어서면 아련한 추억과의 대화를 나누게 될지도 모릅니다.

요즘 핫하게 뜨고 있는 갑천변 코스모스. TJB대전방송을 지나 컨벤션센터 네거리를 건너면 온 사방을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황화코스모스를 볼 수 있습니다. 코스모스 구경을 마친 뒤 지척에 있는 엑스포과학공원 구경은 보너스.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에 위치한 평림댐 테마공원에서는 주황, 분홍, 하얀 색의 코스모스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평림댐 테마공원에서는 캠핑이 가능하니 캠핑 하면서 가을의 정취를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5월의 장미로 유명한 섬진강기차마을은 가을에는 알록달록 핀 코스모스도 장미 못지 않게 아름답습니다.

기찻길 옆에 코스모스가 무리지어 피어 있어 낭만을 한껏 느낄 수도 있습니다. 증기기관차 타고 시간여행은 덤~!

아름다운 풍경과 시원한 그늘에서의 여유와 휴식이라면 조금은 행복해 질 것 같은데 잠시 잠깐 ‘짬’을 내는 것이 쉽지 않다.

‘즐거운 뉴스’ 하나가 비 온 뒤 무지개 찾는 것처럼 어려운 요즘, 지친 마음 잠시 쉬어갈 정원 한 바퀴 돌아보는 건 어떨까.

한 바퀴 돌아 봐도 아쉬운 마음 달랠 길 없다면, 수원시내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 발걸음을 옮겨보자.

우리 주변엔 생각보다 많은 ‘여유’가 숨은그림찾기처럼 들어 차 있다.

월화원. 어딘가 사극에서 들어 봤음직한 이 이름은 수원 효원공원에 있는 ‘중국식 정원’의 이름이다.

고로, 수원시내 첫 번째 나들이 코스인 월화원은 우선 ‘효원공원’을 찾아가야 한다.

효원공원을 찾아 나서다 보니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빌딩 숲 사이에 멈춰 서게 된다. “여기에 설마 정원이 있을라구?”

숱한 블로거들의 ‘인증샷’을 확인했음에도 ‘월화원’에 들어서기 전까지 잘 믿기지 않는다.

효원공원에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좌측으로 시선이 간다.

효원공원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지붕이 눈에 띄어서다. 이어지는 몇 개의 계단. 계단 양쪽으로 사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여의주(?)’를 문 동물상이 눈에 띈다. 일찌감치 카메라 든 손이 바빠진다. 이 문을 들어서면 ‘중국식 정원’이라는 다소간 낯선 공간이 나타난다.

중국식 정원이 어떻게 수원의 효원공원 가운데 들어서게 됐을까.

월화원은 중국 광둥(廣東)성이 효원공원 서편에 조성한 중국식 정원으로서 광둥 지역 전통 정원의 특색을 살려 건물과 정원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2003년 10월 경기도와 광둥성이 체결한 ‘우호 교류 발전에 관한 실행 협약’의 내용 가운데 한국과 중국의 전통 정원을 상대 도시에

짓기로 한 약속에 따라 2005년 6월 15일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여 2006년 4월 17일 문을 열었다.

광둥성에 있는 전통 정원인 영남 정원과 같이 건물 창문으로 밖의 정원 모습을 잘 볼 수 있게 하였고

후원에 흙을 쌓아 만든 가산(假山)과 인공 호수 등을 배치하였다. 또 호수 주변에는 인공 폭포를 만들고 배를 본떠 만든 정자를 세우기도 하였다.

곳곳에 한시와 글을 새긴 건물은 하양 가루로 파랑 벽돌과 나무를 연결하는 광둥 지역의 전통 건축양식을 그대로 따라 지었다. 지붕 접합부는 나무와 벽돌, 석회 조각 등을 사용하였다.

2005년 6월 한국으로 건너온 중국 노동자 약 80명의 손으로 지어진 이 정원의 크기는 6,026㎡(1,820평)이며 광둥성이 건축비 34억 원을 부담하였다.

2003년 10월 맺은 협약에 따라 경기도 역시 광둥성 광저우[廣州]에 있는 웨시우공원[越秀公園] 안에 해동경기원(海東京畿園)을 조성하였다.

2005년 12월 문을 연 해동경기원은 전라남도 담양군에 있는 한국 전통 정원 소쇄원을 본 딴 것이라고 한다.

공주 마곡사 솔바람길 마곡천을 따라 마곡사의 신록을 노래하다

공주 마곡사 솔바람길 마곡천을 따라 마곡사의 신록을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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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만족 양반 고을 안동 여행

‘춘마곡 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 했다. 계절의 아름다움이 봄에는 마곡사요, 가을에는 갑사라는 얘기다.

그만큼 마곡사의 봄 풍경은 손에 꼽을 정도로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풍경 속에 백범길, 명상산책길, 송림숲길 등 3개 코스로 구성된 마곡사 솔바람길이 조성되었다.

마곡사와 함께 마곡사 솔바람길의 백미인 명상산책길을 걸어본다.

마곡사 입구의 번잡한 상가를 지나면 마곡천이 나란히 이어지며 마곡사로 안내한다.

마곡천이 태극 문양처럼 한 바퀴 크게 휘감아 돌면 비로소 마곡사 경내에 이른다.

마곡사는 신라 문무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이다.

예부터 마곡사가 깃들어 있는 태화산 골짜기에 마(麻)가 많이 자라서 이름 붙여졌다고도 하고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유학하던 시절 스승인 마곡화상을 기려 마곡사라 불렀다고도 한다.

마곡사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사찰인 만큼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둘러볼 수 없다.

경내에 보물로 지정된 영산전, 대웅보전, 대광보전, 오층석탑 등이 있고

대광보전 앞마당까지 이어지는 길에 해탈문, 천왕문, 명부전, 국사당, 응진전, 심검당 및 고방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중 대광보전은 볼거리가 많은 곳 가운데 하나로 천천히 둘러보는 것이 좋다. 먼저 현란한 기교를 보여주는 대광보전 현판은 표암 강세황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강세황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이자 단원 김홍도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광보전 내부에서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영광 불갑사 대웅전처럼 남쪽이 아닌 동쪽을 향해 앉아 있는 비로자나불을 만날 수 있다.

후불탱화 뒤편에는 하얀 옷을 휘날리는 수월백의관음도가 있다. 이밖에도 대광보전 내외부에는 16나한

사천왕뿐 아니라 다양한 산수화가 남아 있다. 마곡사가 불교미술의 큰 맥인 남방화소의 중심으로 그림을 그리는 선승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광보전에는 참나무 껍질로 만든 삿자리 이야기도 전한다. 다릿병을 앓던 한 사람이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해 100일 동안 지극정성으로 삿자리를 짰는데

100일째 삿자리가 완성되던 날 자리를 털고 유유히 걸어 나갔다는 이야기다.

부처님이 정성에 감동하여 은혜를 베풀었다는 이야기로, 대광보전 바닥에 삿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 세조의 글씨도 남아 있다. 마곡사 입구에 자리 잡은 영산전 현판이 바로 그것.

세조는 생육신의 한 명인 매월당 김시습을 보러 마곡사를 찾았다가 결국 만나지 못하자 영산전 현판과 자신이 타고 온 가마를 남겼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책을 불사르며 울부짖던 매월당 김시습이었다. 그를 만나 회유하고자 했던 세조의 안타까운 마음이 그대로 묻어난다.

영산전이 현재 해체 복원 중이어서 현판을 볼 수 없고, 세조의 가마 역시 보기 어려워 아쉽다.

마곡사는 대광보전 위로 대웅보전이 서 있어서 매우 독특한 가람 배치를 보여준다.

대광보전 뒤편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2층 누각처럼 거대한 대웅보전이 의연하게 서 있다.

계단 위에서 경내를 내려다보면 심검당과 고방 방면으로 건물의 지붕선이 매우 아름답다.

마곡사는 백범 김구 선생의 흔적도 간직하고 있다.

김구 선생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군 중좌를 살해한 죄로 복역하던 중 탈옥해 마곡사에 은신했다.

광복 직후인 1946년, 선생은 마곡사를 다시 찾아 경내에 향나무를 심었다. 그때 심은 향나무가 응진전 옆에서 60여 년의 세월을 지키며 오롯이 서 있다.

마곡사가 깃들어 있는 태화산 자락에는 마곡사 솔바람길이 조성되었다. 일명 ‘백범 명상길’이다. 김구 선생이 마곡사에 은신하던 당시 걸었던 길이다.

오감만족 양반 고을 안동 여행

오감만족 양반 고을 안동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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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외롭지 않아요 대한민국 독도

‘대한민국 양반고을’ 하면 첫손에 꼽히는 경북 안동. 우리에게 ‘하회마을의 고장’으로 알려진 안동은 전통적 양반문화 뿐 아니라

하회탈춤(하회별신굿 탈놀이) 같은 대중적 민속문화까지 품은 고을이다.

전통색 강한 안동의 대표 관광지로 꼽히는 하회마을과 병산서원, 여기에 하회마을 지척에 둥지를 튼 경상북도청 신청사 구경을 더해봤다.

안동 OLD&NEW 여행이다.

경북 안동. 막연하게 ‘멀다’고 느껴지는 건 실질적인 거리보다 시공간의 영향 때문 아닐까 싶다.

낙동강에 안긴 하회마을을 필두로 서원과 향교 등 당시의 시간이 멈춰있는 공간들이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의(義)와 예(禮)를 중시하며 학문과 풍류를 즐기던 우리 조상들의 흔적 덕분에 우리는 안동하면 선비·양반을 떠올리게 됐다.

안동은 BC 57년 염상도사가 세운 창녕국에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신라시대에는 고타야군, 고창군으로 불리다 고려시대에 들어 ‘안동’이란 이름을 처음 얻었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 안동대도호부로 승격한다. ‘대도호부’는 조선시대 주요 고을에 두었던 지방행정기관 명칭이다.

안동 외에도 강원 강릉·평안 영변·함경 영흥 등에 설치됐다 갑오개혁 이후 행정구역 개편으로 사라졌다.

1896년(고종 33) 안동군, 1931년 안동읍을 거쳐 1963년 시로 승격되면서 안동군과 분리됐다.

1995년 안동시·군 통합으로 지금의 ‘안동시’가 됐다. 전국의 시군 중 최대 면적을 갖게 된 이유다.

때문에 안동여행은 동선을 고려해서 짜야 한다. 크게 하회마을·병산서원·경북도청 신청사 등을 묶은 하회마을 권역

도산서원·퇴계종택을 묶은 도산서원 권역, 안동문화관광단지·구시장·신시장 등을 묶은 안동시가지 권역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번 여행은 경북도청 신청사와 하회마을~도산서원을 보고 안동시가지로 나가 안동구시장과 신시장 구경을 더한 코스로 수도권에서도 당일치기로 즐기기 무리가 없다.

물론 안동의 별미 간고등어·헛제삿밥을 맛보고 안동호의 야경까지 즐기려면 1박2일이 여유롭다.

안동땅에 들어서 먼저 경상북도 신청사로 향했다. 경상북도 신청사~하회마을~병산서원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을 보고 나오는 길에 경상북도청에 들러도 좋다. 2016년 3월에 개청한 경상북도 신청사에 들어서자 방문객 안내소가 보인다.

안내책자는 물론 문화해설사도 상주한다. 도청 소속 모든 건물 1층은 외부인에게 개방하고 있다.

경북도의회·경북도청·복지관·다목적공연장 등의 건물과 경주 동궁과 월지를 본 떠 만든 세심원, 새마을광장과 경화문 등이 자리한다.

도청 본관에 들어서자 다양한 전시와 쉼터들이 반긴다. 모두 뒤로 하고 카페와 식당으로 향한다. 책으로 가득한 북다방은 음료 한잔하며 부담없이 쉬어가기 좋다.

인터넷과 휴대폰 충전도 무료다. 사실, 도청에 관광하러 올 일은 거의 없지만 한여름에 더위 식히러 오기엔 제격이다.

이제는 외롭지 않아요 대한민국 독도

이제는 외롭지 않아요 대한민국 독도

이제는 외롭지 않아요 대한민국 독도

손성목영화박물관 강릉에서 만나는 시네마 천국

언젠가 한번쯤 가보고 싶은 우리 땅, 독도를 찾았다. 강릉에서 세 시간 쯤 달려 자리한 울릉도에서도 이백리는 달려야 닿는 한반도 최동단 섬.

망망대해 가운데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대견하고 또 아련하다.

코앞까지 가서도 접안하지 못해 애타는 짝사랑처럼 바라보기만 하는 일도 부지기수.

일단 독도에 발을 디뎠다면 하늘이 도운 셈, 감사하게 만나러 가보자.

첫눈 오는 날이면 생각나는 첫사랑처럼 ‘독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

외우려고 노력한 기억 없건만 자연스럽게 흥얼거리는 것을 보니 우리는 제법 친근한 사이인 듯 싶다.

멀리 외떨어져 한반도 동해의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지만 ‘작은 바위섬’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막내섬’으로 여겨지는 독도.

속사정 살펴보면 250만~460만 년 전 솟은 독도는 울릉도보다도, 120만 년 전 태어난 제주도보다도 형님이다.

작은 덩치 때문에, 또 멀리 떨어진 위치 때문에 ‘독도분쟁’ 때나 전국민의 관심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네 가슴에는 ‘독도의 방’이 한 칸씩 있다.

사람마다 크기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 그 어떤 정치적 이유를 차치하더라도 따라붙는 자동 옵션이랄까.

수백만 년 전 해저 2000m에서 솟은 용암이 굳어져 생긴 바위섬은 사람이 머물기 좋은 조건은 아니지만 그가 품은 바다 아래에는 황금어장과 풍부한 지하자원이 안겨있다.

당장 먹을 수 있는 풍부한 수산물, 그리고 석탄과 석유 같은 현재 에너지가 고갈된 후 유용할 미래 에너지라.

얼굴과 마음도 예쁜데다 똑똑하기까지 한, 게다가 몸매까지 근사한 다른 사람의 부인을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도 비슷하지 않을까.

마음 같아선 독도에서 많이 나는 수산물 잡이부터 바다 아래 구석구석까지 조사해 보고 싶지만 독도를 찾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고작 30여 분뿐이다.

1999년 천연보호구역(천연기념물 등재는 1982년)으로 지정된 독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독도로 가기 위해서는 울릉도부터 찾는 것이 순서다. 강원도 강릉과 묵호, 경북 포항에서 울릉도행 여객선이 다닌다.

뭍에서 울릉도를 가는데 통상 3시간 안팎이 필요하고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적게는 한시간부터 많게는 두시간까지 필요하다.

울릉도에서부터 독도까지 달려가 독도에 잠시 머물다 울릉도로 돌아오는 독도행 유람선에 오르면 2시간30분에서 4시간30분쯤 걸린다.

배에 따라 시속에 차이가 있으니 독도로 향할 때는 반드시 소요시간을 확인하자.

그리고 한가지 더, 모처럼(아마도 평생에 한번뿐이겠지만) 독도 여행을 계획했다면 날씨 체크는 필수다.

섬 여행이 그렇지만 특히나 독도는 날씨의 영향이 크다. 미리미리 일기예보를 확인해 배편을 확보해두는 편이 좋다.

또 성수기가 지난 다음부터는 독도행 배가 날마다 운항하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울릉도에 입도했는데 날씨가 좋다면, 무조건 독도부터 가는 편이 좋다.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섬 기후이기 때문에 울릉도에 머무는 중 날씨가 좋은 날이 있다면 그날 독도로 향하자.

물론 울릉도를 몇 번이고 찾는 마니아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초행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왕 울릉도까지 찾은 김에 놓치지 말고 독도까지 만나러 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는 편이 좋다.

울릉도에서 독도로 향하는 배는 저동항과 울릉신항(사동항)에서 출발한다.

뭍에서 울릉도로 입도하는 배는 저동항, 도동항, 울릉신항으로 들어선다.

저동항으로 들어왔다면 저동항 여객선터미널에서 독도행 배편을 구해도 좋다. 울릉신항에도 씨플라워호·독도사랑호·돌핀호 등이 운항한다.

배삯은 4만5000원으로 동일하지만 소요시간은 차이가 있으니 반드시 확인해두자. 5시간 가까이 걸려 독도를 만나고 온 사람 여기 있다.

한 가지 더, 11월만 되어도 독도로 향하는 배가 뜸하다. 날이 추워지면 독도행 배는 운항을 멈췄다가 다시 내년 봄이 되면 독도로 향한다.

손성목영화박물관 강릉에서 만나는 시네마 천국

손성목영화박물관 강릉에서 만나는 시네마 천국

손성목영화박물관 강릉에서 만나는 시네마 천국

충주 삼탄유원지 인등산기차 타고 떠나요

경포호에 위치한 참소리축음기 & 에디슨과학박물관은 강릉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사람이 소리를 담기 시작한 흔적과 세계 최고의 발명왕으로 손꼽는 에디슨의 다양한 발명품을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참소리축음기 & 에디슨과학박물관 옆에 손성목영화박물관이 새롭게 들어섰다.

에디슨의 3대 발명품인 축음기, 전구, 영사기를 이제 한곳에서 다양하게 만나볼 수 있게 됐다.

새롭게 조성된 강릉의 시네마 천국, 손성목영화박물관을 찾아 나섰다.

손성목영화박물관은 손성목 관장이 전 세계 30여 개국을 돌며 수집한 영사기와 영화 카메라를 비롯해 영화 관련 자료 3만 5,000여 점을 갖춘 전시관으로 영화의 역사를 만나보는 공간이다.

축음기, 전구, 영사기는 토머스 에디슨의 3대 발명품으로 손꼽힌다.

인류 최초로 소리와 빛, 영상을 재생 가능하게 담아낸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발명품이다.

영화박물관은 에디슨의 3대 발명품 중 하나인 영사기를 주제로 영화 이야기를 담았다.

환등기, 영사기, 영화 카메라 등을 통해 영화의 시작과 발전 과정을 만난다.

영화박물관은 1층에서 시작해 2층에는 환등기, 카메라, 편집기 등 영화 관련 전시품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

에디슨의 최초 발명품인 키네토스코프가 전시된 에디슨영사기전시관을 비롯해

우리나라 영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극작가 신봉승 씨와 영화감독 손만성 씨가 기증한 영화 관련 장비와 자료를 볼 수 있다.

전시 공간 가운데 마련된 영상관에서 잠시 만나는 영상은 100년이 넘는 영화의 역사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우선 영상관의 의자가 이채롭다. 이 의자들은 미국에서 공수해온 수집품 중 하나다. 100여 년 전 미국 극장에서 사용했던 의자다.

환등기부터 무성영화, 유성영화를 거쳐 1930년대 말부터 등장하는 컬러 영화, 아이맥스 영화와 SF 영화,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영화에 이르기까지 짧은 시간 동안 1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전시품 가운데 역사상 최초의 컬러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찍은 카메라도 있다.

할리우드 유니버셜 스튜디오에 불이 나면서 시장에 나온 것을 30만 달러나 주고 구한 진기한 물건이다.

원래 3대가 있었는데 1대는 스미소니언박물관에, 그리고 나머지 1대는 스튜디오 화재 때 화마에 휩싸여 사라졌다고.

박물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경사로는 1900년대 초부터 근래에 사용한 영사기들과 다양한 포스터를 만나볼 수 있는 전시공간으로 꾸며 내려가는 동안에도 지루하지 않다.

영화박물관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1층에 있는 참소리영화관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화의 명장면을 옛 방식 그대로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참소리영화관은 웬만한 영화관 못지않은 크기로 1930~50년대 미국 극장에서 사용한 오디오 설비를 갖춰 감동의 시간을 선사한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에게는 청춘의 향수로 다가오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영화에 담긴 추억을 떠올려볼 수 있다.

영화에 관심이 없더라도 화면 가득 채워지는 추억의 영화와 귀에 익숙한 음악에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한다.

화면이 밝아지면서 등장한 영화는 감독이자 배우였던 찰리 채플린의 대표작 가운데 <모던 타임스>의 런치타임 부분이다.

큰 구두와 펑퍼짐한 바지에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를 돌리는 콧수염 난 광대, 그가 그려낸 시대 풍자는 명쾌하면서도 아련하다.

충주 삼탄유원지 인등산기차 타고 떠나요

충주 삼탄유원지 인등산기차 타고 떠나요

충주 삼탄유원지 인등산기차 타고 떠나요

품격 있는 농촌체험 한옥마을 인량리

여름이면 생각나는 물놀이, 경치 좋은 자연 속 물놀이는 그야말로 신선놀음이다.

거기에 기차 타고 떠나는 낭만이 더해지면, 시간에 상관없이 여행의 즐거움은 배가 된다.

기차역 바로 앞에 물과 숲, 산이 어우러진 삼탄유원지를 소개한다.

가볍게 떠나는 캠핑도 좋고, 유원지 옆에 모여 있는 숙박시설을 이용하기에도 편하다.

천제의 기운을 지닌 인등산의 정기를 받는 것도 좋다. 돌아오는 길, 충주역 부근 관광까지 즐기면 여행이 더욱 풍성해진다. 기차 타고 떠나자, 충주!

충북 충주시 산척면에 삼탄유원지가 있다. 삼탄유원지를 찾아가는 길은 기차를 이용하는 게 좋다.

삼탄역에서 약 500m 거리에 유원지가 있기 때문이다. 역 바로 앞 삼탄교를 지나 도로를 따라가면 명돌마을이 나온다.

삼탄은 관청소여울, 소나무여울, 따개비여울 등 여울이 셋이라는 뜻이다. 남한강으로 이어지는 주포천이 유원지를 감싸고 흐른다.

예전에는 화전민들이 가끔 머물렀을 정도로 인적이 드문 오지였지만, 1958년 지금의 삼탄역을 지나는 기차가 연장되면서 마을과 유원지가 형성되었다.

그후 2000년 6월에는 유원지 옆으로 체육공원이 조성되었다. 근래에는 공원 중앙에 천연잔디 축구장이 마련되었다.

유원지 내에 있는 대부분의 시설은 무료로 사용이 가능하지만, 잔디구장은 예약 후 관리비를 지불해야 한다.

잔디구장 외에 공터는 야영장으로도 사용 가능하다. 야영장이 넓어서 언제 가든 자리 구하기가 어렵지 않다.

화장실과 급수대, 주차장 등 편의시설도 잘 되어 있다.

유원지 진입로에 있는 상가들은 식당과 매점, 민박을 겸하고 있다.

이곳에서 물놀이용품은 물론이고 간단한 낚시도구를 대여하거나 구입할 수도 있다. 매년 여름철이면 주민들이 합심하여 유원지 주변 환경을 정비한다.

올해는 7월16일부터 8월 15일까지 주민 200여 명이 참여하는 환경안내소와 새마을문고를 운영한다.

환경안내소는 유원지 주변 쓰레기를 치우고 재활용품을 수거하는 등 피서객들을 위해 깨끗한 환경을 조성하는 봉사활동이다.

새마을문고에는 도서2,000여 권을 비치하여 무료로 대여해주며, 건전한 휴가문화를 이끌고 있다.

강가에는 담당 주민이 상주하며 물놀이 안전사고에 대비한다.

유원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주포천 건너편은 기암절벽이 절경을 이룬다.

강폭이 넓고 수위가 다양해 아이부터 어른까지 물놀이를 즐기기에 좋다. 체육공원 옆으로는 자갈밭이 펼쳐진다.

그 위에 수풀이 우거져 있고, 버드나무 등 잎사귀 풍성한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인등산은 유원지 바로 뒤에 자리한 높이 667m의 산이다. 북쪽에 천등산(807m), 남쪽에 지등산(535m)과 함께 천, 지, 인 3재를 뜻하는 삼등산에 속한다.

삼등산은 산세가 험하고 골짜기가 깊어, 예부터 나라에 난리가 나면 피난민들이 숨어 지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 삼등산을 모두 넘으면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천등산은 산꼭대기가 하늘을 찌를 듯 뾰족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만큼 산행이 쉽지 않다.

박달재와 함께 대중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로 유명해졌지만, 사실 박달재는 천등산과 원서천을 사이에 두고 약 9km정도 떨어진 곳으로 시랑산에 속한다.

지등산은 인등산에서 이어진 산으로, 낮고 볼품이 없어 산행의 재미를 느끼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인등산은 그중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는 산이다. 정상까지 걷는 동안 풍광이 수려하고, 시계가 좋은 날은 멀리 충주호반까지 내려다볼 수 있다.

품격 있는 농촌체험 한옥마을 인량리

품격 있는 농촌체험 한옥마을 인량리

품격 있는 농촌체험 한옥마을 인량리

행복한 장터 구수한 아라리 가락 들으며 정(情)과 인심

어질고 인자한 사람이 많다는 인량리. 500여 년을 넘나드는 고택이 촘촘한 마을에 들어서면 왠지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한 집 건너 한 사람이 박사 가 난 마을이란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을은 우리나라 5대 명당으로 꼽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가만히 서 있어도 기운을 받는 듯한 이 마을에 하루 머무는 것도 좋은데, 무료하지 않게 체험 프로그램까지 무궁무진하다.

품격에 재미를 더한 나들이, 인량리에 숨어있었다.

마을의 첫인상은 포근하다. 송천강을 건너면 칠갑산 자락이 마을을 감싸 안은 모습이 편안하게 다가온다.

나지막한 산과 넉넉한 들판, 그 사이에 아기자기 하게 들어 선 마을. 어느 하나 모난 곳이나 튀는 구석 없이 잘생겼다.

풍수에 문외한이라도 배산임수의 평온이 절로 느껴지는 명당이다. 옹기종기 모인 고택이 마을의 품격을 전해준다.

마을의 역사를 잠시 짚어보자. 1610년(광해군 2)부터 어질고 인자한 현인이 많다고 인량리라 불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량리는 8성씨 12종가가 모여 사는 양반 마을이다. 많게는 500년이 넘고, 적게는 200년 남짓 되는 고택이 즐비하다.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이 9채에 이른다. 마을 사람들은 ‘나라골’이라는 옛 이름을 더 사랑한다.

삼한 시대에 우시국의 도읍이 있었다고 나라골이라 불렸다고도 하고, 마을의 지세가 학이 날아가는 것과 같아서 ‘나래골’이 되었다고도 한다.

마을에는 예나 지금이나 걸출한 인재가 많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사모관대 행차가 끊이지 않았고, 근래에는 박사가 40여 명, 서울대 출신이 40여 명이다.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명당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뒷짐을 지고 본격적으로 고택 산책에 나서보자. 마을 입구에는 잎이 무성한 느티나무가 지키고 섰다.

사람들은 이곳을 ‘팔풍정’이라 부른다. 팔풍정에는 주민을 괴롭히던 여덟 요괴를 물리친 역동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팔풍정은 마을 사람과 이곳을 찾은 이들에게 평화로운 그늘을 선사하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팔풍정 맞은편에 앙증맞은 버스 정류장이 있고, 그 옆에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좁은 시골길에는 석류며 감이 주렁주렁 열렸고, 집 옆에는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사과가 빨갛게 익어간다.

발길이 가장 먼저 닿은 곳은 용암종택이다. 열린 대문 앞에서 걸음이 우뚝 선다.

헛담을 두른 조심스러운 정취, 꾸미지 않은 듯 자연스러운 꽃밭이 대문을 액자 삼아 그림처럼 눈에 들어온다.

그대로 가져다가 두고두고 보고 싶은 풍경이다. 대문으로 들어서면 나지막한 산자락 풍경을 해치지 않으려고 지붕을 낮춘 선조의 멋이 감탄사를 자아낸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용암 김익중이 같은 해 지은 집이다.

용암종택을 나서면 길은 삼벽당으로 이어진다. 삼벽당은 농암 이현보의 넷째 아들 이중량의 종택이다.

겹겹이 이어지는 화려한 지붕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삼벽당은 ‘세 가지가 푸른 집’이라는 뜻이다. 세 가지는 청벽오동나무, 대나무, 소나무를 의미한다. 집 뒤로 소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하다.

둥근 목재로 만든 문지방이며, 45°로 깎아 연귀 맞춤한 문틀 등 구석구석 섬세함이 돋보인다.

삼벽당을 뒤로하고 가을볕을 따라가면 오봉종택과 만난다. 기품 있는 한옥의 멋을 고스란히 간직한 집이다.

집에서 가장 높은 벽산정 마루에 오르면 오봉헌과 고택 지붕이 오밀조밀 이어지고, 마을이 넉넉히 펼쳐진다.

안동 권씨 영해파 입향조 권책의 종택으로, 안동 권씨의 위세가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