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게맹갱외에밋들이 품은 아리랑의 무대 김제 아리랑 문학마을

징게맹갱외에밋들이 품은 아리랑의 무대 김제 아리랑 문학마을

징게맹갱외에밋들이 품은 아리랑의 무대 김제 아리랑 문학마을

하동 최참판댁 처녀귀신 아랑과 꽃미남 사또 은오의 사랑 이야기

‘징게맹갱외에밋들’. ‘징게’는 김제, ‘맹갱’은 만경, ‘외에밋들’은 너른 들을 뜻한다.

우리나라 대표 곡창지대인 김제 만경평야의 옛말이다.

일제의 사악한 무리는 1900년대 초부터 이 땅에 마수를 뻗었다. 그들의 야욕을 채울 전쟁터에 군량미를 보내기 위해서다.

소설가 조정래는 이 과정에서 민초들이 겪어야 했던 수난과 저항의 역사를 《아리랑》에 송두리째 담았다.

소설의 제목이 왜 아리랑일까? 아리랑은 우리 민족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감정을 공유하며 함께 부르던 노래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한일병합 이전부터 해방까지로, 아리랑의 울림이 가장 클 때다.

《아리랑》에서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을 보는 관객들의 모습을 통해 확인해보자.

“김영진이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면서 악대가 연주하는 <아리랑>의 선율이 흐르기 시작한다.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오…. 그 연주에 맞추어 앞쪽에서 합창이 시작되었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아…. (중략) 합창이 막 끝났을 때였다.

“대한독립 만세에!” 어느 남자의 부르짖음이었다. “대한독립 만세에!” 화답하듯 여기저기서 터진 외침이었다.”

소설가 조정래는 아리랑이라는 제목을 쉽게 지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아리랑만큼 적절한 제목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리랑 문학마을은 소설 《아리랑》의 무대를 현실에 재현하여 아픈 시절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아리랑》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김제시 죽산면 옛 내촌·외리 마을 일대에 터를 잡았기에 여행객은 살아있는 문학을 체험할 수 있다.

아리랑 문학마을은 크게 홍보관, 하얼빈역, 내촌·외리 마을, 근대 수탈 기관으로 구성된다. 홍보관은 그 자체로 《아리랑》에 대한 친절한 안내서다.

《아리랑》이 베스트셀러이긴 하나 12권짜리 대하소설이기에 탐독에 부담을 느낀 이들이 상당수일 터.

홍보관 1층은 벽면을 아예 《아리랑》에 대한 텍스트로 꽉 채웠다.

소설의 대략적인 흐름을 정리한 줄거리, 인물 묘사와 주요 인물 관계도, 소설 속 핵심 일화 발췌문까지 짜임새 있게 구성되었다.

천천히 둘러보며 읽기만 해도 《아리랑》이 어떤 소설인지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

홍보관 2층에는 김제 출신의 독립투사들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다. 낯선 영웅들은 대의를 위해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 일제에 항거했다.

부당한 시대의 참상이 그들의 결기를 이끌어냈을 것이다. 총을 들고 맹렬히 돌진하는 독립군 동상이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하얼빈역과 《아리랑》의 시대적 배경을 조합하면 금세 떠오르는 사건이 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1909)다. 역내 대합실을 통과해 밖으로 나가면 근대사 최고의 장면이 동상으로 실감나게 표현돼 있다.

안중근 의사가 방아쇠를 당기자 민족의 응어리를 실은 총알 한 발이 제국의 심장을 관통한 장면이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열차에서 내린 직후였기에, 그 시절 증기기관차도 함께 출연하여 생생함을 더한다.

하얼빈역 광장 앞에 이민자 가옥이 있다. 일제의 수탈에 못 이겨 타향으로 떠나간 사람들이 지은 너와집과 갈대집을 재현했다.

너와집은 아쉬운 대로 최소한 집의 구실은 할 것 같으나, 갈대집은 너무나 열악하다.

《아리랑》에서는 ‘갈대움막’이 등장한다. “갈대를 무더기무더기 베어 모은 사람들은 움막을 짓기 시작했다.

움막은 땅을 사람 키 깊이로 파내고 그 위에 갈대로 지붕을 해덮는 것이었다.”

하동 최참판댁 처녀귀신 아랑과 꽃미남 사또 은오의 사랑 이야기

하동 최참판댁 처녀귀신 아랑과 꽃미남 사또 은오의 사랑 이야기

하동 최참판댁 처녀귀신 아랑과 꽃미남 사또 은오의 사랑 이야기

우제봉전망대 산 위에서 거제바다의 비경을 만나다

남도 500리 길(212.3km)을 나그네처럼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

어느 강보다 서정적인 섬진강을 따라 천방지축 처녀귀신과 꽃미남 사또의 사랑이 피어오른다.

사랑의 장소는 지리산 자락과 섬진강이 품어낸 악양면 평사리의 최참판댁이다.

드라마 <아랑사또전>에서 최 대감(김용건 분) 댁으로 나오면서 아랑(신민아 분)과 은오(이준기 분)가 알콩달콩 정을 쌓아가는 데 일조한 촬영지다.

아랑과 은오가 기와 담장으로 주왈(연우진 분) 도령을 넘겨보던 연못과 아담한 건물은 최참판댁의 별당이고, 귀신들이 넘어가지 못한 긴 담도 최참판댁의 담장이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으로 널리 알려진 이곳은 최근 <아랑사또전>의 인기에 힘입어 아랑의 흔적을 찾는 여행객의 발걸음이 잦다.

이름 아침 <아랑사또전>의 촬영지인 하동군 악양면의 최참판댁을 찾아가는 길.

지리산 형제봉과 구재봉 줄기가 두 팔을 활짝 벌려 포근히 감싸고 있는 들판과 만난다.

안개가 내려앉은 들에는 아침 햇살이 가득하고, 들 한가운데에는 부부송이라 불리는 멋진 소나무 두 그루가 가장 먼저 여행객을 맞는다.

부부송은 오랜 세월을 지켜온 두 그루의 소나무로 악양들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산중에서 만난 평야는 품이 넉넉하다. 농부들에게는 풍성한 수확을 안겨주었고, 나그네에게는 지극히 한국적인 풍경을 선물한다.

그리고 만석지기 최 참판을 탄생시켰다. 최 참판은 우리나라 대하소설의 백미로 꼽히는 박경리의 《토지》에 등장하는 중심인물이다.

외둔마을을 지나 상평마을 고샅길로 들어서면 앙증맞은 돌담이 정겹게 놓여 있다.

땅만 파면 나오는 것이 돌이기에 그저 되는 대로 올려놓은 게 돌담이고, 그 위로 담쟁이가 힘차게 뻗어가고 있다.

담장 너머엔 까치밥으로 남겨둔 감이 고개를 떨구지 않고 나무에 매달렸다.

마을길 옆으로 드라마 <토지>를 촬영할 때 조성한 세트장이 있다.

무당의 딸 공월선, 투기심이 강한 강청댁, 재물에 집착하는 임이네 등 서민들이 모여 살던 초가 그대로다.

초가마다 극중 인물의 사진과 이름이 붙어 있고 극중 대사까지 적혀 있어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생생한 느낌이 든다.

돌담길을 거닐며 한적함에 젖어 있노라면 초가 뒤편 모퉁이에서 문득 토지의 등장인물인 최치수,

서희, 김환, 별당 아씨, 조준구, 길상, 공 노인 등이 불쑥 나타날 것만 같은 분위기에 감싸인다.

최참판댁은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했다. 한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위치다.

악양들의 풍요로움이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섬진강의 속살까지 샅샅이 내려다보인다.

집 뒤로는 대숲이 울창하고 형제봉의 든든한 산세가 병풍이 된다.

최참판댁은 <아랑사또전>에서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중요한 장소다.

극중 최 대감댁으로 나오는데, 아랑의 억울한 죽음과 이를 파헤치는 은오의 활약이 이곳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때론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가 엉켜 있는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랑사또전>의 흔적은 찾기 힘들다. 드라마를 시청한 여행자들만이 기억을 더듬어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어디에도 <아랑사또전>과 최참판댁의 연관성을 설명하는 안내 문구가 없는 탓이다.

아직도 최참판댁의 기억을 지배하는 것은 1987년부터 3년 동안 방영된 드라마 <토지>다.

소설 《토지》는 박경리 선생이 1969년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한 이래 26년에 걸쳐 전 5부 16권으로 완간된 대하소설의 금자탑이다.

이야기의 중심은 구한말부터 8·15 광복까지. 우리 근대사의 혼란과 그 속에 깃든 인간의 애환을

악양들의 만석지기 최참판댁의 마지막 당주인 최치수와 그의 고명딸 서희의 삶을 따라가며 그려낸다.

우제봉전망대 산 위에서 거제바다의 비경을 만나다

우제봉전망대 산 위에서 거제바다의 비경을 만나다

우제봉전망대 산 위에서 거제바다의 비경을 만나다

천년의 지문 한밤마을 돌담길 걷다

한려수도에 흩뿌려진 섬들 중에 가장 보석처럼 빛나는 섬 해금강.

아름다운 섬과 쪽빛 바다가 어우러진 해금강의 풍광을 한눈에 볼 수는 없을까?

우제봉전망대는 그런 욕심을 한방에 해결해준다.

동백 숲길을 따라 30분 발품을 들이면 해금강 비경을 품을 수 있다. 환상적인 일출과 일몰은 덤이다.

제주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섬 거제도. 900리에 달하는 해안선을 따라 62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펼쳐져 있다.

거제도는 소백산맥이 남해로 내달리다 바다로 뛰어들어 다시 솟아오른 땅이다.

그런 만큼 쪽빛 바다에 감긴 깎아지른 벼랑으로 이어지는 해안 경관이 감탄을 자아낸다.

1971년 통영반도와 거제도 사이에 거제대교가 놓여 육지와 연결되었고, 2010년 가덕도와 거제도를 잇는 거가대교가 개통됨으로써 거제도로 가는 길이 더 빨라졌다.

거제바다가 품은 절경 중 가장 아름다운 풍경으로 손꼽히는 곳이 바로 해금강이다.

우리나라 40곳의 명승 가운데 강원도 소금강에 이어 두 번째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칡뿌리가 뻗어 내린 형상을 닮아 원래는 갈도(칡섬)라 불리다가 금강산 해금강에 뒤지지 않는다 하여 ‘해금강’이라 불린다.

남부면 갈곶리 해안 끝에서 500m 떨어져 바다 위에 우뚝 솟은 해금강은 키가 무려 100m가 넘는다.

사자바위, 미륵바위, 촛대바위, 돛대바위 등으로 둘러싸여 있고, 깎아지른 절벽에는 수만 년 세월 자연이 조각한 만물상이 새겨져 있다.

유람선을 타고 절벽 사이 십자동굴로 들어서면 신비로움은 절정에 이른다.

동굴 천장을 올려다보면 하늘이 열십자로 보인다 해서 십자동굴로 불린다.

흙 한줌 없는 기암괴석 위에는 동백이며 풍란, 석란이 뿌리내려 섬을 지키고 있다.

해금강의 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우제봉전망대다.

해금강주차장에서 우제봉전망대까지 약 1km. 느린 걸음으로 30분이면 전망대에 닿는다.

보도블록이 깔린 우제봉 진입로를 지나면 동백 터널이 나타난다.

동백 숲길은 아이들도 쉽게 오를 만큼 완만하다. 키가 큰 동백나무들이 만들어낸 오솔길은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편안한 길이다.

15분쯤 숲길이 이어지다가 하늘이 열리고 바다가 나타난다.

제법 가파른 바위 벼랑에 놓은 계단을 오르면 우제봉 가는 길과 주차장으로 하산하는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 우제봉 가는 길로 돌아서면 전망대가 우뚝 서 있다.

하늘로 오르는 듯 마지막 계단을 오르면 전망대다.

하늘에 걸어놓은 듯 사방이 탁 트인 전망대에 서면 동쪽으로는 해금강과 외도·내도, 서쪽으로는 대·소병대도와 홍포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쪽빛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다도해의 풍경과 그곳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가슴을 활짝 열어젖힌다.

30분 발품으로 해금강의 비경을 품은 일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전망대에는 누구라도 사진작가가 될 수 있는 액자포토존이 마련되어 있다.

두 개의 포토존은 해금강과 대·소병대도를 배경으로 선택할 수 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 멋진 풍경이 액자 속으로 쏘옥 들어온다.

여유 있게 올라와 쪽빛 바다를 순식간에 붉게 물들이는 일몰을 기다려도 좋고, 부지런히 올라와 뜨겁게 솟구치는 일출의 순간을 함께해도 좋다.

전망대에서 우제봉 정상까지 200m 남짓 되는 길 역시 편안한 나무 데크로 이어져 있다.

하지만 정상 부근은 일반인 출입통제 구역이다.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전망대에서 아쉽게 돌아서야 한다.

옛날 고을에 심한 가뭄이 들 때마다 수령이 이곳 정상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며, 그래서 우제봉이라 불린다고 한다.

우제봉은 중국 진시황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서불이 다녀간 곳이다.

서불은 진시황의 명을 받아 3천 명의 대선단을 이끌고 와 거제도에 머물렀다.

그 징표로 우제봉 절벽에 서불이 다녀갔다는 뜻의 ‘서불과차(徐巿過此)’라는 글을 새겼다고 전한다.

우제봉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이 불로초와 다름없다.

불로장생을 찾아 나선 길이 아름답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거제도 해금강이었다는 사실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천년의 지문 한밤마을 돌담길 걷다

천년의 지문 한밤마을 돌담길 걷다

천년의 지문 한밤마을 돌담길 걷다

중앙시장과 서호시장 통영 사람들의 삶과 맛을 체험하다

이런 산골에 어떻게 사람이 모여 마을을 형성했을까.

궁금증은 지도에서 쉽게 풀렸다. 주변 지리를 살피면, 한밤마을이 유일한 분지로 그 주위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다.

또 팔공산의 여러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한밤마을을 휘감아 흐르니 배산임수에 적합하며 분지의 규모도 비교적 넓어, 사람이 머물기 시작한 때는 오래 전이었으리라.

꼬불꼬불한 한티재를 넘어 북쪽으로 향하면 사과밭, 계단논, 내천 등 시골풍경이 파노라마로 이어진다.

그리고 한 마을을 관통하는 구간을 만난다. ‘이곳이 한밤마을이구나’ 차곡차곡 쌓인 돌담으로 하여금 도착했음과 동시에 마음 설레게 하는 풍경을 기대하게 된다.

실제로 주위를 살피니 지도 상에서 본 것보다 분지 규모가 상당히 크다.

한밤마을 규모 또한 평소 접하던 마을보다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주위에 병풍처럼 나란히 솟은 산 천년의 지문 덕분에 분위기 또한 남다르다.

마치 화산의 분화구에 서 있는 것 같다. 숨을 크게 한번 들이키고 내뱉어본다.

도시 빌딩 숲에서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히 뚫린다. 귀에 맴돌던 소음과 눈앞의 분주함은 온데간데없다. 이래서 시골은 일단 좋다.

한티로와 한밤마을이 만나는 곳에 ‘대율리 대청’ ‘상매댁’ 표지판이 세워졌다.

눈에 띄는 것부터 둘러보자. 처음 온 곳이지만, 걸음이 편안하고 마음은 어느 때보다 안락하다.

오감 중 어느 하나 자극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없으니, 이게 ‘평온함’이구나 싶다.

주위 풍경이 담백하달까. 질리지 않는 매력이 잔잔하게 목격된다.

“털 털 털” 경운기 엔진 소리가 위협감 없이 울리며 골목을 빠져나간다.

다 쓴 연탄을 싣고 어디론가 향하는 경운기에서 한밤마을 모습 중 하나를 담는다.

길 양옆으로 세워진 돌담은 불규칙한 배열로 쌓였지만, 불안하거나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편안한 시골풍경을 자연스럽게 받쳐준다. 이러한 진풍경의 중심 ‘한밤마을 돌담길’에 들어섰다.

먼저 한밤마을과 팔공산의 관계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다. 팔공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산맥은 상당히 험준하다.

그만큼 협곡도 깊고 거칠다. 그 협곡들 가운데 팔공산의 북서방향이 한밤마을과 이어진다.

팔공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한밤마을로 내려오는 길을 떠올리면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처럼 팔공산~협곡~분지로 이어지는 길목이 한밤마을에 있는 돌의 이동 경로다.

그렇다면, 그 돌은 어떻게 생겨난 걸까.

태고부터 오랜 기간 잦은 홍수를 겪으며 팔공산의 바위와 돌이 깎이고 쪼개지고, 흙은 쓸려 내려가면서 돌이 분지에 쌓였다고 전해진다.

이런 과정이 반복된 후, 한밤마을에 사람이 모여 삶의 터전을 일궜을 터. 자연스레 돌을 사용한 담장을 세우게 된 것이다.

요즘에는 보기 드문 돌담 중 그 원형이 잘 보전된 곳으로 유명하지만, 과거에는 미학적 관점보다 쓸모없는 돌덩어리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 컸을 것이다.

따라서 집과 집 사이의 경계에 돌을 쓰고, 경작지를 가르는 경계에도 돌을 썼다.

한밤마을의 돌담은 하나하나가 예부터 숱하게 손을 탄 애물단지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 돌담은 보안, 안전 등 이 개념에 충실하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넘어갈 수 있는 높이일뿐더러, 담장 너머로 이웃집 속이 적날하게 보이는 수준이다.

도시에서 볼 수 있는 담장과는 별개의 의미가 있는 것.

담장을 쌓으면서도 자연을 포용하는 자세를 찾아볼 수 있는데, 담장을 놓아야 하는 곳에 나무가 있다면 나무도 담장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구성했다.

이런 자연스러움은 인간의 집까지 이어진다. 한옥이 돌담과 이렇게 잘 어울렸나.

궁궐에서 보아온 담장과 한옥의 조화도 뛰어나지만, 한밤마을에서 볼 수 있는 조화 또한 인상적이다. 조금은 딱딱해 보이거나

권위적으로 보일 수 있는 기와집 한옥이 둔덕이 쌓인 돌담과 어울리니, 친근함까지 갖춘 균형의 한 집으로 인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에서 살 수 있다면, 도시의 편리함을 쉽게 등질 수 있을 듯싶다.

누구나 꿈꿔 본 한옥 살림, 그 이상적 생활에 잘 어울리는 집이다. 주위 병풍을 친 산과 어울리니 멋진 풍경 또한 매력이다.

이 같은 한옥의 멋과 감동을 넉넉히 살필 수 있는 곳이 있다. ‘상매댁’이다.

남천고택이라고도 불리는 ‘상매댁’은 한밤마을의 한옥 중에서 큰 규모와 오래된 역사로 손꼽히는 가옥이다.

자료에 따르면 조선 현종 2년(1836)에 지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원래 가옥의 형태는 ‘興’자형의 독특한 배치를 이뤘으나 해방을 거치면서 현재의 건물만 남고 대문이 옮겨지면서 방향이 바뀌었다.

‘Π’자형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됐으며 외곽으로 자연석을 사용한 정자, 대나무 숲 등이 한옥미를 배가한다.

중앙시장과 서호시장 통영 사람들의 삶과 맛을 체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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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 퍼뜩 오이소 오감이 즐거운 부산 축제

통영의 시장은 살아 있다. 방금 바다에서 건져 올린 싱싱한 해산물로 시장 안은 활기찬 기운이 가득하다.

강구안의 중앙시장과 새벽시장으로 유명한 서호시장은 통영 사람들의 식탁을 풍성하게 해주는 양대 재래시장으로 다채로운 식문화를 보여준다.

새벽에 일어나 텃밭에서 캐온 채소와 새벽 바다에서 잡아온 생선이 풍성하게 쌓여 있는 곳,

재래시장의 치열한 삶과 구수한 맛이 살아 있는 곳, 중앙시장과 서호시장을 찾아가보자.

서호시장은 새벽에 장이 열리는 부지런한 시장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서호만 바다를 매립해서 조성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신정시장이라 불렸고, 새터라는 지명을 따라 새터시장이라고도 불렸다.

아침시장이라는 의미로 아침제자라고도 불렸다니 서호시장은 예부터 통영의 아침을 신명나게 열어온 시장임이 틀림없다.

생선을 실은 통통배들이 날이 밝기도 전에 서호만 작은 항구로 모여든다.

한산도, 용초도, 비진도, 연화도에서 모여든 어선들의 엔진 소리와 갈매기 소리가 항구의 새벽을 활기차게 열어젖힌다.

새벽 장을 보러 나온 부지런한 사람들과 상인들의 생기 있는 모습에서 서호시장의 정서와 매력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

서호시장 끝자락에 가면 새벽 4시에 나와 오후 7시까지 시장을 지키는 마산상회 할머니를 만날 수 있다.

56년 동안 한결같이 서호시장의 새벽을 지켜온 터줏대감이다.

봄에는 쑥과 섬나물, 여름에는 매실․마늘․옥수수, 겨울에는 유자 등 통영을 둘러싸고 있는 섬마을에서 온갖 싱싱한 채소와 해산물을 가져다 판다.

새벽부터 밤까지 시장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물건을 사고파는 재미에 푹 빠져 세월도 잊고 살았단다.

할머니의 거칠고 굽은 손마디는 잠시도 쉬지 않는다.

새벽 장이 끝나고 사람들이 밀물처럼 빠져나간 자리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다시 내일 새벽을 준비하는 모습에서 통영 사람의 바지런한 하루가 그려진다.

통영의 술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다찌집에서 진하게 한잔 마셨거나 새벽 경매를 마친 상인들이 즐겨 찾는다는 ‘원조시락국’은 서호시장 입구에 있다.

50년을 지켜온 소박한 식당의 기다란 나무 테이블에 앉아 통영 사람들과 함께 국밥을 먹는다.

앞에 놓인 반찬통에서 입에 맞는 반찬을 덜어 시래깃국에 밥을 말아 후루룩 먹다 보면 구수한 통영 사투리가 맛깔스럽게 들려온다.

통영여객선터미널 앞이라 섬으로 떠나는 여행객들도 든든한 아침식사를 할 수 있어 인기다.

새벽시장인 서호시장과 달리 오후 2시부터 활기를 띠는 중앙시장은 싱싱한 해산물과 건어물이 풍성한 곳이다.

통영을 찾은 관광객들이 상인들과 흥정하는 동안, 펄떡펄떡 뛰는 생선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장 주변에 동피랑벽화마을, 남망산조각공원, 강구안 문화마당과 거북선 등 볼거리가 많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활어시장 근처 2층에 있는 초장집으로 횟감 생선을 가져가면 한 접시 푸짐하게 차려준다.

1인당 3천 원의 상차림비만으로 횟감에 어우러지는 근사한 상이 차려진다.

강구안 바다를 바라보며 싱싱한 회와 매운탕을 맛보는 특별한 즐거움이 있다.

바다를 끼고 있는 중앙시장은 통제영 시절 12공방이 있던 곳으로 나전칠기와 누비 제품, 바지게떡 등의 전통이 남아 있어 역사의 맥을 이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365일 연중무휴로 24시간 열려 여행자가 언제라도 찾아갈 수 있는 고마운 시장이다.

생선회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중앙시장 앞으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김밥집에서 충무김밥을 맛볼 수 있다.

원조로 소문난 뚱보할매김밥이나 한일김밥, 풍화김밥 등 어느 집에 가도 짭조름한 오징어무침과 함께 새콤한 섞박지와 손가락김밥을 맛볼 수 있다.

여객선터미널 앞에 자리해서 통영 인근 섬으로 여행을 떠나는 관광객들의 단골 도시락 메뉴다.

중앙시장의 생선 좌판에 정신을 놓고 걷다 보면 동쪽 비탈길에 알록달록 벽화가 그려진 동피랑마을로 가는 길목이 나온다.

동피랑은 통영시 정량동과 태평동 일대의 산비탈 마을로 한 사람이 걸어갈 만한 좁은 골목길이 미로처럼 이어진다.

동피랑마을은 올라가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다. 한때 철거될 뻔했다가 산비탈 마을 벽에 그림이 그려지면서 통영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니

예술의 도시 통영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한국의 몽마르트르 언덕이라는 애칭까지 얻게 된 동피랑마을은 중앙시장의 넉넉한 인심을 따라

사람 냄새가 푸근하게 이어지는 곳이다. 동피랑마을 입구와 언덕에 찻집이 새로 생겨서 잠시 앉아 쉬는 여유를 즐겨도 좋다.

마을 벽화를 찬찬히 둘러보고 가장 높은 언덕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해안 풍광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고마 퍼뜩 오이소 오감이 즐거운 부산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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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스타일 갈미삼합 갈미조개와 삼겹살의 만남 중매는 묵은지?

멸치회 맛보고 멸치털이 체험하는 기장멸치축제

멸치축제가 열리는 기장 대변항은 요즘 멸치잡이 어선들이 한창이다.

남해 미조항과 함께 봄 멸치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기장 대변항이다.

대변항에서 생산되는 일명 왕멸치는 국내 생산량의 65~70%를 차지할 정도로 수확량이 많다. 그야말로 멸치 1번지다.

대변항에서 잡히는 멸치는 멸치볶음을 해 먹는 잔멸치가 아니라 회로 먹고, 찌개 끓여 먹고, 쌈 싸먹는 대멸치다.

대변항에는 60~70개의 멸치횟집이 즐비한데, 여느 항구의 횟집들과는 달리 모두 멸치회와 무침을 주 메뉴로 내건다.

젓갈용 멸치도 상자마다 그득하다. ‘대변항=멸치’라는 공식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상식이다.

이맘때쯤 대변항을 거닐다 보면 오후부터 해질 무렵까지 꾸준히 들어오는 멸치잡이 어선을 만나는 것도 흔한 일이다.

선원들이 멸치를 터는 광경을 구경하는 것도 살살 녹는 멸치회를 먹는 것만큼이나 기장 봄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선원들은 배를 항구에 댄 뒤 일렬로 서서 그물에 붙은 멸치를 털어낸다.

무언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노동요를 곁들인 일사불란한 몸짓은 마치 정제된 군무처럼 보이기도 한다.

항구의 갈매기들에게는 배 주위에 널린 멸치를 마음껏 주워 먹을 수 있는 소문난 잔치다.

대변항은 영화 <친구>에 등장했던 명소로도 알려져 있다.

기장멸치축제에 가면 멸치회를 맛보고 멸치털이를 구경하는 것 외에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대형 멸치회 비빔밥 만들기, 기장멸치액젓으로 김치 담그기는 물론이고 기장군 어업지도선 승선 운항, 맨손 활어잡기, 미역채취도 가능하다.

노래자랑과 불꽃놀이, 축하공연, 풍물패 퍼레이드 등의 볼거리는 덤이다.

축제기간에는 매일 낮 12시부터 1시까지 누구나 멸치회를 무료로 시식할 수 있다.

멸치회를 맛보며 봄 바다의 향기를 느끼고 다양한 체험도 즐길 수 있는 기장멸치축제는 오로지 봄에만 누릴 수 있는 호사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떠올리게 하는 화려한 불빛의 광안대교. 더불어 봄 바다의 낭만이 출렁출렁 나래를 펼치는 곳이 바로 부산의 광안리 앞바다다.

광안리는 여행객도 여행객이지만 누구보다 부산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해변이다.

젊은이들은 물론 가족 단위의 시민들이 삼삼오오 산책을 즐기는 모습이 평화롭다.

매년 광안리해변 일대에서 열리는 광안리어방축제가 오는 5월 12일부터 14일까지 아름다운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3일간 펼쳐진다.

‘어방’이란 예전 어로활동이 활발했던 부산 수영만 일대의 어업협동체를 이르는 말.

어방축제는 공동 어로 작업 시 노래를 하며 노동의 피로를 잊고 일의 효율을 높이며 정서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했던 다양한 어방놀이를 재현한다.

시민들과 여행객들이 함께 어울리며 전통을 이어가는 축제다.

어방축제의 대표적인 행사는 좌수영어방놀이로 국가무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돼 보존·전승되고 있다.

그 밖에도 축제장에서는 어방그물끌기와 경상좌수사 행렬, 전통뱃놀이, 어방민속마을 재현 등 다양한 체험과 볼거리를 만날 수 있다.

또 맨손활어잡기 체험을 비롯해 활어요리 경연대회, 생선회 깜짝경매 등 남녀노소 두루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체험이 마련돼 가족 단위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바다가 아니라 직접 체험하고 느끼는 삶의 현장으로서 색다른 바다를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호기심 많은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들에게 인기다.

기타 부대 행사로 윈드서핑대회와 해양레포츠체험, 소망등 전시, 문화예술거리, 특산물장터, KBS 전국노래자랑 등도 운영된다.

부산스타일 갈미삼합 갈미조개와 삼겹살의 만남 중매는 묵은지?

부산스타일 갈미삼합 갈미조개와 삼겹살의 만남 중매는 묵은지?

부산스타일 갈미삼합 갈미조개와 삼겹살의 만남 중매는 묵은지?

까꼬막을 굽이굽이 돌아 걷는 길 부산 동구 초량이바구길

삼면이 바다에 안긴 한반도는 동해안을 따라 흐르는 백두대간을 등뼈 삼아 일어선다.

또 한반도 지도를 가만히 살펴보면 산과 물, 평야와 갯벌까지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다양하고 풍부한 먹거리가 더해졌으니 이만하면 살기 좋은 자연환경 아닌가.

특히 널따란 평야와 바다, 갯벌을 갖춘 남도는 음식과 풍류에 있어 단연 선두를 차지한다.

백반만으로도 한상 가득 차려 내오는 넉넉함을 맛볼 수 있는 곳이 또한 남도 아니던가.

그 풍요로움과 넉넉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음식이 바로 ‘삼합’이 아닐까 싶다.

찬바람 부는 겨울이 제철, 부산스타일 삼합의 주인공은?

삼합의 대표주자 홍어삼합을 필두로 장흥에서는 한우와 조개관자를 더한 한우삼합이, 여수에서는 새조개가 메인을 차지한 새조개삼합이 등장했다.

또 완도에서는 전복을 내세운 전복삼합이 선보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해안을 품은 지역이 삼합을 즐길 여지가 더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각 지역의 특산물은 삼합의 재료로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육지대표와 바다대표에 묵은지 등이 더해진 형태로. 자, 이쯤 오늘의 주인공을 소개한다.

부산 낙동강 하구의 명지 출신, 갈미조개다.

갈미조개. 이름부터 갈매기가 그려진다. 그 속살이 갈매기의 부리를 닮았다고 ‘갈미조개’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명은 ‘개량조개’. 또 낙동강 하구 명지에서 많이 난다고 ‘명지조개’라고도 알려졌다.

그 외에도 황갈색 껍데기 덕분에 ‘명주조개·노랑조개’라고도 부른다.

다슬기를 강원·충북에서는 ‘올갱이’, 경상도에서는 ‘고디’라고 부르는 것처럼 지역마다 부르는 이름이 조금씩 다른 것. 여기서는 ‘갈미조개’로 통일한다.

이곳 주민들에 따르면 낙동강 하구 명지에서 갈미조개가 다량 발견된 것은 1989년 낙동강 하굿둑이 자리하면서 부터다.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곳에 자리한 유연성 때문일까.

명지 갈미조개는 부드러운 육질에 달큰하고 담백한 맛으로 유명하다.

이는 먼저 일본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초창기 채취한 갈미조개의 대부분이 일본으로 수출된 이유다.

명지에서 갈미조개를 맛보게 된 것은 그보다 역사가 짧다.

10년 전 즈음 지금의 명지 선창회타운의 한 음식점에서 갈미조개를 선보인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전해진다. 귀한 갈미조개, 언제 가장 맛있을까?

굴이나 꽃게처럼 갈미조개도 찬바람 부는 겨울이 제철이다.

그중에서도 오뉴월 산란기를 앞둔 1~2월이 가장 맛이 좋다고 알려진다.

찬바람 불어대는 이 겨울, 물오른 갈미조개를 맛보러 명지 선창회타운으로 가보자.

낙동강 하구는 철새들만의 쉼터가 아니다. 을숙도를 관통하는 낙동강 하굿둑을 따라가면 명지IC에 닿는다.

여기서 신호공단·명지새동네 방면으로 좌회전후 직진하면 명지선창회타운이 근방이다.

짠물과 민물이 넘나드는 이곳 낙동강 하구에 을숙도를 마주하고 명물횟집(051-271-3339)·선창회조개구이(051-271-2205) 등 갈미조개 전문점들이 몰려있다.

갈미조개, 그의 변신은 어디까지?

사이좋게 모인 음식점들은 ‘갈미조개수육·샤브샤브·전골·탕·갈삼구이·갈오구이’라고 적힌 문구로 식객들을 반긴다.

갈미조개를 맛보는 방법이 이리 다양할 줄이야. 이중 갈미조개와 삼겹살이 더해진 갈삼구이는 묵은지와 콩나물 등을 더해 맛보는 음식이다.

어떤가. 짜임새로 보아하니 갈미삼합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은가?

취향에 따라 갈미조개와 오리고기를 더한 갈오구이로 갈미삼합을 맛봐도 좋다.

명지에서 갈미조개와 함께라면 삼합의 변신은 무죄다.

“우리집은예 우리 아저씨가 다대포나 가덕도 근처에서 갈미조개를 이마이 잡아오지예.

수족관에서 하루 정도 해감해가꼬 매매 문때서 내놉니더.

모래밭에 기댕기서 모래가 천지빼까리지예. 손이 억수로 마이 가는 놈 아인교.”

까꼬막을 굽이굽이 돌아 걷는 길 부산 동구 초량이바구길

까꼬막을 굽이굽이 돌아 걷는 길 부산 동구 초량이바구길

까꼬막을 굽이굽이 돌아 걷는 길 부산 동구 초량이바구길

200년 전 다산의 마음이 통하는 路 예서 철학을 묻다

세상의 숱한 길들 너머로 사람 살아가는 마을길이 있다.

부산 동구 초량동의 초량이바구길을 걸으며 타임머신을 탄 듯 과거로 여행을 떠나본다.

‘이바구’란 ‘이야기’의 부산 사투리.

초량이바구길은 일제강점기 부산항 개항부터 해방 후 50~60년대, 가히 한국의 산업혁명기라 할 만한 70~80년대 굴곡진 역사까지 고스란히 품고 있다.

부산 사람들이 그 길에서 겪어낸 세월의 아픔과 기쁨을 길 따라 풍경 따라 조심조심 풀어낸다.

초량이바구길은 부산역에서 길 하나를 건너자마자 시작된다.

부산역과 부산항이 있어 부산의 종가라고 불리는 부산 동구의 차이나타운 옆이다.

번잡한 부산역을 벗어나 이바구길로 들어서면 바로 초량동의 옛이야기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초입에는 1922년 부산 최초의 근대 병원으로 쓰였던 백제병원 건물부터 부산 최초의 창고였던 남선창고터 등이 있다.

남선창고는 당시 부산의 생선 창고로 쓰이며 북쪽에서 잡아온 싱싱한 명태를 보관했던 탓에 명태고방이라고도 불렸다.

지금은 터만 남았지만 사람들의 아련한 추억과 이야기만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동네를 얼마쯤 걸어가자 한강 이남 최초의 교회라는 초량교회가 모습을 드러낸다.

최초라는 수식어는 이 길에서 흔히 쓰이는 단어다.

초량초등학교와 초량교회는 과거는 물론 지금도 여전히 이곳 사람들의 학교이자 교회다.

세월을 잇는 징검다리처럼 여전히 생활의 중심에 들어앉아 있다.

분주한 일상 속에 그 길을 무시로 스치며 간간이나마 옛것에 대한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장소들이다.

사람들은 현재를 살면서도 여전히 옛날을 기억한다. 사람이 주인인 그 길 위에서 과거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문득문득 담벼락에 마련된 담장갤러리와 동구 인물사 담장도 만난다. 그 담장 곁에서 마실 나온 할머니도 만난다.

스물두 살에 시집와 여든여섯 살이 된 지금까지 여전히 이곳에 사신다는 이말남 할머니의 희미한 웃음 속에서 희로애락의 세월을 짐작한다.

할머니 얼굴의 주름 마디마디에 세월의 흔적과 추억이 가득 묻어난다.

길가에 붙은 패널과 마실 나온 동네 할머니 덕분에 살아보지 않은 그 시절 골목을 상상해본다.

저마다의 시간과 공간, 눈물과 기쁨이 스며 있는 미로 같은 우여곡절의 길에서 애잔한 우리네 인생 이야기를 읽는다.

길은 고불고불 골목을 헤매며 아기자기한 길을 내다가 문득 가파른 계단을 내놓는다. 168계단이다.

이 계단 앞에서는 누구라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이 길을 밤낮으로 오갔을 사람들에게는 이 계단 역시 아침저녁으로 맞닥뜨리는 생활의 한 부분이었을 테다.

계단은 바라보기만 해도 숨이 찬다.

누군가는 노동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오르내렸을 계단, 누군가는 학교에 가기 위해 고사리 같은 손 오므리고 다녔을 계단,

누군가는 술에 취해 휘청거리며 올랐을 계단, 그 계단을 오르며 앞서간 무수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현재를 걸으며 과거를 만나고, 과거를 바라보다가도 문득 현재와 맞닥뜨리는 것. 이것이 사람 사는 골목을 걷는 맛이자 묘미다.

파란만장했던 우리 근현대사의 흔적은 현재의 삶 속에서도 얼핏얼핏 모습을 드러낸다.

조바심내지 않고 천천히, 이끄는 힘 없이도 저 스스로 그렇게 옛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동시에 현재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한 번에 오르기엔 힘에 부칠 것 같더니 다행히 몇 계단 오르지 않아 아담한 전망대가 걸음을 쉬게 한다.

카페테리아를 갖춘 이곳은 ‘김민부 전망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가곡 <기다리는 마음>의 작사가 김민부 시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지난 시절 먼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로 나간 내 님은 언제 오시나’ 기다리던 사람의 마음을 짐작해볼 수 있는 장소다.

확 트인 시야에 마음까지 환하게 열린다. 이 전망대에서는 동구와 중구, 남구 일대는 물론 부산역과 부산항, 공사 중인 북항대교와 영도까지 시원하게 내다보인다.

부산에 와서 이곳을 지나친다면 영 아쉬울 판이다.

무엇보다 파란 바다와 맞닿은 하늘이 선사하는 청량감이 좋다. 머리카락을 날리는 바닷바람이 시름을 잊게 한다.

혼자만의 사색을 즐기기에도 좋고, 연인들 데이트 장소로도 좋다.

200년 전 다산의 마음이 통하는 路 예서 철학을 묻다

200년 전 다산의 마음이 통하는 路 예서 철학을 묻다

200년 전 다산의 마음이 통하는 路 예서 철학을 묻다

절절 끓는 구들방에 등 지지는 이 맛 영암 월인당

갈수록 정치는 낡고, 경제는 어렵다. 위정이 아닌 위민의 마음을 가진 사람과 차 한 잔 마시고 싶다면

남도답사 1번지 강진으로 가보자. 강진에는 200여 년 전 오직 백성을 위한 충정으로 평생을 살았던 천재학자 다산 정약용의 아우라가 가득하다.

“이런 곳이라면 나도 몇 달 만 유배당했으면 좋겠네.”

동백나무가 늘어서 붉은 꽃을 피우는 오솔길을 지나 다산초당 천일각에 서서 호수 같은 강진만을 마주하자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과연 하늘같은 임에게서 버림받고 ‘땅 또는 바다의 끝’으로 유배당한 자들의 삶은 어떠했을지 궁금해진다.

지난날의 영화를 잊지 못한 채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술과 가무로 지내다 끝내 쓸쓸한 생을 마감한 이도 있었겠고,

성총회복(聖寵回復)이 있었으나 더 이상 권좌에 욕심을 내지 않고,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며 마지막까지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어찌하면 더욱 풍요롭게 해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뇌로 평생을 바친 자도 있었을 터.

감히 짐작건대, 망망대해 고독한 귀양지에서 떠나온 임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

그리고 분노는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었던 지극히 진실 된 감정이리라.

그래서일까. 비극의 상황에서도 절망치 않고 수많은 저술로 자신을 멋스럽게 승화시킨 유배자들의 열정은 더욱 빛을 발한다.

다산(茶山), 불후의 저작을 남기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 그도 빛나는 열정을 가진 이 중에 하나였다.

학문을 사랑했던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18년 동안 고락을 함께 하였으나 순조가 즉위하자마자 당쟁에 휘말리면서 난신적자(亂臣賊子)로 몰려

경북 장기를 거쳐 강진으로 유배당하였던 다산.

나고 자란 고향은 아니지만 18년의 귀양살이 중 약 10여년을 여기서 보냈기에, 정신적 고향이라 일컬어지는 강진 곳곳에는 그의 흔적들이 산재해있다.

봄이 되면 성숙한 여인의 붉은 순정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동백이 발 길 멈출 곳 없는 나그네 마음에 불을

지피는 백련사의 부도밭 주변의 정취(다산과의 교류가 있었던 혜장선사가 있었던 절)와 다산이 8년 동안 거주하면서 ‘목민심서’,

‘경세지표’ 등의 불후의 저작들을 만들어내었던 다산초당, 그리고 혜장선사와 다산이 함께 오르며 생각을 정리하고,

삶의 의미를 사색하던 오솔길까지… 잠시 여유를 갖고 찬찬히 다산의 흔적을 더듬어보자.

“차를 마시는 백성은 흥하고, 술을 즐겨 마시는 백성은 멸한다.”

다산(茶山)이라는 호에서 알 수 있듯 다산 정약용은 차와 관계가 깊다.

차와의 인연 또한 백련사의 주지스님이었던 혜장선사와의 만남에서 시작된 것이다.

다산이 혜장선사를 처음 만난 것은 강진으로 유배 온 이듬해.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마땅히 교류할 사람을 찾지 못했던

다산은 백련사에 갔다가 혜장선사와 조우하게 된다. 그 당시 혜장선사는 추사 김정희의 스승인 옹방강이

‘해동의 두보’라고 칭송할 만큼 뛰어난 스님이었고, 불가의 학승이면서도 유교의 경전에 관심이 깊었다.

이런 혜장선사는 다산 정약용에게 용돈도 주고, 귀한 차도 가끔 내려주기도 하였다 한다.

그러다가 다산이 다산초당에 기거, 만덕산 고갯길을 넘는 오솔길을 넘나들면서 본격적으로 교류하게 됐다.

그리고는 차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함께 차를 마시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다산의 다도애(茶道愛)는 더욱 깊어지기 시작했고, 혜장의 유교지식 또한 넓어지기 시작했다.

절절 끓는 구들방에 등 지지는 이 맛 영암 월인당

절절 끓는 구들방에 등 지지는 이 맛 영암 월인당

절절 끓는 구들방에 등 지지는 이 맛 영암 월인당

괴산 화양동 청풍명월 을 따라 자연을 느낀다

잘 마른 소나무 장작 두어 개를 아궁이에 던져 넣자 금세 불이 옮겨 붙더니 장작 타는 정겨운 냄새가 좁은 뒷마당을 가득 채운다.

황토 굴뚝에선 구수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이불을 깔아둔 아랫목에 손을 넣는 순간 ‘앗 뜨거’ 소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영암 땅 너른 들녘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월출산과 은적산 사이에 자리 잡은

월인당은 한국인의 DNA에 새겨진 ‘구들장의 추억’을 되살려 주는 소박한 한옥민박이다.

내력 있는 종택도, 유서 깊은 고택도 아니건만 주말마다 예약이 밀려드는 까닭은 황토 구들방에 등 지지는 그 맛이 각별해서다.

모정마을 토박이인 김창오 씨가 월인당을 지은 것은 5년 전이다.

구례 사성암을 지은 김경학 대목과 강진 만덕산 기슭의 다산초당을 지었던 이춘흠 도편수가 1년 3개월간 함께 공을 들였다.

규모는 단출하다. 방 세 칸에 두 칸짜리 대청, 누마루와 툇마루가 전부다.

담장은 대나무 울타리로 대신하고, 넓은 안마당엔 잔디를 깔았다.

방 세 칸은 모두 구들을 넣고 황토를 깐 위에 한지장판을 바른 ‘장작 때는’ 방이다. 바닥은 뜨끈하고 위는 서늘하니 자연스럽게 공기가 순환하는 구조다.

한옥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구들방을 만들었지만, 덕분에 손님맞이 하루 전부터 아궁이에 불을 때야 하는 번거로움과 수고가 따른다.

바깥주인의 ‘장작 때는’ 수고보다 한수 위는 안주인의 ‘풀 먹이기’ 정성이다.

한번 사용한 이불은 세탁 후 일일이 풀을 먹여 내놓는다. 손님 입장에선 절절 끓는 방에서 사각거리는 솜이불을 덮고 자는 호사가 고마울 따름이다.

월인당 세 개의 방은 저마다 특징이 있다. 마을 앞 너른 들과 월출산이 가장 잘 보이는 ‘들녘’ 방은 측면 툇마루를 단독으로 사용할 수 있다.

월인당 현판이 걸린 정중앙 ‘초승달’ 방에서는 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쪽 끝 ‘산노을’ 방은 누마루와 바로 연결되는 구조라 가장 인기가 많다.

방마다 욕실과 싱크대, 냉장고를 갖춰 먹고 자고 씻는 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집을 지을 때 툇마루와 누마루는 특별히 공을 많이 들였다.

툇마루는 집안으로 들어서는 첫 관문이자 집 안과 밖을 연결해 주는 공간이다.

꼬마 손님들에게는 왕복 달리기를 할 수 있는 놀이터이기도 하다.

삼면이 툭 트여 햇살과 바람과 달빛이 드나드는 누마루는 차 한 잔의 여유 혹은 술 한 잔의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정자 역할을 한다.

월출산 위로 보름달이 뜨는 밤 누마루에 나와 앉으면 ‘달빛이 도장처럼 찍히는 집’이라는 이름처럼 안마당이 달빛으로 환하다.

집주인이 꼽는 최고의 달빛 풍경은 월인당이 아니라 마을 끝에 있는 원풍정(願豊亭)에서 바라보는 장면이다.

월출산 위로 둥실 솟아오른 달이 저수지에 교교한 빛을 풀어놓는 장면이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는 것이다.

원풍정 기둥에는 이른바 ‘원풍정 12경’을 적은 12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지남들녘에 내리는 밤비(指南夜雨), 구림마을의 아침밥 짓는 연기(鳩林朝烟), 도갑사에서 들려오는 석양의 종소리(岬寺暮鍾) 등

‘원풍정에서 내다보이는 12경’은 마을 벽에 시와 그림으로도 풀어 놓았다.

월인당에 묵는다면 꼭 마을 산책을 해보아야 하는 이유다.

10월 초 방문했을 때 모정마을은 민박을 겸한 한옥을 짓는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11월 말이면 15채의 새로운 한옥이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