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화양동 청풍명월을 따라 자연을 느낀다
괴산 화양동 청풍명월을 따라 자연을 느낀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봉림대군, 후에 효종으로 즉위한 그의 스승이었던 우암 송시열이 직접 명명한 화양구곡은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곳입니다. 우암은 그 실패의 한을 안고 이곳에 터를 잡았으며, 이와 관련된 병자호란은 사회 교과서 5학년 2학기 3단원에서 다루는 내용입니다.
충청북도가 청풍명월의 고장으로 불리는 가운데, 괴산은 산고수청의 고을로 알려져 있습니다. 백두대간의 준봉들이 웅장하게 솟아 있으며, 그 산자락을 따라 흐르는 계류는 거울처럼 맑습니다. 특히 괴산군 청천면의 화양동 계곡은 이 지역을 대표하는 절경으로, 넓은 너럭바위, 맑은 계류, 기암절벽, 그리고 울창한 숲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습니다.
일찍이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금강산 남쪽의 으뜸가는 산수로 찬사한 이곳은, 조선 중기의 대정치가 우암 송시열이 은거한 이후 널리 알려졌습니다. 화양동 계곡에서 가장 빼어난 아홉 곳을 화양구곡으로 부르며, 이는 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곶을 가리킵니다. 이 이름을 지은 이는 우암의 제자 권상하입니다.
운영담은 맑은 물에 구름 그림자가 비친다는 뜻으로, 주자의 시구에서 유래했습니다. 읍궁암은 효종의 제삿날에 우암이 통곡했던 바위로, 그 역사가 깃든 장소입니다.
우암 선생이 자연 속에서 정진했던 암서재
화양구곡 중 금사담은 물 속에 금빛 모래가 깔려 있어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합니다. 이곳의 우뚝한 바위 위에 위치한 암서재는 우암이 책을 읽고 정진하던 독서재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아담한 기와집으로, 효종 6년에 세워진 이래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습니다.
건물 뒤쪽에는 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앞쪽으로는 화양동계곡의 풍광이 훤히 펼쳐집니다. 세월의 흔적이 배인 누마루에 앉아 이곳의 수려한 경치를 바라보면, 우암의 포부와 풍류가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우암이 세상을 떠난 후 화양동에는 그를 기리는 화양서원이 세워졌습니다. 당시 노론계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위패가 봉안된 만동묘와 함께 큰 위세를 떨쳤습니다. 만동묘의 이름은 첨성대의 암벽에 새겨진 선조의 친필 '만절필동'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충신의 절개가 꺾이지 않음을 상징합니다. 병자호란 직후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이곳은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