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운동의 큰 별이 태어난 역사의 땅 홍성
항일운동의 큰 별이 태어난 역사의 땅 홍성
충남 홍성군에서는 역사 속의 위인들이 많이 배출됐다.
고려 말기의 큰스님 보우국사, 명장이자 재상 최영, 사육신 성삼문, 조선 후기의 문신 남구만, 조선 말기의 순국지사 이설,
독립운동가 김복한 선생 등이 홍성 출신이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펼친 홍성 출신의 대표적
인물로 만해 한용운 선생과 백야 김좌진 장군이 손꼽힌다. 최근의 인물로는 고암 이응노 화백이 있다.
홍성군은 1914년 홍주군과 결성군이 합쳐지면서 탄생했다.
홍성 읍내에 자리한 홍주성역사관에서 선현들의 발자취와 홍주읍성의 예전 모습, 홍성의 역사 등을 만나볼 수 있다.
홍성군청 바로 옆에 있는 홍주읍성은 고려 시대에 축조됐으며, 최대 길이가 1772m에 이르렀으나 810m만 보존되었다.
성내 관아 건물도 35동이었는데, 현재는 조양문과 홍주아문, 안회당(동헌), 여하정만 남아 있는 실정이다.
홍주성역사관에서 홍성군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기초 지식을 쌓았다면 김좌진장군생가지부터 가보자.
서해안고속도로 홍성 IC로 나가자마자 쉽게 찾을 수 있는 역사 시설이다.
출입문 왼편에 생가, 오른편에 기념관이 자리하고, 300m 정도 안으로 들어간 야산 자락에 사당이 있다.
생가 대문에 붙은 ‘김좌진’ 문패 글씨가 선명해서 아직도 장군이 살아 계신 듯 여행객의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마당으로 들어서면 안채, 사랑채, 광, 우물이 보인다. 서향으로 앉은 안채 뒤편 장독대를 돌 때면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눈감은 장군의 일생이 안타깝다.
1998년 문을 연 백야기념관으로 이동하면 장군의 흉상을 비롯해 독립운동의 이모저모를 자세히 볼 수 있다.
특히 청산리대첩 모형이 눈길을 끈다. 김좌진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청산리계곡으로 유인·초토화하는 장면이다.
김좌진(1889∼1930) 장군은 1911년 군자금 모금 활동으로 투옥됐고,
1915년 독립운동 자금 모금 중 체포되어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1917년에는 만주로 가서 독립군을 조직하고 항일 무장투쟁을 펼쳤다.
특히 청산리대첩은 일제강점기에 기록적인 성과를 거둔 전투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록에 따르면 청산리대첩에서 일본군은 전사자 1200여 명, 부상자 2100여 명이었으나
독립군은 전사자 130여 명, 부상자 22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장군이 남긴 〈단장지통〉이라는 시는 가슴에 새기지 않는 관람객이 없다.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 칼끝에 찬서리가 고국생각을 돋구누나 /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말인가 / 단장의 아픈마음 쓰러버릴 길 없구나.’
이곳에는 문화관광해설사가 상주하면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관람객이 요청할 때마다 안내해준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김좌진 장군 생가 앞길을 따라 남쪽의 결성농요농사박물관 방면으로 10분 정도 내려가면 승려이자 시인이요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생의 생가지에 닿는다. 먼저 들러볼 곳은 만해문학체험관(매주 월요일 휴관).
동상과 초상화를 보면서 예의를 갖추고 실내 전시실로 들어서면 만해의 문학과 철학을 반영하는 유물 60여 점이 있다.
특히 유천(만해의 아호)이 서당에서 공부하던 모습, 서당에서 한학을 가르치는 모습, 글 읽기에 정신이 팔려 참새가 벼를 다 먹어
치운 장면, 만주에서 마취 없이 총탄 제거 수술을 받는 장면, 딸 영숙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모습 등
만해의 일생이 자그마한 인형으로 재현돼 위인의 삶을 친근하게 배울 수 있다.
그중에서도 설악산 오세암에서 〈님의 침묵〉을 집필하는 장면을 재현한 방이 압권이다.
12폭 병풍을 뒤에 두르고 단정하게 앉은 선생은 호롱불에 의지한 채 붓으로 〈님의 침묵〉을 써 내려간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되는 〈님의 침묵〉은 초가 형태의 생가 툇마루 흙벽에도 걸려 있다.
만해의 님은 조국, 민족, 생명의 근원 등이다. 불교의 힘으로 이별의 슬픔을 이겨내려는, 조국 광복을 희망하는 마음을 담았다.
만해는 1905년 백담사에서 득도하고 1910년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했으며, 1919년 삼일운동 때는 민족 대표 33인으로 활동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이후 불교의 대중화, 독립사상 고취, 문학 활동을 펼치다가 1944년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했다.
심우장을 지을 때 조선총독부를 마주 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