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맛이 운명을 바꾼 상주의 막걸리 경북 상주 은자골탁배기
물맛이 운명을 바꾼 상주의 막걸리 경북 상주 은자골탁배기
경북 상주의 은자골탁배기는 3대째 100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탁주다.
우연한 기회에 뛰어난 물맛이 알려지면서 은자골탁배기로 거듭났다. 이름처럼 구수한 100년 전통의 은자골탁배기와 탁주를 빚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오랜 역사를 간직한 상주의 전통 막걸리
죽은 사람도 살리는 영험함을 가진 은자가 묻혀 있다 하여 이름 붙여진 은자골에는 서민들의 삶과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탁주를 빚는 ‘술 익는 마을’이 있다.
은자골탁배기가 바로 그 곳.
탁배기는 탁주의 경상도 사투리로 가주 또는 농주로 불리며 서민들을 대표하는 술로 자리매김해왔다.
100여 년의 전통을 간직한 은자골탁배기는 탁주를 만드는 사람들의 삶의 애환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은자골탁배기는 1994년에 작고한 이동영 씨를 시작으로 며느리이자 현 사장인 임주원 씨와 그녀의 아들인 이재희 씨로 3대째 이어지고 있다.
은자골탁배기의 역사는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주원 씨의 시아버지인 고 이동영 씨는 막걸리에 애착이 참 많았다고 한다.
당시 매형이 운영하던 양조장의 막걸리 맛에 반해 고교 시절부터 양조장을 드나들며 틈틈이 제조법을 배우고 21세 때부터 막걸리를 빚기 시작했는데, 맛이 좋아 주변에 입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결국 매형이 수십 년 동안 운영했던 양조장을 통째로 넘겨받아 본격적으로 술을 빚기 시작한 것이 은척양조장의 시작이다.
막걸리 맛이 좋다 보니 전해지는 에피소드도 많다.
이웃 주민들이 양조장 앞에서 술판을 벌이다가 술에 취하자 리어카를 가져와 실어가기도 하고, 쌀을 가져와 술로 바꿔 가기도 했다 한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들이닥쳤는데 막걸리 맛을 본 인민군이 양조장의 막걸리를 금세 동내고 술을 더 빚어내라며 행패를 부린 일도 있단다.
고 이동영 씨의 막걸리 사랑도 대단했다. 그에게 막걸리는 곧 밥이고 약이었다. 막걸리가 몸에 좋다며 늘 공복에 한두 잔씩 마셨다.
손자인 이재희 씨도 공복에 한 잔씩 먹은 기억이 난다며, 취해서 잠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양조장의 운명을 바꿔놓은 은자골탁배기의 물맛
1980년대 들어서면서 양조장 운영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소주와 맥주의 판매량이 늘면서 막걸리를 찾는 사람들이 서서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1994년에 시아버지가 작고한 뒤 양조장은 며느리인 임주원 씨가 이어받았다.
은척양조장이 은자골탁배기로 거듭나게 된 것은 경북대 미생물학 교수와의 우연한 만남 덕분이다.
한번은 미생물학 교수가 버섯 농가를 둘러보기 위해 은척면에 왔다가 우연히 임주원 씨 집에 들르게 되었다.
마침 날도 덥고 해서 물을 한잔 권했는데, 물을 마셔본 교수가 “막걸리 만드는 데 가장 적합한 물”이라며 물맛을 극찬했다.
이어 막걸리는 단순한 술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전통 발효음식이라며 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시 음료나 과일을 내드릴 수도 있었는데, 시원한 물을 먼저 낼 생각을 한 것은 아마도 은자골탁배기를 위한 운명적 선택이 아니었을까?
임주원 씨는 이때부터 막걸리를 다시 보게 됐고, 은척양조장을 다시 일으켜 세울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양조장을 본격적으로 가동하기에 앞서 효모와 막걸리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다.
막걸리의 가장 큰 단점은 뒤끝이 좋지 않고 트림을 하면 역한 냄새가 올라오는 것인데, 이를 개선하기 위해 술독에 빠지다시피 2년여를 보낸 끝에 은자골탁배기가 탄생했다.
옛날 방식은 발효 과정에서 독성이 생길 뿐 아니라 제대로 숙성되지 않은 상태로 막걸리를 마셨기 때문에 주로 뱃속에서 발효가 돼 트림이 나고 머리가 아팠던 것.
저온으로 숙성 기간을 늘린 은자골탁배기는 맛도 제법 독특하다. 은자골탁배기와는 몇 해 전 문경의 한 식당에서 첫 대면을 했다.
탁주 특유의 텁텁하고 걸쭉한 맛이 적고, 청량음료처럼 톡 쏘는 느낌이 무척 세련되고 새로운 맛이었다.
막걸리를 마시는 동안이나 마신 후에도 막걸리를 마신 티가 전혀 나지 않아 식당 주인에게 막걸리를 어디서 가져오는지 물었던 기억이 있다.