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해인사 장경판전과 대장경판 불심으로 새기고 지혜로 보존하다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과 대장경판 불심으로 새기고 지혜로 보존하다
고려 시대, 몽골과 전쟁으로 나라가 어지럽고 불안할 때 옛사람들은 목숨 부지할 방책을 찾는 대신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 불사를 일으켰다.
부처의 일생과 가르침을 새긴 대장경(국보 32호)을 제작한 것이다.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대구 부인사에 봉안하던 대장경이 불에 타자,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제작했다.
현존하는 대장경 중 가장 방대하고 오래된 것으로, 마치 한 사람이 새긴 듯 동일하고 아름다운 글자체
오.탈자가 적은 정교함, 완벽한 내용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장경을 봉안한 장경판전(국보 52호)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다.
조선 성종 때(1488년) 완공되어 5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대장경판을 보관하면서 건축적으로 그 원형이 잘 보존된 가치를 인정받았다.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뒤편에 자리한 장경판전은 사찰 전체를 굽어보듯 경내 가장 높은 곳에 긴 담장을 두르고 있다.
길이 61m, 폭 9m인 남쪽의 수다라장과 북쪽의 법보전, 양옆 동사간판전과 서사간판전으로 구성되며, 수다라장 입구까지 일반인의 접근을 허용한다.
원형 그대로 간직한 세계적 보물인 만큼 훼손을 막으려는 취지다.
관람이 허용된 수다라장 바깥의 왼편을 돌아보면 나무로 제작된 대장경판이 어떻게 8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온전히 보존되었는지 알 수 있다.
벽면 위아래 창살문 크기를 달리하고, 다시 앞쪽과 뒤쪽의 창살문 크기를 엇갈리게 만들어 장경판전 안으로 들어온 공기가 내부를 순환해서 빠져나가도록 한 것이다.
경판을 보존하는 데 알맞은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 바닥을 깊게 파고 그 위에 소금과 숯, 횟가루, 마사토를 차례로 깔았다.
오늘날의 첨단 건축 기술로도 흉내 낼 수 없는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장경판전에 숨은 과학적 원리보다 놀라운 사실은 해인사가 수차례 화재로 소실되는 동안 장경판전은 한 번도 불이 난 일이 없다는 점이다.
불법의 보호를 받은 것일까? 장경판전 담장 아래로 보이는 사찰 지붕들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불가의 세계가 있음을 전하는 듯하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에 나뉘어 봉안된 팔만대장경은 8만 4천 번뇌를 의미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은 목판 8만 1천여 장으로, 새겨진 글자가 약 5천 2백만 자에 이른다.
목판 한 장 크기는 70×24cm 내외로, 높이 쌓으면 3.2km, 길게 연결하면 60km라니 실로 엄청난 양이다.
목판마다 양 끝에 각목을 붙여 뒤틀리지 않게 했고, 네 귀퉁이에는 금속 장식을 해서 목판이 서로 붙는 것을 방지했다.
전면에는 옻칠도 했다. 구양순체로 새겨진 글자의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고, 오.탈자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더욱 놀랍다.
대장경판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수다라장 왼편 끝에 복제한 대장경판과 유네스코 인증서를 함께 전시한다.
대장경과 대장경을 봉안한 장경판전이 세계적 보물인 만큼 해인사 역시 불교적 의의와 역사적 가치를 되새겨야 할 천년 고찰이다.
불보사찰인 양산의 통도사, 승보사찰인 순천의 송광사와 더불어 삼보사찰로 꼽히는 해인사는 부처의 가르침을 새긴 대장경판을 보관하여 법보사찰로 불린다.
신라 애장왕 때(802년) 창건된 고찰로 맨 위쪽의 장경판전 아래로 대적광전, 구광루를 비롯해 크고 작은 전각 20여 채가 차례로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