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고원길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고갯길

진안고원길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고갯길

진안고원길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고갯길

보령 오천항 키조개 서해의 품에서 캐낸 보물

‘북에는 개마고원, 남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진안은 땅이 높다.

그 땅 진안의 고원 마을과 잊힌 고갯길을 다시 이어 만든 것이 진안고원길이다.

평균고도 300m, 고원 마을 100개, 고원 고개 50개, 총길이 200㎞. 하늘땅, 진안고원길은 그렇게 태어났다.

진안고원길 1구간은 이름하여 ‘고개 너머 백운길’이다.

4개의 고개를 넘으면서 백운면의 여러 마을을 만나고, 섬진강 최상류의 강변길을 따라 백운들을 감상하는 길이다.

영모정에서 시작해 미룡정-닥실고개-신전-배고개-고원쉼터-상백암-닥실고개-은안-흙두고개-원반송-석전-무등-경우정-모른고지-원덕현에 이르는 총 10.2㎞ 구간이다.

1구간 시작점은 신의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영모정이다.

돌너와를 얹은 독특한 지붕에 먼저 눈이 간다. 정자 앞 계곡은 깊고 물빛이 신비롭다.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수상했다는 입간판에서 알 수 있듯 숲의 자태가 빼어나다.

영모정에서 몇 발짝 떨어진 미룡정이 두 번째 도착점이다.

다리를 건너 정자에서 굽어보는 계곡이 시원하다. 미룡정을 지나면 땡볕이 쏟아지는 농로다.

닥실고개를 넘는 내내 좌우로 넓은 산밭이 펼쳐져 얼핏 대관령을 연상시킨다.

지금은 고구마가 한창이고 가을엔 배추밭으로 변신한다. 닥실고개를 넘으면 첫 마을인 신전마을이다.

소가 가로누운 형상이라 하여 ‘와우혈’이라 했다. 마을회관을 지나 그늘 좋은 느티나무 아래에서 일하던 동네 주민이 눈인사를 건넨다.

수령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 덕분에 마을에서 가장 시원한 곳이니 쉬었다 가라고 권한다.

걸음도 가볍게 배고개로 향한다.

고개를 넘으니 농부쉼터라고 적힌 아담한 원두막이 나온다.

원래는 밭주인이 쉴 요량으로 만든 원두막인데, 고원길을 만들면서 노란 페인트를 칠해 ‘고원쉼터’로 재탄생했다.

얼음물을 꺼내 목을 축이고 쉼터를 떠난다. 이어지는 마을은 상백암. 마을 앞 냇가에 하얀 차돌이 많아서 백암, 윗마을이라 상백암이다.

상백암에서 물길 따라 상류로 더 올라가면 피서철에 인기 있는 백운동계곡이다. 상백암도 물놀이를 즐기기에는 충분하다.

상백암을 지나면 또 하나의 닥실고개가 나온다. 고개 넘어 은안마을은 은번마을이라고도 부르고, 이정표에도 은번마을이라고 표기돼 있다.

은안마을과 원반송마을 사이에 놓인 흙두고개는 차량은 물론 경운기도 지나갈 수 없는 좁은 오솔길이다.

온전히 두 발로 걸어서 넘는 고갯길이다. 흙길로 이어진 고개를 넘어서면 아담한 방죽이 나오고, 방죽 아래에 토끼 입간판이 반긴다.

논길을 지나면 원반송이다. 400여 년 된 반송나무가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소나무는 몇십 년 전 고사했다.

대신 강변에 느티나무를 비롯한 숲이 울창하다. 강변에 나란히 자리 잡은 학남정, 개안정은 도시락을 먹기에 그만인 곳이다.

정자 아래로 보이는 강은 폭이 좁아 계곡처럼 보이지만 섬진강 상류다.

이 물길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섬진강 발원지인 데미샘이 나온다.

물이 제법 깊고 양쪽으로 나무가 우거져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 덕분에 피서철이면 물놀이 오는 이들이 많다.

점심을 먹고 다시 길에 오른다. 고원길 이정표를 따라 농로를 걷다 보면 석전마을, 무등마을이 차례로 나온다.

강변을 끼고 이어진 길이라 그늘은 없어도 기분은 상쾌하다. 원반송마을부터는 들이 넓게 펼쳐지고 그 뒤로 마이산이 눈에 들어온다.

무등마을을 지나 도로를 건너 야트막한 언덕길을 돌아가면 1구간 종점인 원덕현마을에 이른다.

1구간 끝 지점이자 내동산(백마산) 옆구리를 반 바퀴 돌아가는 2구간 시작점이기도 하다.

1구간은 총 10.2㎞로 3시간 30분, 도시락 먹는 시간에 쉬는 시간까지 포함해도 4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4개의 고개와 7개 마을을 찾아가는 고원길 1구간은 주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농로다. 아이들과 같이 걸어도 좋을 정도로 편안하다.

첫번째 닥실고개가 해발 435m, 배고개가 400m, 나머지 두 고개는 395m다. 마을마다 정자 형태로 된 쉼터와 화장실이 마련돼 있다.

단, 매점이나 식당이 한 군데도 없어 물과 간식, 도시락 등은 직접 준비해 가야 한다. 안내 표시가 잘 되어 있으므로 길을 잃을 염려는 전혀 없다.

보령 오천항 키조개 서해의 품에서 캐낸 보물

보령 오천항 키조개 서해의 품에서 캐낸 보물

보령 오천항 키조개 서해의 품에서 캐낸 보물

제주 엉또폭포와 천제연 제1폭포

보령 북부권의 모든 길은 오천과 통한다는 말이 있다.

백제시대에 오천항이 보령의 주요 항구와 군항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후 오천항은 작은 어촌 항구로 위세가 꺾였지만, 근래 들어 키조개로 인해 다시 옛 영광을 찾아가는 중이다.

키조개 전국 생산량의 60% 정도를 오천항이 차지하니 전국 각지의 미식가들이 포구로 모여든다.

진달래 피는 4월부터가 키조개 제철이다.

수심 40m에서 머구리가 캐내

‘오천’의 한자어는 ‘자라 오(鰲)’, ‘내 천(川)’을 쓴다.

오천을 비롯한 천수만 일대의 지형이 마치 자라와도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다 양면에 있는 산이 방파제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아무리 심한 폭풍우에도 피해가 없고, 수심이 깊어 간만의 차로 인한 선박의 통행이 전혀 불편하지 않은 천혜의 항구다.

항이라고 하지만 규모는 작다. 여행객을 위한 변변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지도 않다.

바닷가를 따라 식당이 있고, 식당에서 마음에 드는 해산물을 구입할 수 있는 정도다.

그럼에도 봄철을 맞아 오천항을 찾는 이유는 국내 최대의 키조개 산지이기 때문이다.

키조개는 수심 20~50m의 깊은 모래흙에 수직으로 박혀 있다.

낚시로 잡는 것도 아니고, 그물로 걷어 올리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사람이 직접 바닷속에 들어가 하나하나 건져 올린다.

키조개를 캐는 일은 머구리의 몫이다. 이름도 생소한 머구리는 잠수부의 속칭이다.

바닷물에 들어가 고기를 잡거나 해산물을 채취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머구리는 물때에 맞춰 바다로 나가 작업을 한다.

짧게는 3시간, 길게는 6시간 이상 바닷속을 헤매며 키조개를 잡는다.

작업이 가능한 날은 보름 정도. 사리 때는 물살이 거세서 작업을 못하고 조금 때만 작업한다.

오천항 머구리들은 키조개를 찾아 수심 40m 이상 들어가는 일이 다반사다.

힘들고 위험한 일이지만 키조개가 삶을 지탱해주는 돈줄이니 어쩔 수 없다.

장비라야 물안경과 갈퀴가 전부다. 잠수복을 입는다고는 하지만 장비가 너무나 단출하다. 여기에 공기 호스가 연결된 호흡기가 전부다.

심해 잠수부들이 사용하는 튼튼한 헬멧 같은 것은 키조개 채취에 방해가 돼서 없는 게 낫다고 한다.

머구리가 바닷속으로 뛰어들면 잔잔한 수면 위로 공기방울이 하나둘 올라온다.

넓은 바다에서 머구리의 흔적은 이게 전부다.

배에 남은 선원들이 해줄 수 있는 건 그의 신호를 기다렸다가 어망을 내려주고, 공기 호스를 통해 공기가 잘 주입되고 있는지 혹 호스가 꼬이지는 않았는지 살피는 게 전부다.

작업이 끝날 때까지 머구리는 2시간이든 3시간이든, 춥고 어두운 바닷속을 홀로 걸으며 고군분투해야 한다.

사실 머구리에게 작업시간이란 딱히 정해진 게 아니다. 정해진 물량을 채우면 작업이 끝난다.

만일 작업장을 잘못 찾아 들어가면 허탕만 치고 종일 고생해야 한다.

머구리가 하루에 채취할 수 있는 키조개는 3,000미로 제한하고 있다.

어족자원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좋은 값을 받기 위해서는 8~9년 성장한 25~28cm 크기의 키조개를 캐야 한다.

맑은 물이 들어오는 4~5월은 바닷속 시야가 밝아 작업하기 좋은 철이다.

이때 작업을 많이 해서 수입을 늘리는 것이 머구리들의 소망이다.

제주 엉또폭포와 천제연 제1폭포

제주 엉또폭포와 천제연 제1폭포

제주 엉또폭포와 천제연 제1폭포

정읍 샘고을시장 재래시장 100년 전통을 잇다

제주도에 비만 내렸다 하면 가장 붐비는 곳이 바로 엉또폭포다.

심지어 태풍의 비바람을 뚫고서도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니, 비 오는 날 이만한 인기 여행지가 또 어디 있을까.

이름까지 독특하다. 제주어로 ‘엉’은 바위보다 작은 굴을, ‘또’는 입구를 뜻한다.

‘작은 굴로 들어가는 입구’란 의미를 품은 엉또폭포는 가까이 다가가야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다.

엉또폭포는 한라산 남쪽 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악근천 중상류 지역에 위치한 절벽 폭포이다.

제주의 많은 하천들이 그렇듯이, 악근천도 평소엔 물이 말라 있는 건천이다.

때문에 엉또폭포 또한 평소에는 어디서도 폭포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만큼 귀한 폭포이니 웬만한 공을 들이지 않고서는 보기가 힘들다. 일단 비가 와야 하고, 그것도 꽤 많은 양이 한라산을 흠뻑 적셔주어야 한다.

게다가 엉또폭포는 웬만큼 내리는 비에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한라산 산간 지역에 70mm 넘는 비가 오거나 장마철이 되어야 그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다.

산간 지역에 큰비가 오면 언제 물이 말랐었냐는 듯, 메마른 절벽은 웅장한 위용을 뽐내는 폭포로 변신한다.

폭포의 높이는 50m 정도지만 수직으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가 어마어마하다.

폭포수가 흘러내리며 내는 굉음이 우레와도 같다. 폭포수를 직격탄으로 맞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엉또폭포 아래로는 직경 20m 이상의 웅덩이가 형성되어 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엉또폭포는 아는 이들만 알음알음 찾아오는 숨은 명소였다.

그러다 2011년 KBS 예능 프로그램인 <1박2일>에 소개되면서 관광객이 급격히 늘었다.

이후 폭포까지 진입로가 정비되고 주차장이 만들어지는 등 편의시설이 확충되면서 제주도의 명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비 오는 날’이라는 한정된 시간에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몰리다 보니 교통체증에 폭포까지 다가가는 데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불편함도 있다.

그럼에도 엉또폭포는 ‘비 온 후 폭포’라는 자신만의 색깔이 확실한 매력적인 여행지임이 틀림없다.

엉또폭포와 함께 비 오는 날 생겨나는 폭포가 하나 더 있다. 중문관광단지 안에 자리한 천제연 제1폭포다.

옛날 하늘에서 일곱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고 갔다는 전설을 품은 천제연폭포는 상, 중, 하 총 3개의 폭포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천제연 제2, 3폭포는 평소에도 물줄기가 흐른다. 제1폭포 아래 소를 이룬 지역에 끊임없이 용천수가 흘러나오는 덕분이다.

이에 반해 상류 쪽에 위치한 제1폭포는 비가 내려야 폭포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엉또폭포만큼은 아니지만 천제연 제1폭포 또한 나름 귀한 몸임을 자랑한다.

천제연 제1폭포는 길이 22m에 수심이 21m나 된다. 비가 온 직후 생성된 천제연폭포는 그야말로 엄청나다.

낙차가 크지는 않지만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평소 건천일 때는 그렇게도 평화로워 보이던 곳이 무시무시한 굉음으로 가득 찬다.

잔잔한 호수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던 수직 절리가 끊임없이 쏟아지는 폭포수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다.

비가 너무 많이 올 때에는 소의 물이 넘치기도 한다. 계단 위까지 물이 차는 경우도 있으므로 항상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

천제연 제1폭포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비가 오고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방문하면 좋다.

하지만 언제 다시 물이 마를지 모르니 이 또한 복불복이다.

비 온 뒤에는 제2, 3폭포도 평소와 모습을 달리한다. 특히 제2폭포가 인상적이다.

바람이 관람 데크 쪽으로 불어올 때면 사방에 물보라가 친다.

정읍 샘고을시장 재래시장 100년 전통을 잇다

정읍 샘고을시장 재래시장 100년 전통을 잇다

정읍 샘고을시장 재래시장 100년 전통을 잇다

제주를 닮다 지오푸드 제주를 담다

정읍에는 전북특별자치도에서 제일가는 시장이 있다.

국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큰 시장이다. 1914년에 처음 문을 열어 그 역사만도 100년을 자랑한다.

100년의 역사를 증언하듯 오래된 대장간과 순대국밥집, 뻥튀기 아저씨는 예나 지금이나 건재하다.

대를 이어 장사하는 집도 있고 새로 들어선 지 얼마 안 된 집도 있지만

100년 된 시장은 그렇게 매일매일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생기가 넘친다. 그야말로 생생한 삶의 현장이다.

샘고을시장의 이름은 원래 정읍 제1시장이었다.

정읍에서 제일 크다고 해서 일제강점기 관료가 행정 편의를 위해 그렇게 이름 지었다.

이름에 뜻을 더하고자 시민 공모로 새로 지은 이름이 샘고을시장이다.

시장이 있던 자리에 샘이 많아 ‘샘이 있는 고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는 매 2일과 7일에 열리는 오일장이었다.

그러다가 시장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자 지금은 매일매일 활기를 띠는 상설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굳이 날짜를 염두에 두지 않아도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장이 된 것이다. 2, 7일에 가축시장이 추가되는 점만 빼면 매일이 장날이다.

점포가 280여 개나 되고 그 안에서 장사하는 상인의 수만 500여 명이 넘는다.

시장 주변에 무시로 펼쳐지는 할머니들의 난전까지 합치면 그 수는 더 된다.

명절 전에 찾은 시장은 더더욱 활기가 넘친다.

명절 장거리를 보러 온 주변 마을 사람들과 외지인들로 붐빈다. 꽤 멀리서도 찾아올 만큼 샘고을시장엔 살거리, 볼거리, 먹을거리가 그득하다.

시장 안에는 그야말로 없는 게 없다. 있을 건 있고 없을 건 없는 장이 아니라, 없을 것 같은 것도 있는 장이다.

농수산물을 비롯해 축산물과 가공식품이 즐비하고, 오래된 음식점과 방앗간, 떡집, 철물점, 생필품점 들도 저마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특히 농수산물을 파는 골목은 사고파는 사람들의 흥정과 옥신각신, 웃음소리와 성난 듯 높은 소리로 장이 들썩들썩한다.

“한 움큼 더 주이소. 천 원만 깎아주든가~”

“아따, 대목에 인심을 솔찬히 썼구만. 더는 안 된다이~”

장 보러 나온 아주머니와 상인이 옥신각신 흥정을 벌이는 모습이야말로 재래시장의 오래된 볼거리다.

시장에 가면 사람들의 활기와 삶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장은 무엇을 사거나 팔러 오는 곳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서로가 부대끼는 곳이기도 하다.

아는 사람끼리 혹은 모르는 사람과도 만나 무시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서로 정을 나누는 장소다.

먼 세상 새로운 소식을 듣기도 하고, 주변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이야기를 한 소쿠리씩, 한 포대씩 풀어놓는 곳이다.

서로 마주보며 웃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그렇게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정들어가는 만남의 장소다.

그래서 장 볼 것이 많지 않아도 시장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샘고을시장에는 이색적인 풍경이 몇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방앗간 옆 미용실’이다.

방앗간 골목에는 미용실 10여 곳이 한 집 건너 한 집씩 자리했다.

방앗간에 떡쌀이나 고추 등을 맡겨놓고 그것들이 빻아지는 동안 아주머니, 할머니 들이 꼬불꼬불 파마를 하는 것이다.

시장 나온 김에 장도 보고 머리도 하고, 기다리는 시간 지루하지 않게 미용실에서 오랜만에 만난 이웃 동네 아지매들과 한판 수다도 떤다.

남자들이 국밥집에서 소주잔 기울이며 설왕설래하는 동안 여자들은 미용실에서 수다 삼매경에 빠진다.

한참 수다를 떨고 나면 꼬불꼬불 오래갈 파마가 완성되고, 방앗간에 맡겨놓은 떡쌀도 뽀얀 얼굴을 하고 기다린다.

제주를 닮다 지오푸드 제주를 담다

제주를 닮다 지오푸드 제주를 담다

제주를 닮다 지오푸드 제주를 담다

대구의 큰 자랑 선비 정신

제주도와의 만남은 육지 이방인에겐 늘 설렘이다.

이른 새벽에 비행기를 타고 도착해 늦은 밤 비행기로 되돌아오는 빡빡한 업무 일정 속에도 제주행 비행기의 탑승구를 오르는 발걸음은 소풍 길에 나서는 아이처럼 언제나 들떠 있다.

1주일이라는 비교적 긴 휴가기간을 할애해 리조트에서 뒹굴뒹굴 보낼 계획을 짤 때도 마찬가지.

그때까지 만나지 못한 신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란 막연한 기대감이 불쑥불쑥 기분 좋게 다가온다.

제주도를 향한 설렘은 만날 때마다 제주 섬이 상상조차 못 했던 경이로운 감동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감동은 용머리해안이었던 것 같다. 뭍에선 전혀 보지 못했던 지층, 마치 시루떡의 단면을 연상케 했다.

무슨 이런 단층이 다 있나, 바위인가 흙인가 궁금해 손으로 직접 까칠까칠한 표면을 만져보기까지 한 기억이 떠오른다.

다음은 동남쪽에 위치한 성산일출봉. 뜨거운 마그마가 분출하면서 바다와 만나 형성된 왕관 모양의 봉우리다.

멀리서보면 멀리서 보는 대로 아름다운 웅장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발 한발 걸어 올라가 정상에서 봐도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경이로움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한 번은 오동통한 제 한 몸조차 가누기 어려울 정도의 거센 바람에 혼쭐난 날도 있었다.

그것도 신기해 그저 웃음 밖에 안 나왔다.

몽당연필부터 새 연필까지 키가 다른 수십~수백 개의 연필묶음을 세워놓은 듯한 주상절리대가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든 적도 있었다.

또 유홍준 선생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돌하루방 어디 감수광’을 사 들고 오름을 걸을 땐 제주 섬의 속살을 발견하는 탐험가의 즐거움을 만끽하기도 했다.

하루를 봐도 눈이 휘둥그레지고, 일주일을 보내도 모든 게 신기하기만한 제주도.

정작 그 섬에서 태어나 40년을 살아온 본토박이 섬사람조차 “나도 매일매일 놀라며 산다”고 말하는 곳이 제주도다.

이런 제주의 경이로움 중심엔 화산으로 시작한 흙과 땅이 있다. 수십만 년 전 화산 활동이 만들어낸 작품인 셈이다.

제주가 ‘화산학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까닭이기도 하다.

유네스코에선 이를 인정해 2010년 제주를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했다.

세계지질공원은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공원을 말하지 않는다.

뛰어난 자연유산의 지질학적인 가치를 보호하면서 이를 토대로 관광을 활성화해 지역경제의 발전을 도모하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에 제주관광공사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지질(GEO·지오)을 테마로 한 음식 ‘지오푸드(GEO FOOD)’를 개발해 보급에 나선 것이다.

지오푸드는 한라산, 만장굴, 성산일출봉, 천지연폭포, 용머리해안, 산방산, 우도 등 제주도의 지질과 관련된 핵심 명소의 특성과 문화적 환경을

모티브로 삼아 제주지역에서 생산한 식재료를 활용한 로컬푸드다.

돔배고기, 몸국, 오메기떡 등 기존 제주 음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먹거리를 개발해 도민들의 소득을 올리겠다는 의도가 시작점이다.

독일의 ‘지질와인’, 영국의 ‘지질치즈’, 일본의 ‘지오스위츠’나 ‘지질호빵’ 등 외국에도 유사한 형태의 음식이 있단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지오푸드를 먹어본 결과, ‘역시 인간의 힘이 자연을 따를 재간은 없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하지만 다행히 자연과 문화를 사랑하는 제주도민들의 뜨거운 열정을 입안에 담는 별난 경이로움을 맛봤다.

대표적인 지오푸드 업소와 메뉴를 소개한다.지오푸드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베이커리다.

대표적인 메뉴는 용머리해안 지층 카스테라. 코코아 반죽과 화이트 반죽을 켜켜이 쌓아 만든 제품이다.

눈으로 얼핏 보면 용머리해안이라고 느끼기 어렵지만, 입에 넣어보면 예전에 손으로 느꼈던 용머리해안의 거친 촉감이 살아있다.

대구의 큰 자랑 선비 정신

대구의 큰 자랑 선비 정신

대구의 큰 자랑 선비 정신

영동 황간으로 떠나는 풍경 여행

조선 시대 성리학을 이끈 다섯 명의 대가를 가리켜 ‘조선오현(朝鮮五賢)’이라 부른다.

김굉필(1454~1504)은 영남학파 종조(宗祖) 김종직의 제자이자 사림파 영수(領袖) 조광조의 스승으로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이황도 그의 학문을 논하며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고 칭송할 정도다.

그러한 대학자가 남긴 선비 정신을 찾아 떠나는 길. 목적지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대니산 자락이 강을 향해 자세를 낮춘 곳에 있는 도동서원이다.

낙동강을 따라 달성군 현풍면에서 구지면으로 향하다 보면 ‘다람재’라는 작은 고개가 나온다.

이곳에 오르면 잠시 여행의 속도를 늦추게 된다.

산을 따라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낙동강이 여러 산줄기와 어우러져 절경을 자아내고 있는 것.

아름다운 경치에 빠져 있노라니 산자락의 경사면을 따라 정갈하게 건축된 서원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김굉필의 학문과 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도동서원이다.

어린 시절을 대니산 자락 동쪽의 솔례촌(현 달성군 대리)에서 보낸 김굉필은 18세에 장가들며 처가가 있던 합천군에서 생활했다.

당시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의 수제자로 들어가며 조선 성리학의 맥을 잊게 되었다.

이후 26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시절인 1498년에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단이 되어 발생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평안도 회천으로 귀양을 떠났다.

이후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사약을 받았다. 비록 그는 정쟁에 휘말려 역사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유배 당시 양성한 후학들에 의하여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대표적인 제자가 바로 조광조이다.

이처럼 성리학의 큰 줄기를 이어받아 죽을 때까지 후학 양성과 유학의 본질을 세상에 전하기에 헌신했던 사람.

그가 유학자로서의 본분을 다한 데에는 성리학의 기본이라 일컫는 《소학》에 심취했기 때문이라 한다.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칭할 정도였다.

대학자가 걸어온 역사의 흔적을 되새기며 서원 앞에 다다랐다.

문루인 수월루 앞에 도착하니 땅을 향해 가지를 늘어트린 커다란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도동서원이 사액된 것을 기념하여 김굉필의 외 증손인 한강 정구가 식수한 것으로 수령이 400년을 헤아린다.

잠시 나무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노라니 문화해설사가 다가와 설명을 곁들인다.

“이 은행나무는 김굉필 선생을 닮았습니다. 자세히 보면 나무 안에서 다른 나무 여럿을 키우고 있거든요.

스스로 터전이 되어 후학을 양성한 선생을 닮았잖아요.”

과연 커다란 줄기 안에서 서로 다른 나뭇가지가 보인다. 해설사의 설명이 이어진다.

“이 나무의 영험함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40년 전에 태풍이 불어 8톤 트럭 두 대 분량의 가지가 잘려나갔습니다. 당시 며칠간 나무가 소리 내며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평소 나무 밑은 아이들의 놀이터였는데, 아무도 다친 이가 없었고요. 서원에 깃든 남다른 기운이 나무에도 서린 게 아닐까요.”

영동 황간으로 떠나는 풍경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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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브라운핸즈 낡은 버스 차고지의 감각적인 변신

충북 영동군 서쪽에 자리 잡은 황간면은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다.

서쪽으로 더 가면 영남 지방을 이어주던 추풍령과 백두대간의 굵직한 산세, 금강의 지류인 초강천과 석천의 물줄기가 어울리며 수려한 풍경을 선사한다.

한천팔경인 월류봉, 석천과 백화산이 품고 있는 반야사, 한국전쟁의 상흔이 짙은 노근리평화공원을 둘러보고, 경부선 황간역과 추풍령역을 차례로 돌아본다.

가슴 아픈 비극의 현장, 노근리평화공원

노근리평화공원은 미군이 저지른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안타까운 노근리 사건의 진실이 규명되는 과정과 잊힌 과거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평화기념관, 실제 사건이 벌어진 쌍굴다리를 비롯해 위령탑과 조각공원, 전망대 등의 시설을 갖췄다.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은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4일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쌍굴다리로 불리는 개근철교 주변에서 벌어진 비극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은 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영동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당시 임계리 일대에 모인 피란민들을 남쪽으로 피란시키는 과정에서 미군은 방어선을 넘는 자들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무차별 기관총 난사로 무고한 민간인 몇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평화기념관에는 사건의 개요와 함께 1960년대에 시작된 노근리 사건의 진상 규명 요구부터 1999년 9월 AP통신 보도로 노근리 사건이 알려지게 된 경위

이후 진상조사와 2001년 당시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의 유감 표명,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까지 50년의 길고 길었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노근리평화공원 길 건너편에는 비극적인 사건의 현장인 개근철교가 있다.

‘이곳은 노근리 사건의 현장입니다’라고 쓰인 커다란 안내판이 마치 절규하는 듯하다.

철교에는 당시 총탄의 흔적이 흰 페인트 속에 갇혀 있다. 이 좁은 터널에서 몇백 명의 무고한 생명이 이유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다.

죽음을 맞이했던 몇백 명의 안타까운 비명은 사라진 지 오래고, 지금은 열차만이 무심히 철교 위를 지난다.

황간역은 황간면 소재지에서 초강천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어 다소 동떨어진 느낌이 들지만, 경부선 개통과 함께 문을 열어 11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석탄 수송용 화물열차가 정차한 큰 역에서 지금은 하루에 무궁화호 15대만 정차하는 한적한 역이 되었다.

과거를 돌아보면 ‘퇴락’이지만, 현재의 황간역은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해 ‘변화무쌍함’을 보여준다.

작은 역 광장에는 고향을 주제로 한 시와 그림이 새겨진 전통옹기가 옹기종기 모여 있고, 어렸을 적 한 번쯤 해봤을 땅따먹기, 돈가스, 사방치기 등 전통놀이판이 그려져 있다.

주말이면 시낭송회나 음악회도 열려 기차를 타지 않더라도 황간역을 알음알음 찾는다.

‘지역주민과 함께 가꾸는 아름다운 문화영토’라는 슬로건이 잘 어울린다. 황간역에 비치된 노랑자전거는 기차를 이용하는 여행객이라면 한 번쯤 타볼 만하다.

황간역에서 예약자에 한해 무료로 대여해준다. 황간역에서 가까운 월류봉(2.5km)이나 반야사(7.8km) 등을 다녀올 수 있다.

마산 브라운핸즈 낡은 버스 차고지의 감각적인 변신

마산 브라운핸즈 낡은 버스 차고지의 감각적인 변신

마산 브라운핸즈 낡은 버스 차고지의 감각적인 변신

군산으로 떠나는 주전부리 먹자여행

업사이클링(upcycling)이 트렌드가 된 요즘, 리사이클링(recycling) 차원을 넘어 버려지고 낡은 것에 디자인을 더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세상이다.

최근에는 건축 분야에 업사이클링 방식이 적극 활용되며 각광받고 있다.

오래된 공간이 주는 따뜻함과 새로운 디자인에서 나오는 감각이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낸다. 사람들이 업사이클링 건축 공간에 열광하는 이유일 것이다.

업사이클링 건축의 묘미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마산의 핫 플레이스 ‘브라운핸즈’를 소개한다.

지금 경남 일대에서 가장 ‘핫한’ 장소를 꼽으라면 단연 브라운핸즈 마산점이 아닐까 싶다.

이곳을 찾아가는데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외진 길이 이어진다. 불안해질 무렵 반가운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을 따라 들어가 처음 만나는 공간은 가스 충전소. 바닥에 있는 친절한 화살표 안내가 아니었다면 “설마, 여기?” 하며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가스 충전소를 지나 들어가면 그제야 탁 트인 바다와 브라운핸즈가 나타난다.

주변 분위기가 말해주듯 이곳은 원래 버스 차고지 겸 정비소였다.

수십 년 동안 마산 시내를 오가던 버스가 모이고 정비되던 곳이다.

버스 차고지가 철거된다는 이야기를 접한 브라운핸즈 이준규 대표가 업사이클링 복합 문화 공간으로 되살리자고 제안

브라운핸즈 마산점이 탄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산은 이 대표의 고향이기도 하다.

브라운핸즈는 라이프스타일 디자인 브랜드로, 2014년 서울 도곡동의 오래된 자동차 정비소를 복합 문화 공간 ‘브라운핸즈 쇼룸&카페’로 오픈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브라운핸즈 도곡점은 빈티지한 분위기 덕에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촬영지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두 번째 브라운핸즈 쇼룸&카페가 2015년 여름, 마산에 문을 열었다.

버스 차고지의 분위기를 최대한 유지하는 선에서 리노베이션 작업이 진행됐다.

건물 전면에 보이는 ‘안전제일’이나 내부의 ‘닦고 조이고 기름 치자’는 문구가 고스란히 살아 있다.

정비사가 차량 아래 들어가 작업하던 움푹 파인 공간 등 옛 정비소의 독특한 요소도 곳곳에 살려두었다.

브라운핸즈는 쇼룸과 갤러리 역할도 한다. 카페 안에서 브라운핸즈 제품을 만나고,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이곳에 들어서면 눈에 띄는 포인트 중 하나가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다.

브라운핸즈와 현대미술 조각가 정의지가 협업해 만든 예술 작품이다. 버려진 양은 냄비와 리벳, 알루미늄 주물로 만든 조명 기구가 업사이클링 공간을 더욱 빛내준다.

카페 내부에는 이렇게 참신한 구경거리가 가득하고, 외부에는 바다 전망이 펼쳐진다.

버스 차고지로 남았다면 아까웠을 자리에 브라운핸즈가 있다.

마산에서 브라운핸즈만큼 주목받는 곳이 또 하나 있다.

빨간 벽돌 건물이 인상적인 ‘브릭루즈’. 가게 이름도 프랑스어로 ‘빨간 벽돌(brique rouge)’이라는 뜻이다.

가정집을 개조해 레스토랑 겸 카페로 운영한다.

군산으로 떠나는 주전부리 먹자여행

군산으로 떠나는 주전부리 먹자여행

군산으로 떠나는 주전부리 먹자여행

창녕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답사여행

군산은 근대 역사 도시다. 구도심 곳곳에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적산가옥도 많고 구조선은행, 구군산세관, 근대역사박물관 같은 근대 문화유산도 즐비하다.

미곡을 수탈해 가던 옛 철길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군산의 근대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여행이 아니다.

구도심에 펼쳐진 근대의 흔적들을 덤으로, 갖가지 먹을거리를 찾아다니는 일명 ‘먹자여행’이다.

군산에서는 길거리에 흔한 웬만한 식당도 40년 역사를 쉽게 넘긴다. 해방 후부터 쭉 이어지고 있는 식당이나 주전부리도 심심찮다.

역사는 거리나 건물, 철길에도 흐르지만 우리네 음식에도 생생하게 흐르고 있다.

군산 하면 바로 떠오르는 이성당

2~3년 전부터 전국 곳곳에서 오랫동안 시간과 맛을 쌓아온 옛날 빵집들이 호황이다.

그런 이유로 요즘엔 군산 하면 이성당부터 떠오른다.

이성당 단팥빵은 군산 가면 꼭 한번 먹어보고 싶은 간식이 됐고, 숱하게 매스컴을 탄 덕분에 이제 군산에 가도 쉽게 맛볼 수 없는 명물이 됐다.

해방 후 역사만 67년에 이르는 이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단팥빵과 야채빵이 구워져 나오는 것은 하루 몇 차례.

그날그날 정해진 시간에 빵이 나오는데, 기다리고 있던 손님들이 그 시간을 보상받고자 한 번에 몇십 개씩 사가는 통에 단팥빵 쟁반은 빵이 나오기 무섭게 바닥을 드러낸다.

빵이 채 식기도 전에 빵을 차지하고자 하는 손님들의 빠른 손놀림이 먼저 식을 판이다.

그래서 단팥빵이나 야채빵은 1인당 사갈 수 있는 빵의 갯수를 제한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맛본 따뜻한 단팥빵 하나는 기다림에 지친 마음을 단숨에 위로한다.

담백하고 달달한 팥소가 가득 든 단팥빵은 몽실몽실 부드럽고, 어릴 적 시장에서 엄마가 사주시던 아삭아삭 야채빵도 옛날 맛 그대로다.

애써 찾아가고 기다린 보람이 있다.

사실 빵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 건 빵이 나오기까지의 기다림과 설렘 때문이다.

아무때고 단번에 살 수 없다는 아쉬움, 누구나 사먹고 싶어 하는 빵을 차지했다는 기쁨

먼 데서부터 부러 찾아갈 때까지 빵 하나에 담긴 기대 같은 것들이 어우러져 실제보다 더 맛있게 느껴질 법도 하다.

이성당 빵의 70% 정도는 쌀가루를 섞어 만들고 어떤 것은 100% 쌀가루로 만들기도 한다.

그중 블루빵이 100% 쌀가루 빵이다. 쫄깃하고 소화도 잘 되는 쌀가루로 만든 빵은 식사 대용으로도 손색없다.

이성당에서는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 계란프라이와 스프, 커피와 샌드위치가 어우러진 모닝세트를 판매한다.

서양식 아침식사를 동경하던 옛날부터 지금까지도 인기다. 영업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 30분까지(유동적 휴무).

군산에는 이성당 말고도 또 다른 의미의 명물 빵집이 있다. 바로 영국빵집이다.

1980년대 초에 문을 열어 동네 빵집으로 꾸준히 이름을 알리다가 3년 전부터 군산에서 생산되는 ‘흰찰쌀보리’라는 보릿가루를 반죽에 섞으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흰찰쌀보리는 희고 찰기가 있는 보리 품종으로 군산에서 대량 생산된다.

보리는 원래 농약을 칠 필요가 없는 곡물이어서 안심이 되는 데다 찰쌀보리가 찰기까지 더해 쫀득한 빵이 만들어진다.

자칫 퍽퍽할 수 있는 소보로빵도 촉촉하고 쫀득하다.

보릿가루를 50% 정도 섞어 만드는 단팥빵과 부추빵을 비롯해 100% 보리 반죽으로 만드는 보리만쥬가 영국빵집의 대표 빵이다.

창녕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답사여행

창녕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답사여행

창녕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답사여행

상큼하고 쫀득한 영주의 별미와 디저트

창녕 하면 우포늪을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떠오르는 것이 우포늪뿐이라면 창녕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창녕은 가야소국 가운데 하나인 비화가야가 세력을 떨친 곳으로, 신라 진흥왕이 가야를 복속시킨 뒤 신라 땅임을 선포하며 진흥왕척경비를 세운 고장이기도 하다.

가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광대한 역사 유적이 남아 있으며, 국보 2점과 보물 4점을 비롯해 소중한 문화유산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부내륙고속도로 창녕IC로 나가면 넓게 펼쳐진 창녕 읍내 너머로 우뚝 솟아오른 화왕산이 눈에 띈다. 삼국시대에 비자화군

화왕군으로 불리던 이곳은 고려시대에 비로소 창녕이란 이름을 얻었다. 삼국시대 비자화군을 토대로 창녕을 ‘붉은 들판’이란 뜻으로 비사벌이라 부른다.

비사벌은 가야의 소국이었던 비화가야가 세력을 떨친 곳으로, 진흥왕 때 신라에 복속된 이후로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비화가야의 흔적으로 여겨지는 교동고분군과 송현동고분군을 비롯해 신라 진흥왕이 비화가야를 복속시키고 그 땅에 세운 진흥왕척경비

통일신라시대의 술정리 동·서삼층석탑, 인양사조성비, 송현동 마애여래좌상, 조선시대 창녕 석빙고와 창녕향교가 읍내를 중심으로 가까운 거리에 흩어져 있다.

문화유산을 차례로 만나보는 것도 좋지만, 창녕 읍내의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조성된 ‘진흥왕행차길’과 ‘송현이길’을 걷는 것도 추천한다.

진흥왕행차길은 진흥왕척경비를 중심으로 이어지며 이동거리는 약 7㎞다. 송현이길은 송현동고분군에서 발굴된 순장 인골의 주인인 1,500년 전 가야 소녀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송현리에서 발굴됐다 하여 소녀에게 ‘송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길도 그 이름을 따랐다.

송현이길의 이동거리는 약 4㎞이다. 두 길은 서로 겹치는 구간이 있지만, 크지 않은 창녕 읍내를 걸으며 문화유산 답사를 즐기기에 제격이다.

진흥왕행차길은 창녕박물관을 출발해 진흥왕척경비가 있는 만옥정공원, 창녕 석빙고, 술정리 하씨 고가, 술정리 동·서삼층석탑, 직교리 당간지주

인양사조성비, 사직단, 만덕지를 지나 창녕향교로 이어진다. 송현이길은 창녕박물관에서 교동·송현동고분군

송현동 마애여래좌상, 진흥왕척경비, 창녕 석빙고, 창녕향교를 거쳐 교동고분군과 창녕박물관으로 되돌아오는 코스다.

창녕IC에서 창녕 읍내로 들어가는 길에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술정리 서삼층석탑이다.

1㎞ 채 안 되게 떨어져 있는 술정리 동삼층석탑과 서로 비교하며 둘러보면 좋다.

두 삼층석탑은 술정리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자리 잡고 있다. 둘 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이지만 여러모로 다른 점을 보인다.

동삼층석탑은 국보 제34호로 지정되었고, 서삼층석탑은 보물 제520호다. 동삼층석탑이 조금 클 뿐, 탑의 형식과 모습은 대체로 비슷하다.

동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고, 선이 날카로우며, 정제된 느낌이 든다.

그에 비해 서삼층석탑은 조금 날렵하며, 선이 뭉툭하고 부드러운 느낌이다.

서삼층석탑은 남중파크로 난 좁은 길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고, 동삼층석탑은 창녕공설시장을 찾으면 쉽다.

창녕상설시장을 나와 명덕로를 따라 우회전해 가다 보면 조선시대 걸작품인 창녕 석빙고를 만난다.

석빙고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얼음창고다. 2012년에 개봉했던 차태현 주연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조선시대 한양의 석빙고였던 서빙고를 주제로 했다.

석빙고는 경주, 안동, 청도, 달성에도 있는데, 창녕에는 창녕읍과 영산면 두 곳에 석빙고가 남아 있다.

창녕 석빙고는 보물 제310호로 지정되었다.

창녕군청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만나는 삼진아파트 인근의 인양사조성비(보물 제227호),

송현동고분군 입구의 창화사와 가까운 곳에 있는 송현동 마애여래좌상(보물 제75호)도 창녕 읍내에서 만나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창녕 읍내를 관통하는 20번 국도는 북쪽으로 청도, 남쪽으로 낙동강을 건너 의령 땅으로 이어진다.

읍내를 벗어나 청도로 가는 국도변에는 교동고분군이, 화왕산군립공원 입구의 창화사 인근에는 송현동고분군이 자리한다.

두 고분군이 하나로 묶여 사적 제514호로 지정되었다.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은 5~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비사벌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던 비화가야의 흔적이다. 고려시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따르면, 비화가야는 금관가야, 고령가야, 아라가야, 성산가야와 함께 5가야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